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성령님의 임재연습
조태성.윤영윤 지음 / 베다니출판사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이 책을 통해 많은 어린이들이 성령님을 사모하면서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미리 생각하며 감사드린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부모 세대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신앙을 하나의 공식처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아이들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도록 하는 중요한 진리가 이 책에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책이지만
부모가 먼저 읽고 먼저 성령님과의 친밀한 동행을 사모하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진다면
아이들은 그 가정 안에서 바르고 성숙한 신앙의 자녀로 성장될 것이다.
이 책에서 성령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성령님을 알아갈수록 인내, 사랑, 용서, 기쁨 이렇게 좋은 성품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이러한 성품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값진 선물이다.
어려서부터 학원을 다니며 지식만 쌓아가는 아이들에게서 이런 성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성령님을 사모하는 주님의 자녀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물론 한별이가 더 자란 나중의 일을 상상하며 저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써 내려갔지만
공부도 경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닌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성령님을 사모하는 자녀의 특징으로 포함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자녀를 갖는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을 가득한 가족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 속의 대화 내용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바라건대 이 책이 어린 자녀를 둔 많은 부모에게 먼저 읽어지고
그 가정과 자녀가 하나님을 사모하며 동행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소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대인 바로보기 -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찾아서
류모세 / 두란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유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친근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구약의 주인공은 유대인이었고, 신약을 여신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이후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나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계획에 의해 이루신 것으로 유대인에 대한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유대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유럽 사람들에게서 그 뿌리깊은 반유대 정서를 알게 되었을 때,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던 역사적 사건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선명하게 눈앞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의 첫 번째, 기독교의 역사는 초대교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나사렛 공동체는 당시 유대의 종교를 이루는 종파 중의 한 갈래였을 뿐 여전히 유대인의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에 대한 1차, 2차의 봉기 과정에서 사두파와 에세네파와 열심당이 궤멸되었고, 남은 바리새파와 나사렛파가 갈라지면서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의 틀 안에 있었다. 정통 바리새파는 할례와 까다로운 음식정결법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았지만 유일 신앙에 매력을 느끼며 유대인의 무리에 들기 원하던 많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부시대의 이방 감독들이 뿌려놓은 반유대주의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믿는 그들의 종교와 철저하게 구분을 두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발전해 나간 것이다. 즉, 기독교의 역사의 출발점이 반유대주의 였다는 사실이다. 

 교부시대를 지나 중세로 접어들면서 유대인의 삶은 탄식에 가까울 정도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유럽 각국의 유대인의 정책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가운데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의 두 번째, 유대인들은 결코 고리대금업자가 아니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기독교중산층이 탐욕어린 사채업자였고 이런 사실이 감춰진 것은 역사는 승자의 주관적 기록이라는 사실에 동감이 간다. 십자군의 전쟁의 과정에서 채권-채무 관계의 소멸을 위한 무자비한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하는 사건도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어떤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헬레니즘역사와 히브리즘역사로 나누어지며 헬레니즘의 역사는 르네상스-계몽주의-낙관주의-1, 2차세계대전-허무주의-쾌락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역사는 그 끝이 허무한 쾌락주의로 치달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인류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셔서 이끄시듯이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장엄한 손길이 느껴진다.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인을 얼마나 경건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다.” (p.121) 이런 저자의 생각은 책의 후반부에서 랍비 에브라임 오쉬리의 말과 겹쳐졌다. “내가 받은 큰 충격은 선량한 기독교인 이웃들이 취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 가운데 핍박과 위협을 받는 유대인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변호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p.246-247)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이해해야만 볼 수 있는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만남처럼 예수님과 유대인의 뜨거운 재회를 위한 뜨거운 중보기도의 빚을 진 것이다. 열린다 성경 시리즈로 많이 알려진 류모세 선교사님의 책이라 기대를 했던 만큼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메시아닉 유대인이 보는 요셉의 이야기로 그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린다 성경 : 광야 이야기 - 성경의 비밀을 푸는 광야 이야기 열린다 성경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바이블 문화코드'란 책이 있다.
그 책의 3부 지리코드는 1부와 2부에 비해 간략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치고 있어
아쉬움이 남고 있었다.
이 아쉬움의 시작은 '열린다 성경 광야이야기' 라는 책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1편을 읽지 못했지만 2편 격인 이 책을 읽으면서
'바이블문화코드'의 3부 지리코드가 보여주는 것은 극히 일부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바이블문화코드'는 내가 애장하는 도서 중의 하나이고 많은 배움을 제공해 준다.
 
