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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순례자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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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완간 30주년 기념 개정판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지난 8월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되면서 현재 10권까지 만나볼 수 있다. 지난번 5권과 달리, 1권만 서평단 모집에 살짝 서운했지만, <고행의 순례자>를 읽으면서 흐지부지 사라진다. 역사추리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이다. 


​허용 가능한 표현이라면, <고행의 순례자>는 역사추리가 아니라 종교 추리 소설에 더 가깝다.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의 왕권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살인 사건이 각자의 위치에서 해결책을 도모한다. 


책을 덮고 나면, 참회와 구원에 관한 작가 앨리스 피터스의 생각에 딴지를 걸 수 없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추리 소설의 재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인간미에 감화된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는 이유이며 추천하는 이유이다. 악인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선인이 고군분투하지 않으며 협력자와 함께 "신앙과 법"의 이름으로 포용하고 징벌한다. 매번 커플을 성사시키는 캐드펠 수사의 중매술은 덤이다. 


출간된 10권 중에서 6권을 읽었다. 읽은 5권 모두 산뜻한 결말이다. <고행의 순례자>는 예외이다. "이렇게 끝낸다고?" 드라마의 'to be continued'를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도 볼 줄이야!


오해는 마시라! <고행의 순례자>는 추리소설로서 완벽한 결말을 맺는다. <수도사의 두건>에서 캐드펠 수사의 첫사랑의 등장처럼, 그의 개인사와 관련된 일이다. 


캐드펠 아저씨가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면서 여러 여인들과 놀 것 다 놀고 수도사가 된 양반이라, 그의 개인사에 얽힌 이야기는 또 다른 흥밋거리이다. 


휴 베링어의 언급을 보자면 6권 ~ 9권 사이에서 이미 등장한 인물이다. 정체가 10권 <고행의 순례자>에서 밝혀진 것뿐이다. 출판사의 이유 있는 "10권 서평단 모집"인 셈이다. 


<고행의 순례자>는 캐드펠이 친구 휴 베링어에게 <시체에 대한 기이한 취향>의 결말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캐드펠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위니프리드 성녀의 허락 여부가 신경 쓰인다. 6월 22일 수도원의 축제날, 그녀의 기적을 바라는 캐드펠이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관을 보기 위한 순례자들이 캐드펠의 수도원을 연이어 방문한다.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16살의 흐륀, 그의 누나 18살 멜랑에흘, 남매의 이모 위버 부인, 도중에 그들을 만나 여정을 동행한 20대 중반의 사내 두 명, 키이란과 매슈가 캐드펠 수사를 찾아온다. 


곧 대관식을 치를 모드 황후의 사절인 올리비에는 휴 베링어에게 대의를 위한 승복을 요청한다. 휴는 스티븐 왕이 포로로 잡혔지만,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공적인 임무를 마친 올리비에는 사적인 임무, 즉 뤼크 메버벨이라는 청년을 찾는다고 도움을 청한다.

이외에도 순례자들의 짐 꾸러미를 탐하는 불한당의 존재가 소설적 재미를 더한다. 캐드펠 수사가 첫눈에 보자마자, 공통의 관심을 공유한 사람임을 간파한 애덤 수사는 조만간 또 등장하지 않을까?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는 고통을 안고


태어나 겸허한 태도로 이를 감내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에


굳이 스스로에게 요란한 고행을 부과하다니,


사실 내겐 뭔가 초점이 어긋난


이상한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경건한 행동일지는 몰라도


통 곱게 보이지가 않아요.”



pp. 104~105


<고행의 순례자>는 작가 앨리스 피터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캐드펠 수사의 입을 빌려 고행을 바라보는 그녀의 생각이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기적을 허용하는 동시에 로돌푸스 수도원장이 "기적의 행위"를 한 번 더 검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신의 기적과 그것을 가장하는 인간의 속임수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순간, 독자는 그들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복수와 징벌을 원했던 자가 표출한 분노의 대상자조차,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경멸하지만 <고행의 순례자>의 경우, 납득이 가능했던 이유는 살인자가 징벌을 나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혼자였을 때도 벗지 않았다! 


복수란 오로지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군.

그 이상을 깨달았지요. 저는 주님께서

틀림없이 죄 갚음을 해주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래 지체될 수도 있고

이상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죄에 대한 응보는

확실히 온다는 점을요.”

p.313


 "여위고 기름한 윤곽(p.58)"이라는 문구 덕분에 "기름하다"라는 단어를 접한다. "갸름하다"의 오타로 생각해서 찾았더니, "조금 긴 듯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였다. 국어 실력의 함양을 원한다면,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길 추천한다. 


