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화폐와 허무주의 - 화폐의 권력에 관한 맑스의 이론

 

이진경


1. 가치에서 화폐로

가치론과 관계 속에서 화폐론은 직접적으로는 화폐의 몇 가지 경제적 기능에 대한 요약 이상이 아니다. 한편 가치-화폐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모두 가치-화폐를 내용-형식의 관계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경우 화폐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가치(내용)로 환원될 수 있는 가격(형식)의 문제가 된다. 즉 가치론 안에서 화폐의 문제는 가치에서 가격으로의 전형문제로 된다.*주)

*주) 전형문제는 ① 생산된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일치, ②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의 일치라는 두 개의 총계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스라파(Sraffa)는 표준상품 개념과 생산가격의 방정식을 통해 가격문제를 다룰 수 있는 틀을 제시했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간주되는 모리시마 역시 이 방정식과 표준상품의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계급투쟁의 문제를 표현한다고 간주되었던 이 방정식은 스라파를 잇는 신리카도주의자들에 의해 결국 가치 개념의 폐기라는 역설적 결과로 귀착되고(Steedman), ‘계급투쟁’의 논리는 땅콩가치론의 ‘조롱’으로 변환된다(Bowles and Gintis). 한편, Lipietz는 화폐의 노동등가물 개념을 도입하고, ①을 순생산물의 가치(총부가가치)=순생산물의 가격이라는 명제로 대체하여 해결하려 했지만,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비율로 노동등가물을 정의할 때(즉 ①을 다시 도입할 때) ②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난점에 빠진다. 이에 관해서는 강남훈, 「전형문제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ꡕ, 까치, 1986; 조원희, 「노동가치론의 철학적·이론적 기초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 논쟁ꡕ, 풀빛 참조.

그런데 ‘가치법칙’의 현실적 기능(효과)과는 다른 차원에서, ‘가치론’의 문제는 전형문제의 해결 여부와 무관하게 현실에 대한 별다른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가치론의 가치는 다만 노동가치론이 옳다는 것을 통해 맑스주의가 옳다고 입증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이 맑스주의의 기초라는 고전경제학적 공리를 기각한다면, 반대로 맑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주1) 가치론의 변명과도 같은 궁색한 논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네그리는 이러한 생각을 좀더 격하게 표현한 바 있다. “가치론은 범주적 종합에 관한 이론으로서 혁명의 장에 들어가는데 없어도 괜찮은 고전이고 부르주아적 사기의 유산이다.”*주2)

*주1) 이에 관해서는 이진경, ꡔ맑스주의와 근대성ꡕ(문화과학사, 1997)의 제3장(맑스의 근대 비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참조.

*주2) A. Negri, Marx Beyond Marx, 윤수종 역,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 새길, 1994, 91쪽.

한편 화폐의 문제를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는 한, 화폐의 문제는 가치론으로 환원되고,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적 메커니즘은 사유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된다. 화폐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러한 환원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형식이 내용의 형식화라면, 형식에 대한 검토는 그 안에 형식화된 내용에 대한 검토를 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내용과 형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내용에 대해서만 언급하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것이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이용하는 한 언제나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그러나 ‘변증법’에서도 말하듯이 형식 없는 내용은 있을 수 없다면, 내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용의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가치란 그런 점에서 ‘내용’이라고 말할 때조차도, 그런 형식을 취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이고, 따라서 내용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반면 그것은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은 고유한 표현의 형식을 갖는다. 화폐가 표현형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차원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의 형식)이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약간 부연할 필요가 있다. 가령 어떤 이론의 내용이 계급적 내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해도, 잘 알다시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계급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다. 즉 내용이 계급적일수록, 표현은 계급적이지 않으며, 내용이 이데올로기적일수록 표현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다. 계급적인 내용이 초계급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표현의 형식에 대한 연구는 내용에 대한 연구로 환원되지 않으며, 표현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는 내용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다.*주)

*주) 내용과 표현의 개념이나, 그것의 비환원성에 대해서는 Deleuze/ Guattari, Mille Plateaux, 이진경/권혜원 외 역, ꡔ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ꡕ, 1,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2000, 50쪽 이하와 94-95쪽을 각각 참조.

요컨대 화폐는 단지 가치라는 내용을 표시하는 형식이 아니라, ‘착취의 메커니즘’이고 ‘착취의 표현형식’이다. 착취라는 메커니즘의 표현형식이 화폐라면, 그 내용의 형식은 (잉여)가치 내지 (잉여)노동이다.*주1) 한편, 이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은 착취 내지 잉여노동인데, 이는 생산양식 내지 전유(appropriation) 양식을 구성하는 관계(형식)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화폐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으로서 착취 내지 생산양식에 대해 노동과정과 노동의 체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주2) 착취와 상관적인 표현의 형식에 관해서는 화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화폐는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조직하고 추동하며, 그 안에서 착취 내지 포획이 이루어지는 형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삶의 형식에 대한 질문은 화폐를 경유할 수밖에 없으며, 착취는 화폐와 무관할 수 없다.*주3)

*주1) 자본주의에서 가치란 이미 처음부터 잉여가치다. 소상품생산이라는, 유지되기 힘든 역사적 생산방식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가치’라는 관계(형식)을 취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전혀 다른 배치를 이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모든 노동은 이미 처음부터 잉여노동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가 국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매우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Deleuze/ Guattari, 앞의 책, 2권, 280-282쪽 참조.

