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비비어의 순종 -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누리는 보호와 자유
존 비비어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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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언더커버 쉐프‘라는 프로그램이 바영되었었다. 한국의 유명한 쉐프가 해외의 식당으로 위장취업하여 막내로 들어가서 일하다가 인정을 받고 신메뉴를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필자가 노심초사하면서 봤던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지 식당의 직원들이 쉐프의 정체를 아는 순간 서운해할까봐 걱정을 했다. 아무리 방송이어도 속였다고 생각이 들면 서운할 것 같았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쉐프들은 담당 스텝들의 보호 아래에 있다. 이미 스텝들이 협조요청도 했고 어려움이 있을 변수까지 계산해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존 비비어의 순종]의 원제도 Under Cover(언더커버)이다. 순종이라는 담론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라는 우산은 보호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어 있다. 권위 아래에 있을 때 안전하고 올바른 결정과 선택도 할 수 있다.

[존 비비어의 순종]에는 정부, 교회, 가정, 직장 등 모든 공동체에 세워진 지도자들에 대한 순종, 높은 차원의 순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간다고 개인적인 생각이 들더라도 도마 위에 올려서 조롱하거나 가십거리로 만들지 않는 것이 순종의 자세이다(물론, 노골적인 타락이 있을 경우에는 그 지도자로부터 떠나라고 하고 있다). 탈세하지 않고 세금을 내는 것이 나라의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금을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지라도 나라의 제도를 지키는 것이 순종의 한 부분이다. 순종해야 할 분야가 있어서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높은 차원의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모든 순종이 다 내키지는 않기도 하고 너무 FM으로 사는 거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서론에서 이야기했듯이 순종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질문거리의 순종도 남아 있지만 그분의 보호 아래에 무릎꿇어야 함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으로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리 심령에 새겨지는 데 더 관심이 크시다.
존 비비어, [존 비비어의 순종] 중 발췌, P.225

#북스타그램 #존비비어 #순종 #UnderCover #보호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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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
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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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 때 윤리학 수업이 기억난다. 기독교 윤리학은 아니었지만, 철학적인 관점 안에서 시대적으로 배우고 알아갈 수 있었다. 원으로 앉아서 수업을 했었고, 발제자들은 교수님의 양 옆에 앉아서 오늘의 논지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수업을 시작했었다. 논지와 발제내용을 듣고 서로 토론을 하며 개념을 정립해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윤리학 가운데 있는 딜레마, 도덕의 딜레마들이 고민과 고뇌를 주르기도 했고 인간의 인간됨을 직면하기도 했었다.
이번에 서평을 하게 된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Between Fixed and Fickle, Why Our Moral Views Keep Changing)] 를 읽으며 학생 때의 수업들이 기억이 났다(모든 수업내용이 다 기억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누가 기준을 세울 수 있으며, 그 기준이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도덕적이지 않는 잔혹한 행동을 했음에도 그 판단이 도덕적 판단이라 여겼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트롤리 문제(The Trolley Problem)와 육교 위의 사람 밀기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한다. 트롤리는 선로의 사람 5명과 1명이 있을 때 선로를 변경하면서 한 사람이 희생되어도 된다는 논리이고, 육교 위의 뚱뚱한 사람이 있는데 5명을 구하기 위해서 뚱뚱한 사람을 미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견해이다.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5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인데, 트롤리는 괜찮고, 육교 위는 안된다고 할 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난제, 도덕적 판단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감정과 이성에 의해 판단하는지?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지? 이러한 난제들이 있지만 저자에 의하면 도덕적 판단은 발달적인 측면에 의해 추론해볼 수 있다. 신생아와 영아는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3세가 지나야 어느 정도의 도덕적 판단 안에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보편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후에는 상황에 따라 판단이 바뀌기도 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으로 인해 판단이 바뀌기도 한다. 확고한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변덕을 부리는 것이 도덕적 판단으로 보여진다.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도덕성과 관련된 일이다. 여전히 이 도덕적 판단의 난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세계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가고 있고 이해하기 위해 고민과 고뇌를 하고 있다. 아니면, 이 문제들 앞에서 회피를 결정하거나 탈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이 문제들 앞에 선 당신은 어떠한 도덕적 판단을 할 것인가?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북스타그램 #왜나는항상옳고너는그른가 #BetweenFixedandFickle,WhyOurMoralViewsKeepChanging #오둔달 #도덕적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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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흩어진 별을 모아 - 마라톤에서 안나푸르나까지, 예순 이후 비로소 발견한 것들
이금화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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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는 TV에서도 많이 본 적이 있고 다녀왔던 지인들에게 설명도 많이 들었었다. 책의 뒷편에 나오는 히말라야 트레킹도 안나푸르나까지는 아니어도 소소하게 다녀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트레킹을 위해 동네 등산하는 것으로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해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언젠가는 가족과 가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이번 독서를 통해 용기를 얻어보려 했다. 그러나 책의 저자처럼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있게 인사할 자신도 없지만, 상황이 닥치면 할 수도 있겠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오늘 하루를 보상이라도 하듯 넓은 카페와 테라스가 반겨주었다. 그리고 네 명이 사용하는 깨끗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혼자라는 막막함과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라는 생각에 갑자기 울컥했다.
이금화, [길 위에 흩어진 별을 모아] 중 발췌, P.105

그러나 낯선 땅의 긴장 속에서 떠나온 마음들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작은 그룹을 만들고 젊은 순례자들은 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더 빠르게 가까워지는 듯했다. 걷다 보면 서로의 속도를 알게 되어 따로 걷기도 하고 함께 모여 걷기도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길 위의 활력을 이어간다…순례길은 누구와 걷느냐보다 어떻게 함께 걷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같은 책, P.136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모습을 보았다. 인연이 닿았더라도 서로 끌어 안으며 끝까지 걸을 수는 없다.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주기도 하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과정보다 목표가 더 중요한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것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고 성찰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인 것 같다. 언젠가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산티아고 아니어도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길 위에 올라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될까?

