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의 선택 (양장) - 우리 시대 인문학 최고의 마에스트로 박이문 인문학 전집 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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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 인문학 전집 1권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처음 '박이문'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던 때가 기억난다. 작년 봄 즈음에 도서관 종합자료실 내에서도 거의 가지 않는 철학 서가 쪽을 두리번 거리다가, 반양장 판형으로 10권이 나란히 놓여있는 전집을 보고, '이 사람 뭐지?' 하며 잠깐 둘러봤던 기억이 있다. 전집을 구입할까 하다가, 반양장 10권 전집도 절판인지 품절인지 돼서 벌써부터 중고가가 심상치 않았던 기억이 있다. 몇 달 뒤 도서관에 다시 가 보니, 도서관에 '박이문'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도서가 거의 없길래ㅡ심지어 전집 10권도 다 사라져 있었다.ㅡ내가 본 것은 환영이었을까, 싶으면서도, 요즘 도서관이 참 힘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기억나는 게, 민음사 김우창 전집 <세 개의 동그라미>와 <대담/인터뷰>1,2권을 보면서 김우창 선생님의 대담에서 박이문 선생님을 발견하고 책을 살펴 보았다. 거기서 출연하신 박이문 선생님의 대담을 보고 반드시 박이문 전집은 어떻게든 봐야겠다, 생각했었고, 일단 맛보기 정도로 박이문 인문학 에세이 특별판 세트에서 마지막 권인 <박이문의 서재>를 읽었는데, 이 책은 블로그의 이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서평을 모아놓은 책 치고는 굉장한 지적인 탐구를 보여줬다고 생각했어서, 바로 3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인문학 전집을 구입했다. ​


 이 전집 1권은, 박이문 선생님의 자서전 격 저서이다. 여러 매체에 오랜 기간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 데 모아 책으로 만들었는데, 읽는 데에 재미가 있으면서도, 학문을 하는 사람의 지적인 탐구에 대한 허무가 짙게 배여나오는 것 같아, 굉장히 씁쓸했다.


 박이문 선생님은 아직 한창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태어나셨다. 시골에서 살면서 나름 유복했던 삶을 누린 박이문은, 청소년 시절, 형이 두고 간 일본어로 된 화가들의 그림책이나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지적인 앎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동급생들과는 은근 괴롭힘이 있었던 반면, 선생님들로부턴 인정받았던 경험이 그에게는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되었다고 한다.


​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곧 이어 6.25전쟁이 터지면서, 박이문은 친구에게 고등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 삶을 부지하게 된다. 당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념의 대립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지금 이렇게 역사책이나 그 시대를 살았던 자서전을 읽어 봐도 도저히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박이문은 우연히 부모님의 지원과 형들의 지원을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열심히 공부해서(어느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지는 책에 적혀 있지 않지만, 1950년대에 대학을 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엘리트라는 방증이 되므로... 나는 이렇게 서술하겠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진학한다. 불문과에 망설임이 없었던 이유는, 저자가 어릴 때부터 일본어로 된 여러 책들을 읽으며, 자신도 작가나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다니면서, 박이문은 당시의 학습 현장이 굉장히 처참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교재다운 교재도 없고, 교수나 강사들은 시나 작품을 해석하기 급급했다는 그의 냉정한 필치를 읽고 있자니 손에 땀이 난다.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고, 책을 읽기 보다는 주로 사람들과 술 마시며 어울리길 좋아했다고 고백한 저자는 어느덧 대학을 마칠 때가 되고, 이렇게 학습을 끝내도 되는 걸까, '나는 더 알고, 알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준비하고 마친다. ​


 석사학위를 통해 이화여대 교수가 된 박이문은 여러 매체에 기고도 하고, (자신이 회고하기를) 얼마 안 되는 불어 실력으로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ㅡ굉장히 엉터리였다고 고백하고 있다.ㅡ이화여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지적인 앎의 과정이 여기서 끝나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몇 년간 한 끝에, 부모님과 같이 살 집도 팔고, 가지고 있던 책들도 팔아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불문과로 유학을 간다. ​