*주2) 이진경, 앞의 책, 제5장 참조.

*주3) 이런 점에서 맑스의 ꡔ그룬트리세ꡕ(Grudrisse)가 화폐에 관한 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나, 이를 지적하면서 화폐론의 새로운 중요성을 상기시킨 네그리(A. Negri)의 문제설정은 올바르다. “화폐론에 직접 종속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가치론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같은 책).

다른 한편 루카치(G. Lukcs)는 상품과 화폐를 다루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화’(Verdinglichung)에 관한 ꡔ역사와 계급의식ꡕ의 유명한 장에서 상품과 화폐의 문제를, 노동의 결과를 양화하여 계산가능하게 만드는 형식으로 포착한다. 즉 화폐는 노동이 갖는 질적인 모든 측면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며, 이로써 인간과 노동의 질적인 세계는 양적으로 계산가능하게 된 사물들의 세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주1) 이는 條文(code)에 의해 통제되는 계산가능한 세계로서 근대에 대한 베버의 연구와 ‘화폐의 철학’에 관한 짐멜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특히 짐멜은 생활양식(Der Stil des Lebens)의 차원에서 화폐의 문제를 다루는 훌륭한 선례를 남긴 바 있다.*주2)

*주1) G. Luk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박정호 외 역, ꡔ역사와 계급의식ꡕ, 거름, 1986, 172쪽 이하.

*주2) G. Simmel, Philosophie des Geldes, 조희연 외 역, ꡔ돈의 철학ꡕ, 한길사, 1983. 한편 여기서는 사라져버린,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을 수 있던 시절에 대한 (ꡔ소설의 이론ꡕ에서의) 그리움이, 기술과 예술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cf.하이데거) 그 좋던 시절의 장인적인 노동, 즉 그 본질이 유효하기에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이는 브레이버만 역시 동일하다. H. Braverman, Labor and Monopoly Capital, 강남훈 외 역, ꡔ노동과 독점자본ꡕ, 까치. 이는 짐멜이나 베버는 물론 하이데거나 아도르노도 결코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인데, 루카치는 이를 노동 개념의 철학적 원천인 헤겔에게 맑스의 철학을 되돌리는 전환점으로 삼고 있으며, 노동의 인간학으로 맑스주의를 회귀하게 하는 이론적 전거로 삼고 있다. 물화에 대한 개념으로서 물신성(Fetischismus).

이러한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루카치는 자본뿐만 아니라 상품 형식 자체를 폐기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데, ‘사회주의와 코뮨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 위에서’ 이는 그를 이른바 ‘좌익 공산주의’(Left-Wing communism)의 궁지로 몰아간다. 또한 노동의 인간학과 헤겔주의는 상품과 화폐에 대한 루카치의 분석이 갖는 새로운 측면을 ‘인간주의’라는 구태의연한 도식 안에 다시 밀어 넣는다.

우리의 생각은 화폐란 착취의 표현형식이며, 또한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 자체를 착취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모든 살아있는 활동을 가치화(Verwetung)과정 속으로, 즉 자본의 가치증식(valorization) 과정 속으로 포섭하여 그것이 생산하는 결과를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생산물들을 현실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부정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러한 포섭과 포획을 통한 동질화를 강제하는 화폐적 등식을 통해, 일종의 초월적 권력을 장악하고 작동시키며, 그와 반하는 현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는 허무주의적 메커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표현형식으로서 화폐가 초월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통해 착취와 포획을 수행하는 한편, 포섭된 내부에 대해서는 동질화하는 권력의지를 작용시키고, 배제된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의 권력을 작용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화폐적 메커니즘을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식의 도식에서 출발하여,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nihilism)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허무주의’란 화폐적 등식으로 표시되는 ‘가치형태’의 의미와 효과를 뜻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등식과 상품과 노동이 계열화될 때 ‘철학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고, 이 등식과 자본이 계열화될 때 경제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이 등식을 국가나 시장과 관련하여 검토할 때 근대 사회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새로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등식을 국제통화의 문제로 확장할 때 세계체제 내지 세계경제의 문제에 접근할 또 다른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등식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 혹은 자본에 반하는 운동 내지 혁명의 문제를 새로이 포착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가치형태: 화폐화의 논리

