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콘크리트 유토피아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사람들은 아파트에 집착하는가? 직장인 사회 초년차에게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도, 심지어 50이 되어가는 중장년층에게도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혹은 더 큰평형의 아파트를 구매하기 인생을 바친다. 그렇게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의 자신의, 그리고 가족의 인생을 바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먼저 밝히자면 지금 아파트는 주거의 공간이 아니라, 투자의 목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또 다른 아파트를 구입하여 부의 축적의 목적이 되버린 현실에서 종부세 등의 법안은 현실앞에 무너지고 있다.
아파트는 계급이다. 부의 가치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지표이다. 삶의 공간으로써 아파트의 기능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아파트는 더이상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투자의 개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계급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사람이 더이상 명예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가 명예아닌 명예를 가지고 상승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의 모습은 명예를 가진 상승지위의 대체재로 구분된다. 특히 이를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저자는 픽션과 팩트라는 두가지 형태로 이야기 한다. 이를 통해 저자 특유의 풍자를 느끼게 한다. 아파트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하고 의인화 한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과 불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또한, 강남 중산층 출신의 60대 남자를 화자로 설정해 자신의 세대가 아파트를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이룰려는 세력이었음을 털어 놓는다. 이런 자기 고백적 서술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에 신선함과 새로움을 더해준다.
65p
따라서 이들이 설계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설계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집장사 집들이 점령한 서울 변두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질서로 끌어들여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신중산층'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로 양성해 체제 동조 세력으로 규합할 수만 있다면, 구 기득권층의 반동을 견제하고 반체제 불만 세력의 준동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를 위해선 역사, 관습, 제도들이 퇴적되어 봉건 질서의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설계자들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 무색무취의 텅 빈 공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때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방식으로 조립된 미국식의 교외 주거 단지들이 설계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실제로 1970년대 초반, 압구정동, 학동, 청담동 일대에 '시영주택'이라는 명칭의 단층 주택 단지들이 준공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 아파트를 압도하기엔 힘이 부쳤다.
왜 기존에 항거하던 투쟁세력들이 보수화가 되었는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어도, 자신의 이념을 통해 주장하던 바를 외치던 사람들이 변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변화를 강요당했다. 그들을 신중산층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로 만들고, 물질적인 혜택을 주어 진보가 아닌 보수로 일원화 시킨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산물이 아파트였고, 이는 아파트가 주거 목적이 아니라, 이념변화의 도구로 사용됨을 보여준다.
95p
어느 보수적인 사회학자는 이 시기 수도권 신도시에 세워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출현을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변곡점으로 주목했다. 그의 지적대로 이 아파트들의 거주 집단 상당수는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추동한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거세지자 점차 급진적인 정치 이념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한국 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떠맡기 시작했다. 그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처음에는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그 다음에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했다. 아파트 구입을 전후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은 완연히 다른 모양새를 취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세대든지 젊은 중산층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존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의 주장에는 신선한 대목이 없지 않은데, 정치적 입장의 극적인 선회를 추동한 '반혁명'의 매개체로, 그리고 사회적 불만의 뇌관을 제거하고 체제의 안위를 도모하는 궁극의 정치적 해결안으로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는 내가 성취한 바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를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된 설계자들의 '군사적 시선'을 상기해본다면, 클라우제비츠의 경구에 약간의 허풍을 가미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파트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다"라고 말이다.
급진적인 정치 이념이 변화했다. 처음에는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다가, 이후 이를 막는 파수꾼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파트 구입을 전후로 사회와 다른 모양새를 취해나갔다. 사실 어느 세대든지 젊은 중산층이 나이를 먹어가며 기존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흔하다. 그러나 변화를 시간으로만 보기에는 부족하다. 아파트가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과정에서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이들을 배신자나 변절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아파트가 촉매제가 되었을 뿐, 어자피 변할 부분에서 가속화의 도구로 봐야되는 것이지, 아파트 때문에 변했다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114p
셋방살이 시절 주인집 아줌마를 상전처럼 모시고 눈치를 살피는 일 따위는 없어졌지만, 아내는 이제 다른 부류의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15평짜리 아파트를 포위한 '맨션'이란 이름의 대형 평형대 아파트들이었다. 이사한 지 며칠 뒤 공중목욕탕에 갔다가 제주도 토종꿀로 전신 마사지를 받고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들을 목격한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 조그만 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정육집 주인이나 채소 가게 배달원에게 무시당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내 집 마련의 벅찬 감동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속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에게 맨션은 "공상 영화에서 불을 뿜어대는 그런 거대한 괴물"같은 존재였다. 그럴 수 밖에......, 아내는 결혼 후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변해 "배추 한 단을 사면서도, 값을 깎아야 사는 맛"을 느꼈고, 세숫비누를 '다이얼'로 바꾸는 데도 몇 시간을 고민했다. 그런 그녀에게 맨션은 버거운 상대였다.
아파트를 구매해도 문제다. 이는 아파트가 주거의 개념이 아니라, 지위의 개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잘사는 집과 못사는 집의 차이는 아파트 소유의 유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는 1990년대에 들어 크기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 심지어 큰 평수의 아파트를 유지하기 위해 시장에서는 흥정이 기본이고, 다른 소비되는 것들을 줄여나가게 된 것이다. 기름값에 벌벌 움추려 무서워하면서도 고급 승용차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좀 더 높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 지위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상징으로 아파트가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135p
그리고 이 영화들의 상영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본격적으로 우리 세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교양 주부와 불법 과외와 8학군 열풍과 치맛바람과 한샘시스템키친과 한남슈퍼체인이 있고, 그들에겐 미시족과 사교육 열풍과 특목고와 기러기 가족과 김치냉장고와 이마트가 있다. 이 둘 사이에서 닮은 꼴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를 참조했고, 미래의 그들은 현재의 우리를 욕망했다. 한편으로는 더욱 첨예한 정치적인 공세로 우리 세대를 적대시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이미 실현에 옮긴 우리 세대를 흠모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긴 살다 보면 그런 자들이 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게임에 임했음에도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 그들은 마지막까지 명예롭게 위엄을 갖추길 원한다. 혹시 지금 나는 미량의 쾌감을 얻기 위해 그 위엄을 벌거벗겨 이미 항복한 자들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극성스럽게, 그리고 더 악착같이 자산 시장에서 투기의 욕망을 발산했고, 그리하여 마침내 "386세대의 강남화"라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되기의 칭호를 획득했다.
지금 아버지 세대는 민주화를 통해 과거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자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파트를 도구화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은 자식들을 통해 나타났다. 해외유학, 지식의 상아탑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보내는 대학. 이처럼 아버지 세대는 부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에게까지 그 욕망을 발산하고 있다.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이런 욕구를 받고 자라온 자식들 세대역시 이러한 욕망에 익숙하다. 그렇게 시대는 진보를 찾을 수 없는 진보가 되었고, 더욱 굳건한 보수를 찾았다.
그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반세기 동안의 변화를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강남, 과천, 분당, 용인으로 이어지는 투기열기에서,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냉정해지고 차갑게 변해간다. 어떻게 하면 변화를 일으키고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저자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아파트에 대해 서술하고, 캐릭터를 부여하여 그려내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분명 저자의 주관적 의지가 보임에도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보고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은, 저자가 아닌 우리들이다.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i2k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