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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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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로 상냥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사람이라고. 그 사랑한다는 감정을 펜에 눌러 담아 묵묵히 써내려간다. 남자는 삶에 치여 온갖 고생을 해옴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성을 마음 깊숙이 담아서 보낸다. 그는 춥고 배고픈, 그런 괴로움에 세상에게 눌려 지냈다. 그러나 아직 대향은 살아남아 있기에,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표현해낸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 남자가 표현할 줄 아는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에게는 ‘소’라는 그림에 앞서 사랑하는 한 여인과 두 아이가 있었다.

 

  ‘소’는 울부짖었다. 누군가는 그림 속 ‘소’는 압박받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 남자가 살아온 시대는 치열하고 두려운 시기였기에, 민족을 나타냈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을 생각하기 보다는, 이중섭 스스로의 감정에 주목하고 싶다. ‘소’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한 그 남자, 이중섭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된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늘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았던 그가, 폭발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울부짖음으로 그려낸 것은 아닐까?

 

  이중섭의 폭발은 3가지로 표현된다. 미사여구로 표현된 아내에 대한 감정, 고달픈 삶 속에서도 그려지는 작품에 대한 열정, 그리고 토끼 같은 두 아이에 대한 사랑. 이러한 3가지의 이중섭의 폭발, 그리고 울부짖음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에서 다시 한 번 힘을 얻었다.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리고 내 감정 속에서도 함께 폭발했다. 인생의 삶이 다 그렇다. 지나온 삶을 생각해보면 많은 상념에 젖는다. 혼자의 힘으로 이겨나갈 수 없을 정도의 힘겨움은 스스로에게 족쇄가 된다. 족쇄 때문에 겪는 좌절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그 족쇄를 풀기 위해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긴다. 나에게 족쇄를 풀기위한 희망은 ‘책과 영화’였고, 이중섭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에서 그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표현했던 애정은 편지와 작품으로 드러난다. 단순히 편지글만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지에 그림을 그려 보낸다. 또한,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동봉하여 부친다. 이 속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애절하게 묻어있다. 또한, 6.25이후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죽을 때까지 거의 만나지 못한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자뭇 그의 괴로움이 어땠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괴로움 속에서도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괴로움에 사무쳐도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사랑이 잔잔히 그리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울부짖을만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아내와 자식들의 사랑이 우선적으로 그려진다.

 

  이중섭은 첫째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안타까워했다. 그렇기에 아들이 관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소’이지만, 오히려 아이들에 관한 그림에 감정이 폭발한다. 그리고 그의 울부짖음이 그림 속에서, 편지글에서 담겨있다.

 


 어떠한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어떠한 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열렬한 애정만한 애정이 또 없을 것이오. 일찍이 역사상에 나타나 있는 애정 전부를 합치더라도 대향과 남덕이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참된 애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게요. 그것은 확실하오. 당신의 멋지고 훌륭한 인간성이 대향의 사랑을 샘처럼 솟게 하고, 화산처럼 뿜어 오르게 하고, 바다처럼 파도치게 하는 것이오.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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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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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람들은 아파트에 집착하는가? 직장인 사회 초년차에게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도, 심지어 50이 되어가는 중장년층에게도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혹은 더 큰평형의 아파트를 구매하기 인생을 바친다. 그렇게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의 자신의, 그리고 가족의 인생을 바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먼저 밝히자면 지금 아파트는 주거의 공간이 아니라, 투자의 목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또 다른 아파트를 구입하여 부의 축적의 목적이 되버린 현실에서 종부세 등의 법안은 현실앞에 무너지고 있다.
 
 아파트는 계급이다. 부의 가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지표이다. 삶의 공간으로써 아파트의 기능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아파트는 더이상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투자의 개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계급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사람이 더이상 명예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가 명예아닌 명예를 가지고 상승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의 모습은 명예를 가진 상승지위의 대체재로 구분된다. 특히 이를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저자는 픽션과 팩트라는 두가지 형태로 이야기 한다. 이를 통해 저자 특유의 풍자를 느끼게 한다. 아파트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하고 의인화 한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과 불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또한, 강남 중산층 출신의 60대 남자를 화자로 설정해 자신의 세대가 아파트를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이룰려는 세력이었음을 털어 놓는다. 이런 자기 고백적 서술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에 신선함과 새로움을 더해준다.
 