알다시피 ꡔ자본ꡕ의 첫 장은 상품의 가치형태에 대한 유명한 도식들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화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상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다. 먼저, ① 단순한 가치형태는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xA=yB)
라는 도식으로 표시된다. 여기에서 좌변의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 우변의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즉 상품 A는 자신의 가치를 상품 B의 사용가치를 통해서 표현한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고 그것의 표현을 위해 이용되는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여기서 A는 B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능동적’ 역할을 하며, B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주1) 이 관계는 등가적이므로 서로 반대의 역할을 할당할 수 있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등호의 좌우변을 바꾸어야 한다. 즉 등호의 좌변은 주어고, 우변은 서술어며, 등호는 ‘is'라는 동사인 것이다.*주2) 가치형태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맑스가 말할 때, 그것의 요체는 어떤 상품의 가치가 반대편의 등가물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치란 등가형태를 통해 정의되며, 등가형태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1) K. Marx, Das Kapital, Bd. I, 김수행 역, ꡔ자본론ꡕ, 상, 비봉출판사, 1989, 60쪽.

*주2) 이는 포르-루아얄(Port-Royale) 논리학에서 동사의 이론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양의 언어에서지만) 모든 문장은 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동사는 tre (be; sein)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ꡔ말과 사물ꡕ, 민음사). 여기서 tre 동사는 등호(=)의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② 전개된 가치형태.



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외연적 확장이다. 이는 등가형태의 추가를 통해서 상품 B의 가치가 특정한 하나의 등가형태로부터 탈영토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제 다양한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 상품 A의 가치는 그 자신의 특정한 사용가치와 무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가치는 다른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는 능력(잠재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전개된 가치형태는 우변의 항들 간에 교환을 보장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가 성립하는가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만일 라면 이 전체 등식은 A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즉 A의 가치는 우변의 사용가치들로부터 완전히 탈영토화되지 못한 것이고, 가치는 일반적인 교환가능성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 교환가능성으로서 가치가 정의되기 위해서는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일반화된 가치형태로의 변환이 필요하게 된다. 맑스가 말하는 ③ 일반화된 가치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화된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이 특정한 하나의 상품 E를 통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공통적으로 표현한다. 상품 E는 일반적인 등가형태다. 여기서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달리 E를 통해 좌변의 모든 상품들 상호간에 일정한 등식이 언제나 성립한다. 다시 말해 ‘단일한 등가형태로 등가형태를 일반화함으로써’,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 때 일반적 등가형태를 이루는 좌변의 상품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만드는 가치관계를 통해 등가형태의 일의성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배제는 인위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다만 자신의 가치형태를 표현할 등가형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E가 좌변의 상품세계 안에 온다고 해도, 맑스 말대로 ‘z량의 상품 E = z량의 상품 E’는 단순한 동어반복일 뿐이며, 여기서 좌변은 상대적 가치형태가 아니고, 우변 역시 등가형태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며 그런 만큼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 등가형태로 작용하는 E 역시 ‘하나의 상품인 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는 시장상황에 따라 등가형태로서 자신의 일반성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동요하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품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배제하여, 상품과는 다른 것으로 위치짓고 상품 아닌 것으로 작용하게 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완성된다.
알다시피 ④ 화폐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 등가형태의 자리에 상품이 아닌, 그러나 상품의 가치를 표현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들어설 때 화폐형태가 성립한다. 화폐 G는 교환비율의 시장상황과 무관하게 일의적인 등가형태로 기능하며, 이로써 상품들은 하나의 단일한 척도와 규칙을 통해 안정적으로 질서지워진 단일한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화폐는 단지 상품교환의 등식이 확대되고 나열되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으며, 다양한 상품들이 어떤 일반적인 등가형태를 통해 일반화되는 것만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된 어떤 요소를 인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이전의 형태와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이제 좌변과 우변은 능동과 수동의 역할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상품 간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화폐가 아닌 상품과 상품이 아닌 화폐라는 이질적인 두 항 사이의 ‘불가역적 관계’를 표시한다. 이전의 가치형태와 단절을 만드는 이러한 불가역성은 국가장치 내지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

반복하건대, 화폐는 상품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며, 상품세계의 ‘외부’이다. 다시 말해 화폐는 상품세계의 외부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상품 세계의 내부에 있다가 ‘배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품세계에 일의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상품세계의 외부, 시장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국가장치가 바로 그 외부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화폐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와 같은 기능적 차이뿐만 아니라 이처럼 발생적 차이를 포함하는 명제다.

화폐형태 아래서 중요한 역전이 나타난다. 등가형태로서 화폐는, 좌변에 있는 상품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폐형태가 확립되면, 화폐라는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만이, 다시 말해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는 것만이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상품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화폐와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여했어도 상품이 아니며, 가치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은 화폐를 통해서 ‘상품화’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치는 화폐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라는 등가물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가치란 가치화(Verwertung)를 통해서, 화폐와의 등가성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3. 화폐와 허무주의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태의 도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폐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좌변에 있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상품들을 ‘하나로 묶고 통합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니 어떤 생산물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화폐와 등가관계를 취해야 한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물은 화폐를 통해 상품세계 안으로 들어가며, 화폐는 그 상품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세계로 통합한다. 가치의 유혹을 통해 생산물들을 상품세계로 끌어들이고 그 세계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통합자로서 화폐.

