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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평점 :
<탁영>은 넷플릭스 드라마 <탄금>의 원작자 장다혜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이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 <이날치, 파란만장> 또한, TV 드라마 제작 중이다. 이야기꾼으로서 인정받는 작가이다. 소설의 재미는 개인의 취향이 좌지우지한다. 본인이 "재미있다"라고 우겨도, 읽는 이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장다혜 작가의 글솜씨는 독자 추천의 중요한 명분이다. <탁영>의 재미는 각자의 몫이지만, 읽는 내내 귀하디귀한 우리말의 향연이다. 시대극의 작가는 이래야 한다. 한국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탁영>의 시작은 신분으로 인격을 판단하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죽음이 평등할지라도,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철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탁영>의 배경은 조선 후기이다. 혼란의 시대는 인간의 야만성과 불평등을 부채질한다.
수어의 최승렬과 아들 최장헌의 만행을 보면, 오늘날 의료계의 민낯이 스쳐간다. 주인을 향한 충성심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의 신념이 된다. 이들은 적정선을 훌쩍 넘는다. 인간다움을 잃었으니, 아귀이다.
장례조차 치를 여력이 없는 백성의 사체는 인간이 아니다. 전염병의 매개체이며 짐승과 다름없다. 모두가 기피하는 매골(埋骨)의 일을 하면서 자란 이가 백섬이다. 매골승은 전염병에 부모를 잃은 다섯 살배기 고아를 거둔다. 아이는 매골승의 일을 대신하면서 노동력을 착취 당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비수처럼 날아올지 모르니, 오늘 하루를 정갈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18살의 백섬은 수어의 최승렬의 집안으로 팔려온다. 복순 어멈을 제외하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구곡재에서 종답지 않는 호화 반찬과 의복을 누린다. 최씨 집안의 인간 부적답게 바깥출입을 삼가한 어느 날, 운명처럼 동갑의 여인과 사내를 만난다. 그들은 윤희제의 강압에 의해 얼떨결에 동무가 된다. 천하디천한 매골노 출신의 백섬, 의관 출신 양반 최장헌, 그리고 상인 출신이지만 공명첩으로 신분을 산 윤희제. <탁영>은 그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섬은 자신의 죽음 그림자가 무덤의 뗏장이 아니라 꽃그늘이 되길 바랐던 사내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부처"같다는 생각을 한다. 십여 년간 온갖 시체를 파묻으면서 살아온 남자아이의 마음이 이토록 순수할 수 있을까? 의문은 <탁영>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나브로 소멸된다. 백섬의 탈속 분위기는 오히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기에 가능하다. 반전의 매력은 윤희제의 심동(心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작가의 캐릭터 설정에 탄복하는 순간이다.
최장헌의 빠른 변심은 "업(業)은 인품과 무관하다"라는 작가의 주제 의식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게 놀란 것은 결국 본인 역시 "의술과 양반 교육"이라는 선입관에 젖은 탓이다.
<탁영>의 결말은 입을 델 수가 없다. 앗아간 희망이 아쉽지만, 은연중에 희망의 현실화는 개연성을 해친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반발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윤희제의 완벽한 복수에 찬사를 보낸다. 곁에 남자를 두지 않은 것은 작가가 윤희제의 바람을 들어준 까닭이다. 장다혜 작가의 매력은 시대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영웅주의 노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탁영>의 혼란은 여전히 물살을 타고 흐른다. 다만, 윤희제의 복수만큼은 완벽한 응징이다. 윤희제 이후, 또 한 명의 윤희제가 나타날 것이다. 또 한 명의 백섬이, 또 한 명의 복순 어멈이, 또 한 명의 칼두령이 등장할 것이다. 민초가 움직여야 시대의 부조리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