 
65p

 따라서 이들이 설계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설계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집장사 집들이 점령한 서울 변두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질서로 끌어들여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신중산층'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로 양성해 체제 동조 세력으로 규합할 수만 있다면, 구 기득권층의 반동을 견제하고 반체제 불만 세력의 준동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를 위해선 역사, 관습, 제도들이 퇴적되어 봉건 질서의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설계자들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 무색무취의 텅 빈 공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때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방식으로 조립된 미국식의 교외 주거 단지들이 설계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실제로 1970년대 초반, 압구정동, 학동, 청담동 일대에 '시영주택'이라는 명칭의 단층 주택 단지들이 준공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 아파트를 압도하기엔 힘이 부쳤다.

 

 

 왜 기존에 항거하던 투쟁세력들이 보수화가 되었는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어도, 자신의 이념을 통해 주장하던 바를 외치던 사람들이 변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변화를 강요당했다. 그들을 신중산층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로 만들고, 물질적인 혜택을 주어 진보가 아닌 보수로 일원화 시킨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산물이 아파트였고, 이는 아파트가 주거 목적이 아니라, 이념변화의 도구로 사용됨을 보여준다.

 

 

95p

 어느 보수적인 사회학자는 이 시기 수도권 신도시에 세워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출현을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변곡점으로 주목했다. 그의 지적대로 이 아파트들의 거주 집단 상당수는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추동한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거세지자 점차 급진적인 정치 이념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한국 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떠맡기 시작했다. 그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처음에는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그 다음에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했다. 아파트 구입을 전후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은 완연히 다른 모양새를 취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세대든지 젊은 중산층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존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의 주장에는 신선한 대목이 없지 않은데, 정치적 입장의 극적인 선회를 추동한 '반혁명'의 매개체로, 그리고 사회적 불만의 뇌관을 제거하고 체제의 안위를 도모하는 궁극의 정치적 해결안으로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는 내가 성취한 바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를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된 설계자들의 '군사적 시선'을 상기해본다면, 클라우제비츠의 경구에 약간의 허풍을 가미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파트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다"라고 말이다.

 

 

 급진적인 정치 이념이 변화했다. 처음에는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다가, 이후 이를 막는 파수꾼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파트 구입을 전후로 사회와 다른 모양새를 취해나갔다. 사실 어느 세대든지 젊은 중산층이 나이를 먹어가며 기존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흔하다. 그러나 변화를 시간으로만 보기에는 부족하다. 아파트가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과정에서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이들을 배신자나 변절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아파트가 촉매제가 되었을 뿐, 어자피 변할 부분에서 가속화의 도구로 봐야되는 것이지, 아파트 때문에 변했다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114p

 셋방살이 시절 주인집 아줌마를 상전처럼 모시고 눈치를 살피는 일 따위는 없어졌지만, 아내는 이제 다른 부류의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15평짜리 아파트를 포위한 '맨션'이란 이름의 대형 평형대 아파트들이었다. 이사한 지 며칠 뒤 공중목욕탕에 갔다가 제주도 토종꿀로 전신 마사지를 받고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들을 목격한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 조그만 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정육집 주인이나 채소 가게 배달원에게 무시당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내 집 마련의 벅찬 감동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속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에게 맨션은 "공상 영화에서 불을 뿜어대는 그런 거대한 괴물"같은 존재였다. 그럴 수 밖에......, 아내는 결혼 후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변해 "배추 한 단을 사면서도, 값을 깎아야 사는 맛"을 느꼈고, 세숫비누를 '다이얼'로 바꾸는 데도 몇 시간을 고민했다. 그런 그녀에게 맨션은 버거운 상대였다.

 

 

 아파트를 구매해도 문제다. 이는 아파트가 주거의 개념이 아니라, 지위의 개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잘사는 집과 못사는 집의 차이는 아파트 소유의 유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는 1990년대에 들어 크기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 심지어 큰 평수의 아파트를 유지하기 위해 시장에서는 흥정이 기본이고, 다른 소비되는 것들을 줄여나가게 된 것이다. 기름값에 벌벌 움추려 무서워하면서도 고급 승용차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좀 더 높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 지위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상징으로 아파트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35p