또한 화폐는 이제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로서 나타난다. 생산물들에게 상품세계의 회원증을 나누어주는, 아니 가치를 분배하는 초월적 지배자로서 화폐. 이것을 통해서만 어떤 생산물도 상품이 된다는 점에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이다.

초월자로서 화폐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정의되는 이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가치가 ‘화폐적 가치로 동질화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생산물은 어떤 것도 화폐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화폐와 교환가능한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에서는 존재이유(raison d'tre)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생산물이 계속하여 생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폐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 그런 ‘가치’를 갖는 생산물은 점차 소멸의 길을 밟게 되고, 화폐로 환원가능한 가치만이 살아남게 된다.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것은 화폐적인 가치로 동질화된다. 화폐로 표상/대표되는 가치의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초월적 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화폐형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가치는 오직 화폐일 뿐이다. 동질화하고 획일화하는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는 화폐화의 강박을 만들어낸다. 이제 상품이라고 불리고자 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비상품으로서 화폐를, 상품세계의 피안에 있는 저 초월적 가치인 화폐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치환하고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욕망한다. 각각의 생산물이 갖고 있는 고유한, 종종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가치는 초월적 존재로서 화폐의 화려한 금빛 광채 앞에서 자신의 빛을 잃어버리고, 그 금빛 광채로 자신의 신체를 둘러싸고자 하게 된다. 생산물의 특이적인 ‘가치’의 초월적 피안으로서 화폐와 그것을 통해 부정되는 차안으로서 ‘가치’들. 생산물들의 현재적인(현세적인) 능력의 부정과, 단지 장래의 교환가능성을 뜻할 뿐인 미래적인(비현세적인) 능력의 찬양. 결국 화폐가 대표하는 가치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은 ‘생산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의 부정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 피안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선망과 찬양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다.

화폐적 허무주의는 모든 가치의 화폐적 획일화, 모든 능력의 화폐적 동질화, 모든 관계의 화폐적 단일화를 작동시킨다. 화폐화되지 않는 어떤 질이나 성질, 특성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존재이유를 상실해간다. 가령 파종되는 씨앗들은 오직 화폐로 치환가능한 비율을 기준으로 하게되며, 그 비율이 큰 품종으로 점차 축소되고 획일화된다. 연구하는 지식들은 화폐화되기 쉬운 것으로 수렴하며,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것도 특별한 조건이 없으면 생산되거나 생존하지 못하게 된다.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점차 제거하고 축소하며 ‘부정’한다.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상품들 간의 관계로 변형되는 것이 상품관계의 특징이다. 이러한 관계는 화폐를 통해서 상품의 가치가, 결코 가치를 갖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 대상(화폐)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맑스는 ‘물신주의’라고 했다. 이는 화폐로 하여금 동질적인 가치공간을 형성하게 하는 권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제거할 능력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주의는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가치화된 활동이고, 가치화하는 과정에 기여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구매된 노동이고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주) 이런 점에서 가치화는 (잉여)가치증식이다. 그렇지 않은 활동, 그렇지 못한 ‘노동’은 무가치하며,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활동이요 소모적인 행동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짓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의자를 수리하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운전을 하는 행동 등등. 이런 점에서 노동력이 상품화되는, 다시 말해 노동력이 화폐적 표현형식을 통해 가치를 갖게 되는 양상을 우리는 앞서와 유사한 화폐형태의 도식으로 표시할 수 있다.

*주) 맑스는 이를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한 스미스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서 분명하게 한 바 있다. K. Marx, Theorien über Mehrwert, Bd.1, ꡔ잉여가치학설사ꡕ, 1권, 아침, 1989, 165쪽 이하 참조.



이제 생산적 활동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화폐가 통합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외적이고 초월적 가치의 자리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이 도식은 보여준다. 모든 활동은 그것이 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활동도 가치가 없다.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서 화폐화될 수 없는 활동은, 아니 다른 것보다 화폐화되기 어려운 활동은 점차 소멸과 종말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화폐화될 수 없는 생산물, 화폐화 되기 힘든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4. 화폐와 자본주의

어떠한 상품이나 생산물도 화폐의 이러한 가치 승인을 통해서만 그 가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치법칙이란 이러한 화폐적 승인의 소급적 과정을 통해 거꾸로 노동과 생산, 투자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다. 다시 말해 가치법칙은 가치화(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노동이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고, 모든 것을 화폐적 가치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이며,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활동들을 의미 있게/의미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요컨대 가치법칙이란 화폐적 세계의 허무주의가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배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와 화폐를 통한 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맑스의 다음 도식에 집약되어 있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해지고, 반대로 화폐를 통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생산능력으로서 노동력을 생산의 조건인 생산수단과 분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폐는, 혹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수한 종류의 화폐로서 자본은 능력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는 부정의 권력의지를 작동시킨다.