이 광야이야기는 성경과 나 사이이 거리감을 많이 좁혀 주었다.
보통 성경의 배경에 대한 책들은 딱딱해서 활자보다는 이미지를 주로 탐독(?)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책은 지루할 틈이 전혀 없었다.
사진 이미지보다는 부드러운 삽화가 들어있어서 인지 심리적으로는 평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서
바다, 광야, 물, 바위, 돌, 양, 염소 등 그 하나하나의 단어들을 의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다의 신적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도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고,
양과 염소가 같이 방목된 이유도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머물고 체험하지 아니 한
알 수 없는 귀한 배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리적 정보나 지식보다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다가온 것은 '광야의 영성'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광야는 참으로 척박한 땅이며 조그만 발을 잘못 디뎌도 추락할 수 있는 위험한 곳이며
손을 더듬을 만한 어둠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이 없이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곳이다.
다윗의 시편 23편을 대관령 목장과 뉴질랜드의 방대한 초장을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이스라엘의 광야의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 더 크고도 깊은 은혜로 마음을 울린다.
 
1부는 2부를 위한 배경이고, 거기서 은혜를 받아 3부로 긴밀하게 이어져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성을 돌아보게 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일의 일에 대한 염려보다는
지나온 날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묵상하는 광야의 유목민의 삶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 곳곳에 담긴 목자의 음성을 좀더 세미하게 들을 수 있게 된다.
 
광야는 인간의 무력함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이다.
배부름을 구하는 '축복의 영성'보다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광야의 영성'을
이 책이 주는 최대의 선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안하고 축복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수준인 '니드'(need)와
우리가 끝없이 우너하는 '원트'(want)'의 간격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 주는 곳이 바로 광야다.
두 개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불행을 느끼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만족지수가 높은 국민은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광야와 같은 원시적인 환경에 거하는 나라의 사람들이다.
수천 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네팔과 부탄에 사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데, 이는 분명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우리는 광야의 원시적인 환경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행복이 많은 것을 소유함에 있지 않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p.262-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를 읽다 - 단숨에 통독하는 사복음서
김동준 엮음 / 두란노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블라인드 스팟'이라는 단어가 줄곧 떠오른다.
'블라인드 스팟'이란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나머지의 사복음서는 같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에서 착각하고 생각의 오류를 범할 때가 많았다.
그중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서 대표적으로 나의 무지함이 드러났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고,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1년간의 시간을 두고 일어난 일이며
요한복음 1장에서 베드로가 한동안 예수님을 따르다가 갈릴리로 돌아가 본업을 하던 중
다시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 것이라는 것에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을 경우가 참 많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해도 한동안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하다가
세상의 그물을 버리고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때가 많다.
이렇게 사복음서를 엮으니 그 감동과 은혜가 너무 놀라웠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 사복음서가 한 자리에 만나서 대조해 나가다 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도 선명해지고, 착각한 부분도 바로 잡혀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편협되어 알고 있었는가 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또 이 책의 성경인용말씀이 우리말성경으로 해서 본문과 성경본문이 하나로 녹아져 있어서
한편의 소설책 읽는 듯 했고, 현실감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마치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듯이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생생함을 느낀다.
즉, 감정이입이 풍성해서 예수님에 대해 몰입되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8페이지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처럼
개역개정판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쉽게 전달되어서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경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경치를 보려면 나무를 보기 보다는 산을 봐야 그 절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듯이
이 책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은혜로운 본문의 말씀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흩어져 있던 퍼즐조각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
조태성 지음 / 베다니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세번째로 주어진 기회인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베니힌 목사님의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란 책에서
두번째는 김열방 목사님의 저서를 통해서 성령님과의 교제를 꿈꾸어 왔으나
시간을 흘러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성령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장소에서
아주 멀리 계속 여행을 떠나는 저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그토록 외롭다는 것, 혼자라는 생각들은
성령님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답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분리'를 강조하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가로 막으며
그 해결의 방법을 세상 속에서 찾겠다는 마음의준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부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전부이십니다.' (p.230)

그 전부에 생명과 시간과 관심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저자의 열정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첫번째 진심어린 충고는 최선을 다해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부디 모두가 최선을 다해 성령님을 존중해 드리며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지 않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p.89)
최선이라는 단어 앞에 가장 대치되는 단어가 게으름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던 저자는 최선을 다해 지금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가는 중이고,
저는 게으름을 한껏 피우다가 성령님에 대한 사랑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이 세상에 살아갈 때 부, 명예, 권력 등이 사람에게 전부가 되기도 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도록 세상은 종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에 물들어 영적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경우도 많고 저도 또한 그러합니다.
갈5:17절의 말씀처럼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자의 두번째 충고는 일의 능력과 성과 보다는 순수하게 성령님과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성령님과의 우정과 사랑을 쌓아가라.' (p.121)
필요할 때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일상속에서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배가 회복되고,
사역이 회복되며 나아가 이웃을 회복시키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저자의 삶에서 좋은 모델로 찾아 볼 수가 있으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위해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p.189)

내가 살아가는 시대는 빠름을 미덕으로 아는 시대이며
이로인해 조급한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예배와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보다는 해치운다. 라는 의미가 정확하다고
자각할 때 얼마나 부끄러운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순간에 이미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은
성령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따른 영적우선순위 회복이 선행되어야 하나 봅니다.
그것은 저자의 삶 속에서 보여준 귀한 간증이 그 증거였습니다.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읽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올해에는 그 좋은 책의 목록 중 이 책을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