순례길은 끝까지 걷는 사람만의 길일까, 아니면 함께 걸어온 시간 자체가 이미 완성된 순례일까?
같은 책, P.139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북스타그램 #산티아고순례길 #안나푸르나 #길위에흩어진별을모아 #자신과의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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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와 약자 (반양장) - 강자의 불안과 약자의 절망을 넘어서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 / IVP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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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폴 투르니에의 저서는 방대한 지식으로 인해 다 소화해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 필자 자신도 돌아볼 수 있는 독서의 시간이었다(이 책은 특히 몇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약한 반응은 억제하는 반응이고, 강한 반응은 자극하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폴 투르니에, [강자와 약자] 중 발췌, P.143

저자는 약한 반응과 강한 반응의 범주를 나누고 있다. 저자가 책에서 설명한 것은 더 많지만, 약한 반응이 우울, 슬픔, 자기연민 등 이라면 강한 반응은 흥분, 행복감, 공격성, 수다스러움 등 으로 볼 수 있다(반응의 종류는 더 다양하기에 책을 보기를 추천한다). 약한 반응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자신의 욕구를 상실하는 거라면 강한 반응은 수많은 상상력을 활용하여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직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강자는 영성 생활에서도 마음의 울림을 느낀다. 따라서 약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지고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랑과 신앙이 강자에게는 쉽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같은 책, P.191

필자는 강한 반응을 하는 사람인가? 약한 반응을 하는 사람인가? 약한 반응을 하는 사람 같았는데, 강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참으로 복잡한 인간인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설명할 때도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 다르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근원적인 고통에 대한 표현이기에 초래하는 결과는 같다고 말하고 있다. 약한 반응과 강한 반응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에 범주를 나누었지만, 같은 인간이고 삶 속에서 다뤄가야 할 전인격적인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약한 반응이 조금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는 형질(사람의 정신-신체적 구조, 즉 약한 반응을 하도록 타고난 선천적인 기질을 말한다, P.56)이지, 강한 반응이 없다고 낙인찍을 수는 없다고 본다.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의 범주가 나뉘어져 있을 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인간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편에는 약자가, 다른 한편에는 강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편에는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고 심리적 보상은 모두 무익하다는 사실을 알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약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의 강한 믿음과 이론, 성공과 미덕을 믿는 약자가 있을 뿐이다.
같은 책, P.259

아이를 양육하기 시작한지 5개월 밖에 안된 초보 아빠이지만 가끔 아이가 두려워하는 지점을 발견할 때가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두려워하는 포인트가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파도를 한 번에 감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부모들을 아이들의 보호자라고 부르는 것 같다. 아이가 온전히 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만 보호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사 정말 미묘하고 다양하다. 그래서 날마다 창조주의 은혜가 필요하다. 필자 또한 매일 찾아오는 두려움의 파도를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북스타그램 #강자와약자 #폴투르니에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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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라우더의 찬양하는 습관
데이비드 크라우더 지음, 장택수 옮김 / 예수전도단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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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미국의 Passion Conference가 있었다(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초창기 Worship Leader로 Chris Tomlin, Matt Redman, 그리고 오늘 책의 저자 David Crowder가 있었다. Chris와 Matt이 마음을 움직이는 예배인도자였다면, David은 셀러브레이션의 기름부으심이 있던 인도자였다. 사실, 필자는 예배음악에 입문하면서 알게 되었고 Worship Together. Com으로 인해 Crowder를 접하고 지금까지도 그의 음악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고, 그가 인도했던 예배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의 책이 발간된지는 오래 되었지만 다시 기억하여 독서를 하게 되었다.

저자는 ’습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보통, ‘습관’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어릴 때 엄지손가락을 빠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습관’은 부정적이고 나쁜 행동의 이름을 붙일 때 많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좋은 습관은 가지기 어려운 것인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좋은 습관을 길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고, 모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 엉망진창이다…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좋은 습관으로 가는 좁은 길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아름다움을 추악하게 바꾸는 우리의 묘한 능력이 결과를 알 수 없게 한다.
데이비드 크라우더, [데이비드 크라우더의 찬양하는 습관] 중 발췌, P.35

우리는 노력을 하지만, 쉽게 작심삼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우리의 기질과 성향이 문제인가? 좋은 습관은 왜 어려운가?

‘습관‘(habit)이라는 말의 기원을 찾으니 중세 영어로 ’옷‘(clothing)을 의미했고 고대 프랑스어로는 ‘옷, 행동 양식(behavior custom)이었다. 라틴어 ’아비투수‘(habitus)는 ’상태, 성품‘이라는 뜻이고, ’아베르‘(habere)는 ’가지다, 잡다‘라는 뜻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알아보았다. 어느 시기의 습관이 특정 의상이나 예복(특히 종교 의식의 의상)과 연관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찾던 의미였다.
같은 책, P.48

저자는 습관에 대해 옷과 관련하여 설명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 고백하면 새로운 옷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옷이 아닌 새 옷, 그리스도로 옷입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습관은 우리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우리가 원하는 습관, 찬양하는 습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찬양 습관’이란 찬양하는 법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를 찬양하는지 명심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당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찬양은 구원으로 회복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로 가득해진다. 온몸이 하나님으로 싸여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희생의 옷을 입게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매 순간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책, P.208

매일의 삶 가운데 매 초와, 매 분, 매 시간 동안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우리의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렵고 불가능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북스타그램 #DavidCrowder #찬양하는습관 #그리스도로옷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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