노동력은 화폐적 등가물을 통해서만 가치를 승인받고 유효한 생산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품이 됨으로써 화폐적 질서 안에, 화폐가 통치하고 통제하는 질서 안에 통합되며, 화폐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질서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이제는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만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화폐화할 수 없는 활동이나 능력은 생산적이지 못한 노동이요 비노동이 되며, 사회적으로 승인될 수 없는 노동이다. 승인 받지 못할 노동은 부재해야 하며 소멸해야 한다.

여기서 화폐는 노동이 가능한 지대를 구획함으로써 이전의 생산의 공동체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과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지극히 포괄적인 ‘공동체’지만, 또한 그런 한에서만 받아들이는 지극히 배타적인 ‘공동체’다.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자본주의에서, 그 가치를 승인받을 수 없는 활동을 하는 자, 혹은 일자리를 잃고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자라면, 누구든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그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진경,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 ꡔ진보평론ꡕ, 창간호, 1999년 가을 참조.

요컨대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할 수 없는 자는 ‘인간’의 대열에서 배제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 된다.*주)

*주) 노동력의 상품화는 생산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하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화폐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 자체를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를 통해 동질화하는 과정이며, 생산적 능력 자체를 하나의 단일한 가치를 통해 측정하는 과정이며, 그럼으로써 화폐화될 수 없는 한, 생산적인 어떤 능력도 무능력으로 간주하는 과정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생산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화폐화하는 능력이며, 생산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화폐화하는 활동이다. 이제 생산하는 활동보다 차라리 그것을 판매하고 화폐화하는 활동이 더 중요해지고(농부와 유통중개상의 관계, 상업 내지 유통활동의 위상), 지적 활동보다 그것을 팔 수 있는 정치적 활동이 중요해지고, 예술적 활동보다 그것을 비싼 값에 화폐화할 수 있는 경영적 활동(매니저와 매니지)이 중요해진다.

능동적인 힘으로서 생산적인 힘, 욕망을 그것이 현재화할 수 있는 조건인 생산수단에서 분리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이라면, 생산적인 긍정적 의지를, 생산의 조건을 장악한 자본의 의지(부정의 권력의지!)로 대신함으로써 이제 능동적 힘은 부정의 권력의지 아래 생산적 힘으로 행사된다. 이를 니체는 ‘반동적 생성’이라고 불렀다.*주)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생산적 힘, 생성능력을, 생산조건 내지 화폐를 소유한 부르주아지의 의지와 목적에 제공함으로써 자본의 증식을 의미할 뿐인 반동적 생성에 봉사한다. 맑스가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부른 과정은 이 반동적 생성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허무주의화하는 힘으로서 화폐의 증식이라는 점에서 허무주의적 메커니즘 안에 있는 것이다.

*주) 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범순 외 역, ꡔ니체, 철학의 주사위ꡕ, 인간사랑, 1993, 116쪽 이하; 고병권,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1997, 82쪽 참조.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다. 즉 잉여노동이 가치의 형태로 자본으로 포획되는 과정이 바로 축적과정이다. 따라서 축적이란 현세적 활동이 화폐의 초월적 세계를 증식시키는 과정이고, 그에 따라 화폐적 가치의 독립성과 초월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며, 그런 만큼 현세적 활동이 위축되고 축소되는 과정이다. 맑스가 말한 ‘소외’라는 말은 이러한 ‘화폐적 허무주의화(nihilization) 과정’의 다른 표현이다.

종종 공황이라고 번역되는 위기(Krise)는 승인받지 못한 상품들의 가치가 실제적으로 무효화되는 과정(Entwertungsprozeß)이고, 그에 따라 그 상품들의 가치가 잠식되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화폐적 세계가 승인ㅈ할 수 있는 크기에 의해 가치가 재평가되는 폭력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가치법칙이 생산활동 자체에 반작용하는 소급적인 과정이며, 그런 만큼 초월적인 화폐적 가치가 잠재적 가치의 세계에 관여하여 조정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능동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파괴와 탈가치화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생산의 세계에 대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주)

*주) ‘유예된 소비’로서 저축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정의 역시 이러한 허무주의적 場 안에 있다. 화폐적 축적을 위한, 소비의 무한한 연기로서, 소비에 대한, 아니 사실은 생활에 대한 평가절하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이다.