 프랑스에 대한 로망,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싶었고, 지적인 삶에 메말랐던 저자는 그 곳에서 미약하게나마 별천지를 본 것 같다. 언어는 잘 통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박사학위에 걸맞는 자격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던 삶의 현장들이 기록돼 있었다. 거기서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벌써 조교, 교수가 되어있는 데리다를 보며, 학문적 열등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자서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 당시에 데리다라는 사람이 이 정도로 20세기와 21세기를 뒤흔들 즉 '해체'의 대명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데리다의 강의도 열심히 들으려고 했지만, 따라가기 벅차했었다는 기억이 있으셨고, 여러 Test에서 처음엔 낙제점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점수가 올라갔던 경험은, 데리다가 그를 좋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셨다. ​


 프랑스 문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지적인 탐구는 점점 문학에서 철학으로 옮겨간다. 영미권의 분석철학으로 관심을 돌린 그는 데리다의 굉장한 칭찬에 가까운 추천서를 통해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남들은 다 애를 낳아 살 만한 나이에 자기는 아직도 박사를 하고 있으니, 자괴감도 조금은 있으셨던 것 같다. 미국에서 박사를 하며 다시 생소한 언어로 남들과 소통하고, 글을 읽고 글쓰기를 하려니 굉장히 힘들었다는 경험을 토로하신다. 철학 박사를 처음 할 즈음에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영미권의 분석철학에 대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는데, 점점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논리를 추구하는 분석철학을 통해 많이 배웠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후술하신다. ​


 박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미국에 좀 더 남아있을까, 고민하다가 그의 지적인 여정은 미국을 택한다. 이유는 '좀 더 알고 싶은 욕구를 멈출 수 없어서.' 자신도 결국 철학을 통해 밥 벌어먹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엔 가슴이 아프다. 


​ 그리고 이후에 살펴 보니, 미국 시몬스 대학에서 20년 정도 가르치시다가 명예교수가 되시고, 한국으로 돌아와 포스텍과 연세대, 서울대 등에서 교양 강의를 잠시나마 하신 듯 하다. 


​ 결국 이 자서전을 읽고 나니 '천재들이 30대 정도에 자신의 지적 세계를 종결짓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신은 동 나이대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겠구나, 만약 지적인 유희를 좇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이문 선생 자체적으로 내재돼 있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크게 와 닿았다. 나의 인생관은 허무주의까진 아니지만ㅡ명랑하고 자유분방하고 긍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정도일까ㅡ, 다른 사람의 허무주의에 대해선 크게 공감했다는. 확실히 조부뻘 세대분 답게 사르트르에 크게 영향을 받은 점도 무시할 수 없을 듯. 요즘처럼 철학이든 어떤 분야든 굉장히 많은 책이 번역 출판돼 있는 때엔, 꼭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느껴질 문학 작가라던가, 철학자는 읽고 싶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이 뭐든 공부하기엔 더 좋은 환경 같다. 다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그리고 PC 정도. 결국 자신이 우군이자 곧 적이다. 요즘은 까뮈 전집도 국내에 전부 출판돼 있고, 원하는 책은 정말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다는 것이... 물론 해외에서 출판되는 굵직굵직한 책들은 바로바로 번역이 안 되는 점은 아쉽지만... 음음.. 확실히 우리나라가 정말 좋아지긴 했어. 라는 생각에 오늘도 겸허해지는 지점. ​


 그런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19세기 정도 부터 20세기 까지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책들은, 웬만하면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에는 그것이 아예 불가능하고, 그것을 꿈꾸는 자ㅡ즉, 세계의 유명한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자체로 그 사람은 허황된 사람이라는 얘기다.' 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저는 허황된 사람에 도전하겠습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의 내 공부 계획도 어떻게 지침을 삼아야 할지 이제 또 어려워졌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계속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 새삼 석사나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나름대로 겉핡기로 절감했다. 거기에 돈까지 엮여 있다면, 정말 공부하면서 피가 마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 자서전을 읽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고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총체적 삶을 추적하는 형사가 된 느낌이랄까. 작가가 무언가 사건을 벌여 두면, 독자인 나는 형사가 되어, 그의 삶을 맹렬히 추적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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