 그리고 이 영화들의 상영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본격적으로 우리 세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교양 주부와 불법 과외와 8학군 열풍과 치맛바람과 한샘시스템키친과 한남슈퍼체인이 있고, 그들에겐 미시족과 사교육 열풍과 특목고와 기러기 가족과 김치냉장고와 이마트가 있다. 이 둘 사이에서 닮은 꼴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를 참조했고, 미래의 그들은 현재의 우리를 욕망했다. 한편으로는 더욱 첨예한 정치적인 공세로 우리 세대를 적대시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이미 실현에 옮긴 우리 세대를 흠모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긴 살다 보면 그런 자들이 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게임에 임했음에도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 그들은 마지막까지 명예롭게 위엄을 갖추길 원한다. 혹시 지금 나는 미량의 쾌감을 얻기 위해 그 위엄을 벌거벗겨 이미 항복한 자들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극성스럽게, 그리고 더 악착같이 자산 시장에서 투기의 욕망을 발산했고, 그리하여 마침내 "386세대의 강남화"라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되기의 칭호를 획득했다.

 

 

지금 아버지 세대는 민주화를 통해 과거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자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파트를 도구화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은 자식들을 통해 나타났다. 해외유학, 지식의 상아탑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보내는 대학. 이처럼 아버지 세대는 부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에게까지 그 욕망을 발산하고 있다.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이런 욕구를 받고 자라온 자식들 세대역시 이러한 욕망에 익숙하다. 그렇게 시대는 진보를 찾을 수 없는 진보가 되었고, 더욱 굳건한 보수를 찾았다.

 

 그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반세기 동안의 변화를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강남, 과천, 분당, 용인으로 이어지는 투기열기에서,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냉정해지고 차갑게 변해간다. 어떻게 하면 변화를 일으키고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저자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아파트에 대해 서술하고, 캐릭터를 부여하여 그려내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분명 저자의 주관적 의지가 보임에도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보고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은, 저자가 아닌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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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은 어디 가? - 불량 의사의 좌충우돌 가족 힐링 캠핑기
황인철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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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엄마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 엄마로 불리며 산다. 그렇다면 아빠들은 어떨까? 누구 아빠로 불리기보다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지니고 산다. 육아에서 아빠의 위치보다는 엄마의 위치가 더 강조된 사회였다. 아빠의 위치가 아이의 육아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빠는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한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 일이 고되어 술 한 잔에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을 때, 아이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괴로움은 어느새 녹아버린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아빠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아이에게 표현하는 법에 익숙지 않다. 그 무뚝뚝한 사랑 때문에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질문에 아이들 대부분은 엄마라고 쉽게 답한다. 아빠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빠도, 엄마도 똑같다. 다만 아빠의 역할로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걸고 살아오면서, 아이와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리고 함께 웃을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여기 부족함을 채워주는 하나의 책이 있다. 바로 <아빠, 오늘은 어디가?>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같이 체험하며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자상한 아빠 '황인철'과 개구쟁이 늦잠 대장 1학년 아들 '준석이'의 이야기이다. 캠핑의 묘미에 빠져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쓴 여행기이지만 아빠와 아이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져 감을 느낄 수 있다.

 

 봄에는 옥포 승마 캠핑장에서 승마를 체험하고, 여름에는 열대야를 피하며 서해안에서 일출을 본다. 가을에는 맑은 달빛아래에서 아이와 별빛을 보며 밤을 즐기고, 겨울에는 겨울 산을 트레킹하며 돈독한 정을 더욱 쌓아간다. 캠핑이라는 것이 거창해보이지만, <아빠, 오늘은 어디가?>의 저자 황인철은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아이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차안은 재잘거리는 수다소리에 음악을 틀 여유도 없다. 캠핑장에 도착한 이후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아이에게 체험장소이며 먹거리의 장터다. 자연을 벗 삼아 먹는 음식은 캠핑장에서의 또 다른 맛이다. 아이의 식습관을 고칠 수 있었던 것 역시 캠핑의 힘이었고, 아이와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 캠핑은 텐트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점을 이야기 한다.

 

 일기 같으면서도 부러움을 사는 그의 이야기는 관심 받기 충분하다. 아빠의 무릎 위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기쁘다는 그에게서 부러움을 느낀다. 자상하고 인자한 아빠로 살기보다 아이와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아빠로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아빠 오늘은 어디가?>에서 그릴 수 있다.