5. 화폐와 사회

상품가치의 화폐형태 도식이 보여주듯이, 화폐는 다양한 상품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질적인 면에서 각각의 상품이 갖는 이질적인 특징들은 화폐의 끈을 통해 하나의 질서로 묶인다. 즉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가치를 등가물에 양도하고 그것을 통해 대의(代議)하는 상품들과, 그러한 위임을 통해 상품의 가치를 대표/표상하는 대표로서 화폐. 요컨대 상품들의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이다.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그 설명의 논리에서나, 작동의 논리에서나 근대인과 근대 국가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설명의 논리에서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척도적 역할을 위임하고 부여하는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은 화폐의 탄생을 설명한다. 마치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정확하게 동형적이다. 또한 이러한 설명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초월적인 권력을 갖는 화폐에 의해 상품세계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치론적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양상 역시 국가적 권력과 인민간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러한 화폐의 초월적 위상과 통합적 기능을 전제하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질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자동적인 조절의 메커니즘으로 나타나는 시장은, 초월적인 외부의 배제를 통해 가능한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개입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 즉 이미 자동화된 메커니즘 안에 초월적인 제3항으로서, 통합 및 통제를 수행할 전제적 위치를 점유한 화폐의 항상적 개입을 통해 시장은 작동한다. 또한 그것은 화폐의 그러한 기능을 정의하고 보증하며 강제하는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이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국가의 기능이란 바로 ‘화폐적 통합과 통제를 보증하는 국가의 개입’인 것이고, ‘화폐를 통한 국가의 개입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강제와 폭력의 메커니즘’이라고 하겠다.

모든 가치의 승인으로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모든 가치를 단일한 가치로 동질화하는 조건으로서 화폐를 전제하며, 화폐를 통해 작동한다. 자유주의의 조건으로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란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에 따르는 비용에 대한 책임이며, 결국은 그러한 계산을 자유의 전제라는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계산하며 효율적 최적점을 찾는 공리주의적 인간을 전제한다.*주) 이러한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이 모두 화폐로 환원되는 것이란 점은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레세 페르’(Laissez faire!)를 외치는 자유주의자의 호기(豪氣)는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의 형식을 통해 항상-이미 작용하고 있는 화폐의 권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며, 결국은 화폐의 메커니즘, 화폐의 권력에 맡겨두라는 언명인 셈이다.

*주) 결국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화폐와 계산을 통해 하나의 단일한 계열로 수렴한다.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경제 개념에서 공리주의적 인간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H. Arendt, The Conditions of Human, 이진우 외 역, ꡔ인간의 조건ꡕ, 한길사, 1997, 94쪽 이하 참조.

6. 화폐와 세계자본주의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국제경제적 통합 메커니즘에 대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 체제의 주도권의 변화는 다른 ‘화폐상품’들의 척도가 되었던 이른바 국제통화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변화된 제국주의 나라 간의 역관계와 상응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제국주의 나라의 헤게모니와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국제통화는 제국주의의 헤게모니 내지 통합의 경제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국가의 화폐가 갖는 통합 및 포섭의 권력이 각국의 자본주의를 하나로 묶고 통합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영국 제국주의의 지배시기에 스털링 체제나, 미국 제국주의 지배시기에 달러 체제가 그러한 사례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맑스의 도식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듯이 어떤 나라의 화폐가 국제 경제 내지 무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국의 통화 M이라는 ‘등가형태’를 통해야 한다. 여기서 국제통화로 기능하는 헤게모니국의 화폐는 상품세계를 통합하고 조직하는 화폐의 기능을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화폐가 상품에 대해 갖는 권력과 통합력을 국제경제에서는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행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가 갖는 사회적 통합의 기능 역시 그것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국 자본주의는 국제통화의 일의적 지배 내지 통합 체제 아래 복속되고 포섭되는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일차적 단위는 국제경제인가? 알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이전의 ‘화폐형태’와 ‘국제화폐 형태’ 간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이전의 화폐형태와 달리 화폐상품과 국제통화 간의 이러한 관계에서 첫째, 국제 통화인 M은 각국의 ‘화폐세계’에서 배제된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다. 즉 국제화폐는 화폐상품의 일부다. 다시 말해 상품과 달리 스스로 가치를 갖지 않았던 화폐와 달리, ‘화폐세계’의 일부로서 ‘가치를 가지며’ 그런 만큼 자국내 경제여건에 따라 변화된다는 점에서 불안정한 척도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자국 내에서 상품 ‘가치’의 표현자인 한,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같은 표현력의 가변성을 피할 수 없는 한, 가치를 갖지 않는 상품세계의 외부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화폐적 통합의 안정성은 확보할 수 없다.

