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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 -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안규남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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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은 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과 에릭슨 출판사의 편집자로 지냈던 리카르도 마체오가 24통의 편지로 주고받은 최후의 대화를 엮은 것이다. 이들은 문학과 사회학이 경계선을 나누는 것보다 협력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학과 달리, 19세기에 등장한 "사회학(sociology)"이 정체성을 주장하는 대신, 협력을 제안하는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사회학의 토대와 역량이 그만큼 두터워졌다는 방증이다.
문학과 사회학은 연구 방법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덕분에 각자가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상호 보완하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인간의 경험과 체험은 이미 해석된 형태로 작가와 사회학자의 작업대에 도착한다. 즉, 문학과 사회학은 "이차적 해석'의 활동이다. 인간적인 갈등, 대립과 무관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은 문학과 사회학에서 있을 수 없다.
<문학 예찬>은 예술과 인문사회과학 간의 생생한 다면적 관계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풀어간다. 말에 대한 압박이 증가하는 시대 흐름에 대한 마체오의 물음에, 바우만은 언어의 완성은 환상이지만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므로 유용한 환상이라고 답한다.
혐오 발언보다 인간의 자유에 해로운 것은 '전략적 봉쇄 소송(= 입막음)'이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언론 자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동시에, 자유의 가이드라인은 없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문학에서 구원을 모색하고 발견할 수 있지만,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소비 지상주의 시대는 재화들의 극심한 불평등 분배가 자리 잡고 있다.
소비를 부추기는 종소리만이 유일한 평등이다. "(물건을)사라"는 판매자의 대상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날마다 저속화와 이기주의 홍보를 통해 소비를 조장하며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의 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소비자이지, 시민이 아니다.
바우만은 전근대(or 구체제), 근대, 오늘날의 액체 현대 같은 단계들이 서로의 단계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공존하는 것이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우만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을 뜻하는 '액체 현대' 외에 21세기의 대표적 은유로 마체오는 이탈리아 베로나 대학 문학 교수 스테파노 타니의 "스크린, 알츠하이머, 좀비"를 소개한다. 스크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 알츠하이머는 자신을 비우는 것, 좀비는 자신을 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3개의 은유가 모두 '자기 지시'라는 공통점을 가진 것을 포착한 바우만은 21세기의 모든 은유를 함축한 은유는 바로 '나르키소스'임을 언급한다.
나르키소스는 소비자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실존적 조건으로 인해 소비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는 활동(자신을 바라보고 비워내며 변형)을 상징한다. 19~20세기의 원형이 장인의 피그말리온이라면, 나르키소스는 소비자의 원형이다.
액체 현대의 자아(self)은 "외주 제작된 자아"이다. 삶의 거의 모든 면에서 전문적인 카운슬러가 제공하는 (대부분 구매 가능한) 서비스를 통해 대충 만들어진 일종의 조각보 자아이다. 오은영 박사의 상담비가 10분당 9만 원이라는 뉴스처럼, 시장에서 유용한 조언/지침의 권위는 가격으로 결정된다.
자아는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도덕적 문제로 재생하는 실험실이 아니라 아디아포라화(불쾌감이 주는 잘못된 행동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윤리적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의 공장이 되고 있다.
누구의 노래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한다는 것이다. 트위터 문학은 꿈은 발전시키지 않고, 꿈의 실현을 상상하는 기술만 발전한다는 위험이 있다.
협력과 연대로 가기 위해선 세상을 공유하고 차이와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오프라인의 불편한 다양성을 회피하는 온라인의 피난처가 기술 습득을 방해하거나 회피를 유혹하지만, 이들을 오프라인 세계의 자폐증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을 더욱 온라인 세상으로 은신하도록 만드는 우를 범한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지만,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다양성을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의 성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지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다.
예술(사회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일생 동안 바우만을 괴롭힌 물음이며, 부정적 답으로 가는 증거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괴롭다는 심정을 첨언한다.
소비 중독이 행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유령에 감춰진 실체는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이다.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 소명은 이를 다시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다. 둘은 서로 보완하며 끊임없이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회학의 최고 매력은 현시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문학 예찬>은 지그문트 바우만 사상의 입문서이다.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21세계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액체 현대에서 교육만 유독 불평등의 재생산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고정되고 있다. "내적 모험의 전문가, 시간의 장인, 청춘의 카드 딜러"인 교사가 공평하게 카드를 나눠준다고 해도, 나눠줄 카드는 부족한 현실이며, 한발 앞서가기 전략을 지배하는 경쟁 사회가 교육을 통해 얻은 역량과 숙달을 제로섬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최상위 학교의 주목적은 지식 함양이나 학생의 행복이 아니다. 힘 있는 부모들의 지위를 물려받게 될 자녀들과의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를 읽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려준 출판사 21세기 문화원의 서평 모집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