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예찬
앙리 라보리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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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예찬>은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꺼내 읽은 책이라고 한다. 베르베르와 달리, 회피를 자행하는 독자로서 위안과 변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도피를 예찬하는 글이 궁금했다.

 

<도피예찬>을 읽으면서 이 책의 목록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힘들었다. 서문과 자화상의 시작으로 앙리 라보리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던 느낌이 사랑과 자유, 타인으로 목차가 넘어가면서 철학 혹은 사상서로 와닿는다.

 

책의 본분이 저자의 생각을 담는 것이지만, 에세이는 가독성이 좋다는 지론을 가진 나로선, <도피예찬>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었다.

 

<도피예찬>은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황에 놓인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분야를 해석한 책이다. , 외과 의사, 신경생물학자 라보리가 인간의 신경계라는 망원경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서가 <도피예찬>이다.

 

도피를 예찬하는 라보리의 근거는 명확하다. 쥐에 대한 실험에서 시작한다. 자극이 고통스러우면 쥐는 도망간다(도피). 도망이 불가능할 경우, 방어적 공격, 즉 싸움을 일으킨다. 이러한 행동이 효과적인 결과를 낳아 기억화되면, 학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행동 억제화가 이뤄지면서 수동적 회피로 인한 스트레스가 생성된다.

 

라보리는 이러한 시스템을 인간 사회로 확장시켜, 싸움, 스트레스, 도피라는 세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배를 받는 우리는 지배자가 세운 체계에 맞서 싸울 수 없으니, 스트레스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라보리는 도피를 예찬한다. 도피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두 가지 충동에 지배받는다. 생존 의지와 종의 번식 욕구이다.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본능은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본능이다.

 

사회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만족을 주는 행동으로 충동을 충족하지 못해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경우, 상상계는 훌륭한 도피처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세상에 대한 욕망을 낳는 것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력이 없을 경우, 인간은 비교를 시작한다.

 

자유롭다는 느낌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규칙과 문화적 조건이 우리의 선택을 근본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굳이 자유를 정의해야 한다면, "인간의 지극히 상대적인 독립성"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스트레스 반응과 쾌락 추구이다. 불안은 우리가 행동할 수 없을 때, 즉 도피할 수도 투쟁할 수도 없을 때 발생한다.

 

라보리는 신앙의 기원이 불안이라고 말한다. 불안의 해소를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한 어조가 예수를 이야기할 때만 따뜻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깜놀이다.

 

라보리는 사랑을 자신의 무사안녕에 죄책감을 느낀 혹은 피지배층의 증오를 느낀 지배자나 지배 체계의 차가운 무관심에 박살 난 피지배층이 내뱉을 무의미한 모순적인 단어라고 규정한다. 사랑과 관련된 뇌 영역은 존재하지는 않다는 그의 주장이 현재에도 유효한가? <도피예찬>1976년도에 출간했다.

 

사랑과 우정의 확고한 구분도 흥미롭다. 라보리는 지배욕이나 복종의 수용 없이 상호 만족의 대상인 두 개인의 공존이 우정이라고 정의한다. "더 많이 좋아하는 자가 약자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헌신과 이타주의적 행동이 사회 문화의 학습으로 변형된 본인의 만족을 위한 행동이라는 라보리의 생각은 설득적이면서 위험하다. 난관에 처한 인간이 투쟁과 도피라는 선택지만 있다면, 협상(타협, 조정)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도피예찬>이다. "도피"가 자기 회복의 과정이라는 주장은 확실히 위안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도피가 문제 해결의 전부인 것을 아님을. 상상계로의 도망은 일시적인 망명일 뿐,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앙리 라보리는 권력관계와 사회적 불평등이 현대 사회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듯이, 인간의 도피 또한 생물학적 기반에 따른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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