둘째, 국제화폐에 의해 묶이는 각국 화폐, 즉 화폐상품들은 이미 각국 내에서 상품세계를 질서지우고 통합하며,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강제적이고 제도적인 화폐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예컨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경우처럼 국제화폐에 의해 경계지워진 화폐세계에서 배제되는 경우에도 자국 내에서는 화폐로서 여전히 기능한다는 점에서, 화폐화되지 못하면 파괴되고 소멸되는 상품과 달리 독립성을 갖는다. 이는 헤게모니국의 화폐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존재가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국적 화폐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이는 통합된 화폐세계에서 일국적 단위의 독립성과 일차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셋째, 일국에서 화폐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했던 국가가 있었던 것과 달리 국제경제에서 국제통화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하는 것은 국제적 국가가 아니라 헤게모니국 자신의 힘과 능력이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적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과 능력이 약화된다면, 다른 경쟁국에 의해 통합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화를 대체하려는 경쟁이 항상적으로 잠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품-화폐의 관계와 또 다른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의 또 하나의 요인이며, 국제적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일국적 자본주의가 독립성과 일차성을 갖는 또 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위기는 이러한 국제통화가 갖는 안정성의 동요 내지 변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통화를 포함하여 각국 통화가 국제통화를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국제적인 환투기는 국제화폐 자체가 화폐상품이라는 사실, 투기대상이 되는 국제통화의 가치표현능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 등에 기인한다. 이러한 투기로 인해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되며, 이는 국제적인 경제관계는 물론 일국적인 차원에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국지적인 국제화폐가 발생하고 기능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 국의 지배체제와 갈등 속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EC에서 ‘유로’라는 새로운 통화체제를 만들려는 집요한 노력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7. 화폐와 코뮨주의

이상에서 본 것처럼 지배적 가치형태로 자립한 이래,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그것이 결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이래 화폐는 생산물을 질서지우는 초월적 기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이나 사람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척도였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공동체를 대체하고 대신하여 사람들의 결합과 통합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었다. 화폐는 “모든 것을 냉정한 계산의 찬물 속에 집어넣는다”는 맑스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폐화된 관계는 화폐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넣는다. 이를 사회적 관계에서 허무주의라고, 혹은 허무주의적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코뮨주의란 이런 관계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고, 그런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제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경제주의적 정의를 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공산당 선언」)으로서, ‘현실적 이행운동 그 자체’(ꡔ독일 이데올로기ꡕ)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코뮨주의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초월적 가치, 초월적 권력에 대한 비판이요, 그것이 야기하는 허무주의의 초극으로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코뮨적 관계에 대한 꿈으로서 코뮨주의.

한편 자유와 평등에 대한 등가적 관념, 교환에 대한 등가적 관념, 관계의 공평성에 대한 등가적 관념은 모두 앞서 말한 화폐적 질서 안에 있다. 예를 들어 평등한 교환은 가치가 동일한 물건의 교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비화폐적 교환, 비화폐적인 관계는 모두 공허한 환상이요 몽상일 뿐이다. 그런데 흔히 현실성의 이름으로 비판하듯이, 이 화폐적 척도는 과연 넘어설 수 없는 것인가?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 내지 척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활동이 교환되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잘 알다시피, 이전에 맑스는 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가변성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화폐 내지 화폐적 관계는 어떠한가? 소유를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맑스주의자들조차도, 상품이나 화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화폐적 관계의 폐기가 소유관계의 폐기보다도 곤란하고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코뮨주의는 화폐적 관계의 초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이른바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대한 기존의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 관념을 넘어서서, 코뮨주의를 현재성의 시제를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재정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레닌 이후 거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그랬지만,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 경제를 규제하는 원리로서 존립하는 한, 그것을 통해 사회주의를 넘어서 코뮨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치법칙과 화폐관계는 코뮨주의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전혀 내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행의 계기, 그것은 바로 가치법칙과 화폐관계에 반하는 투쟁, 화폐의 비자본주의적 사용, 비화폐적 관계의 확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코뮨주의란 바로 이처럼 화폐에 반하고 가치법칙에 반하여 사람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운동 그 자체가 아닐까? 화폐와 무관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가치법칙에 반하여, 화폐에 반하여 새로운 사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가 바로 코뮨주의가 아닐까?*주)

*주) 역으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만 유의미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선형적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순진한 공상성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마치 루카치가 그랬듯이.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그 안에 내재하는 외부로서 코뮨적 조직과 코뮨적 관계로서 코뮨주의는 가치법칙을 벗어나려는 현실적 이행운동을 통해서만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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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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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공산당 선언] 이 제기하는 문제

0. 이 텍스트의 제목은 [공산주의당 선언] 입니다. 흔히는 [공산당 선언]으로 얘기가 되기도 하고, ‘당’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이야기하고 하죠. 또는 [공산주의 선언]으로 말하기도 하고. 그런데, 맑스가 글의 서두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당이라는 실체를 부여해주고자 하는 의미로 이 글을 쓰고 있기에 우리는 공산주의당 선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당시 맑스가 ‘당 PARTY'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당‘에 대한 관념은 맑스 사후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파티라는 말은 사실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일 텐데, 그 당시 맑스는 그러한 말을 공산주의적 의견을 가진 모든 부분들, 모임들에게 붙여주고 싶었던 거 같구요. 그래서 맑스 당시의 당이라는 표현과 현재의 당에 대한 우리의 관념 간에는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1. 저작선집에서 다루어진 첫번째 서문인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맑스는 [선언]에서 개선될 부분을 몇 가지를 얘기합니다. 특히 2절 뒤에 실린 혁명적 방책들이 시대적 변화 속에서 낡았음을 말합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고 있는데, 대공업의 엄청난 발전과 이와 함께 전진된 노동자 계급의 당 조직, 그리고 빠리꼬뮌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동시킬 수는 없다"는 것.