무엇보다 재밌다. 스티븐 왕이 정통성의 부재라는 핸디캡에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모드 황후의 인간 됨이 부족했음을 알려주는 <고행의 순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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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 - 문학과 사회학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리카르도 마체오 지음, 안규남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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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예찬>은 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과 에릭슨 출판사의 편집자로 지냈던 리카르도 마체오가 24통의 편지로 주고받은 최후의 대화를 엮은 것이다. 이들은 문학과 사회학이 경계선을 나누는 것보다 협력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학과 달리, 19세기에 등장한 "사회학(sociology)"이 정체성을 주장하는 대신, 협력을 제안하는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사회학의 토대와 역량이 그만큼 두터워졌다는 방증이다.


문학과 사회학은 연구 방법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덕분에 각자가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상호 보완하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인간의 경험과 체험은 이미 해석된 형태로 작가와 사회학자의 작업대에 도착한다. 즉, 문학과 사회학은 "이차적 해석'의 활동이다. 인간적인 갈등, 대립과 무관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은 문학과 사회학에서 있을 수 없다. 


<문학 예찬>은 예술과 인문사회과학 간의 생생한 다면적 관계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풀어간다. 말에  대한 압박이 증가하는 시대 흐름에 대한 마체오의 물음에, 바우만은 언어의 완성은 환상이지만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므로 유용한 환상이라고 답한다. 


혐오 발언보다 인간의 자유에 해로운 것은 '전략적 봉쇄 소송(= 입막음)'이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언론 자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동시에, 자유의 가이드라인은 없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문학에서 구원을 모색하고 발견할 수 있지만,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소비 지상주의 시대는 재화들의 극심한 불평등 분배가 자리 잡고 있다. 


소비를 부추기는 종소리만이 유일한 평등이다. "(물건을)사라"는 판매자의 대상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날마다 저속화와 이기주의 홍보를 통해 소비를 조장하며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의 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소비자이지, 시민이 아니다. 


바우만은 전근대(or 구체제), 근대, 오늘날의 액체 현대 같은 단계들이 서로의 단계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공존하는 것이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우만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을 뜻하는 '액체 현대' 외에 21세기의 대표적 은유로 마체오는 이탈리아 베로나 대학 문학 교수 스테파노 타니의 "스크린, 알츠하이머, 좀비"를 소개한다. 스크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 알츠하이머는 자신을 비우는 것, 좀비는 자신을 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3개의 은유가 모두 '자기 지시'라는 공통점을 가진 것을 포착한 바우만은 21세기의 모든 은유를 함축한 은유는 바로 '나르키소스'임을 언급한다. 


나르키소스는 소비자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실존적 조건으로 인해 소비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는 활동(자신을 바라보고 비워내며 변형)을 상징한다. 19~20세기의 원형이 장인의 피그말리온이라면, 나르키소스는 소비자의 원형이다. 


액체 현대의 자아(self)은 "외주 제작된 자아"이다. 삶의 거의 모든 면에서 전문적인 카운슬러가 제공하는 (대부분 구매 가능한) 서비스를 통해 대충 만들어진 일종의 조각보 자아이다. 오은영 박사의 상담비가 10분당 9만 원이라는 뉴스처럼, 시장에서 유용한 조언/지침의 권위는 가격으로 결정된다. 


자아는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도덕적 문제로 재생하는 실험실이 아니라 아디아포라화(불쾌감이 주는 잘못된 행동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윤리적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의 공장이 되고 있다. 


누구의 노래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한다는 것이다. 트위터 문학은 꿈은 발전시키지 않고, 꿈의 실현을 상상하는 기술만 발전한다는 위험이 있다. 


협력과 연대로 가기 위해선 세상을 공유하고 차이와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오프라인의 불편한 다양성을 회피하는 온라인의 피난처가 기술 습득을 방해하거나 회피를 유혹하지만, 이들을 오프라인 세계의 자폐증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을 더욱 온라인 세상으로 은신하도록 만드는 우를 범한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지만,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다양성을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의 성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지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다. 


예술(사회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일생 동안 바우만을 괴롭힌 물음이며, 부정적 답으로 가는 증거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괴롭다는 심정을 첨언한다. 


소비 중독이 행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유령에 감춰진 실체는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이다.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 소명은 이를 다시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다. 둘은 서로 보완하며 끊임없이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회학의 최고 매력은 현시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문학 예찬>은 지그문트 바우만 사상의 입문서이다.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21세계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액체 현대에서 교육만 유독 불평등의 재생산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고정되고 있다. "내적 모험의 전문가, 시간의 장인, 청춘의 카드 딜러"인 교사가 공평하게 카드를 나눠준다고 해도, 나눠줄 카드는 부족한 현실이며, 한발 앞서가기 전략을 지배하는 경쟁 사회가 교육을 통해 얻은 역량과 숙달을 제로섬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최상위 학교의 주목적은 지식 함양이나 학생의 행복이 아니다. 힘 있는 부모들의 지위를 물려받게 될 자녀들과의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를 읽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려준 출판사 21세기 문화원의 서평 모집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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