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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바로보기 -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찾아서
류모세 / 두란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유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친근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구약의 주인공은 유대인이었고, 신약을 여신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이후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나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계획에 의해 이루신 것으로 유대인에 대한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유대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유럽 사람들에게서 그 뿌리깊은 반유대 정서를 알게 되었을 때,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던 역사적 사건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선명하게 눈앞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의 첫 번째, 기독교의 역사는 초대교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나사렛 공동체는 당시 유대의 종교를 이루는 종파 중의 한 갈래였을 뿐 여전히 유대인의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에 대한 1차, 2차의 봉기 과정에서 사두파와 에세네파와 열심당이 궤멸되었고, 남은 바리새파와 나사렛파가 갈라지면서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의 틀 안에 있었다. 정통 바리새파는 할례와 까다로운 음식정결법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았지만 유일 신앙에 매력을 느끼며 유대인의 무리에 들기 원하던 많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부시대의 이방 감독들이 뿌려놓은 반유대주의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믿는 그들의 종교와 철저하게 구분을 두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발전해 나간 것이다. 즉, 기독교의 역사의 출발점이 반유대주의 였다는 사실이다.
교부시대를 지나 중세로 접어들면서 유대인의 삶은 탄식에 가까울 정도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유럽 각국의 유대인의 정책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가운데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의 두 번째, 유대인들은 결코 고리대금업자가 아니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기독교중산층이 탐욕어린 사채업자였고 이런 사실이 감춰진 것은 역사는 승자의 주관적 기록이라는 사실에 동감이 간다. 십자군의 전쟁의 과정에서 채권-채무 관계의 소멸을 위한 무자비한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하는 사건도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어떤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헬레니즘역사와 히브리즘역사로 나누어지며 헬레니즘의 역사는 르네상스-계몽주의-낙관주의-1, 2차세계대전-허무주의-쾌락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역사는 그 끝이 허무한 쾌락주의로 치달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인류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셔서 이끄시듯이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장엄한 손길이 느껴진다.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인을 얼마나 경건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다.” (p.121) 이런 저자의 생각은 책의 후반부에서 랍비 에브라임 오쉬리의 말과 겹쳐졌다. “내가 받은 큰 충격은 선량한 기독교인 이웃들이 취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 가운데 핍박과 위협을 받는 유대인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변호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p.246-247)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이해해야만 볼 수 있는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만남처럼 예수님과 유대인의 뜨거운 재회를 위한 뜨거운 중보기도의 빚을 진 것이다. 열린다 성경 시리즈로 많이 알려진 류모세 선교사님의 책이라 기대를 했던 만큼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메시아닉 유대인이 보는 요셉의 이야기로 그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