 

 황인철이라는 이름 석자가 아니라, 준석 아빠로 불리게 된 그를 보면서 자뭇 미소가 지어진다. 사계절 아름다운 곳에서 아이와 함께하며 캠핑의 묘미를 즐기고,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독자도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소중한 사람과, 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시간. 'ㅇㅇ아빠'가 되길 바라는 당신에게 보내는 '준석아빠'의 메시지, <아빠 오늘은 어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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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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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실패한 MB노믹스

 이명박 정부에서 실시했었던 경제정책, 이른바 ‘MB노믹스’는, 대기업 위주로 성장을 하면 아래 계층의 사람에게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낙수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낙수효과는 크지 않았고 대기업의 승자독식과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만 심화되었다.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기업 위주의 성장 대신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정책인 ‘경제 민주화’가 새롭게 이슈로 떠올랐다.

 

새로운 화두, 경제 민주화
 ‘경제민주화’란 대기업에 쏠린 부의 편중현상을 법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기본적으로 존중하지만 부(富)의 편중 같은 부작용을 막고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대기업에 쏠린 부의 편중 현상을 법으로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통칭해서 「경제민주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금산분리, 순환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 법인세 조정 등 경제민주화를 한다 해도 재벌 해체 같은 경제 상위 구조의 개선에만 신경을 쓰는 모양세다, 나머지 현실적인 문제인 골목상권보호, 최저임금보장등과 같이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계되는 경제 하부 구조의 개선에는 노력이 부족하다. ‘경제 민주화 바람이 분 것이 서민을 위한 경제 하부 구조의 문제인데,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는다.

 

기업에 참된 의미
 김상봉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통해 주주는 자신의 주식 수 만큼 배당을 가져가는 것이며, 주식회사 내부의 이해관계를 볼 때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주주에게는 배당권을, 노동자에게는 경영권을”이라는 주장을 내새운다. 한국에서 주식회사로서의 소유구조가 가장 약한 공공기관들을 대상으로 우선 노동자 경영참여를 실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노동자가 경영자를 뽑는다면 지금 같은 무자비한 정리해고나 산재, 살인적 과로 등의 생활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기업, 그중에서도 주식회사에서 참된 의미를 노동자의 권리 확대로 찾은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개인 기업은 당연히 사장이 주인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는 다르다. 개인의 소유물이기 전에 주주의 것이라는 논리가 담긴다. 그러나 주주 역시 자본을 더 끌어당기기 위해 만들어진 이해관계이지, 주식회사의 주인은 아니다.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소유권과는 다르고, 주주의 권리 역시 소유권과는 다르다.

 

경영학자가 아닌 철학자에 의한, 기업에 대한 사색

 김상봉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통해 기업과 주식회사라는 조직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며, 경제민주화의 새로운 발전 모델을 보여준다. 실패했던 MB노믹스의 낙수효과, 정치권의 대안 모델인 경제민주화, 그리고 실질적 활동으로 발전하고 있는 협동조합. 이 세가지 기업논리에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영, 경제적 관점으로 논리를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 방식으로 이야깃거리를 펼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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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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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아픈 감정이 가슴에 쌓였을 때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길은 힘든 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묵묵히 가던 길을 걸으면 언젠가는 빛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고 나서 돌아본다면 견딜만한 길이었다고 하더라도, 지나는 도중에는 말할 수 없이 힘든 것이 우리네 인생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아버지’에게도, 걸어온 인생이 빛이 보이는 길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21세기는 묵묵하게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올바른 아버지 상이라고 말하는 사회다. 암묵적인 사회 분위기에 아버지의 길을 빛은커녕 더욱 어둡기만 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의무를 부여하는 시대에서,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아버지에게 있어 사랑한다던 아내는 억척스러운 아줌마가 되었다. 어린 자식이 자신을 보고 웃던 모습은 잠시 스쳐지나간 채, 지금은 언제 봤냐는 듯 차갑기만 하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그렇게 의무만 남기고 무너졌다.

 

 박범신의 소설 <소금>은 사회가 아버지에게 부여한 의무를 잠시 벗어난다.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가출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버지는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단 순간, 자식들을 위해 의무 아닌 의무를 지니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삶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 삶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과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소금>에서 아버지의 삶은 처참하다.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작가 박범신은 소금에도 달고, 시고, 짠맛이 있다고 했다. 소금으로 비유된 아버지의 맛은 독자에게 각각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본인을 녹여야 하는 아픔은 공통으로 다가온다. <소금>은 가출할 수 밖에 없었던 초라한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가족구성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무의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상기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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