세 번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 같은데요.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의미없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좀더 정확한 의도 즉 국가소멸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인 그룹이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당시, 즉 맑스가 서문을 쓸 당시에 맑스가 강조하고자 했던 정치적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향후에 고찰해봐야 할 것.


어쨌든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맑스의 전략의 중요한 부분은 어쨌든 당시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정향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될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맑스의 정치학의 주요한 측면 중의 하나를 저는 현실주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맑스 자신도 누차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죠. 현실적인 조건에서 혁명으로 향해가는 도정에서, 국민국가들의 본격적인 형성기에 맑스가 취할 수 있는 혁명전략의 상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국가들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방점이 취해졌다는 것, 그것인 바로 인터내셔날(INTER-NATIONAL 간 - 국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본문상에서도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상 처음에는 일국적일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끝장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와서 문제가 되는 그러한 부분을 사고할 때 중요한 건 다시금 "현실주의"라고 생각이 드네요. 현실적 조건 속에서 맑스의 사고를 재평가하고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겠죠. 현재의 일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해야 하는 자본의 힘이 단지 일국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일국적 관점을 채택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운동을 전개해야만 하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들 속에서 맑스 사유의 낡은 부분과 새롭게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 가려질 것이니깐요.


2.  1882년 러시아어판 제2판 서문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지적된 것은, 맑스가 그 동안 간과해왔던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인정입니다. 러시아의 오브쉬치나라고 불리는 공산주의적 공동점유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인가를 맑스는 묻고 있습니다. 즉 서구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해체과정으로 나아갈 것으로 이 공동체를 사고해야 할 것인지, 즉 해체될 낡은 관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힘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겠죠. 그러나 중요한 점은 맑스가 이러한 공동체 문제를 고립적으로 러시아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것은 아니고, 서유럽의 혁명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로 사고하면서 양자가 서로 연결된다면 러시아의 공동체적 관계는 공산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맑스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간략히 말하면 1847년에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었고, 공산주의 운동은 노동자운동을 의미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 게급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를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공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 외부에서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네요.  


4. 지배계급이 자신의 반대자로 낙인찍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자본주의와 관계 속에서 그러한 세력이 처한 조건과 힘을 구체화시켜주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5.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이다라는 말로 본문은 시작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너무나도 중요한데, 많은 역사서들은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를 그리기보다는 승리자의 역사로, 자본 주체성의 역사로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렇다면 계급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맑스의 계급개념은 사회학적인 실체적이고, 계량적인 계급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사회를 수량화하고 계량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범주화를 시도하면서, 실제로는 끊임없는 실천의 관계에 놓인 것을 정태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사회학적인 계급개념인데요,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은 계급을 역사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상대되는 계급개념을 우리는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계급이라는 말을, 경험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소재와 의식의 측면 모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며 외관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합하는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나는 계급이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계급을 ‘구조’나 심지어 ‘범주’로서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happen)하는(그리고 발생해온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더욱이 계급 개념은 역사적 관계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다른 어떠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계급은, 만약 우리가 어떤 주어진 시기에 그것을 정지시켜놓고 그 구조를 해부하고자 한다면 분석망을 빠져나가는 유동적인 어떤 것(a fluency)이다.
… 만약 우리가 어떤 주어진 시기에 역사를 정지시켜놓는다면, 거기에는 계급은 없고 단지 다양한 경험을 지닌 수많은 개인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변화가 진행되는 적당한 기간에 걸쳐 이 사람들을 관찰하면 우리는 그들의 관계와  관념 그리고 제도에서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계급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며 이것이 바로 계급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정의이다.”


6. 맑스와 엥겔스는 이 글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서문에서도, 그리고 본문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은 인간을 과거의 봉건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주었지만, 그러한 자유는 오직 상업적인 자유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은 종결되겠지요.


현대에도 그러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역할이 일부지역에서는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것은 인도의 경우인데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가장 강력하게 붕괴시키고 있는 힘이 바로 자본주의적 힘이거든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업과 계급만을 고수하면서 평생 살아가고자 하고있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산업의 발전에 장애가 되자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힘이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힘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인도에 잘 침투하길 바래야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파괴의 힘을 자본주의적 관계의 측면에서만 사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관상 자본의 힘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인간들 간의 교류의 증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이 그러한 것을 상당부분 강제해왔고, 그 결과 기존의 관계들이 파괴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인간들 사이의 교류 속에서만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자본은 그런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자본관계는 부정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한 자본관계가 점유하고 있는 인간능력 마저도 부정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자본을 그렇게 해외로 밀어붙이는 힘의 원천 역시도 인간교류의 증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역량의 성숙에서 발견해야 하겠지요. 지금 현재 인도에서 카스트제도를 붕괴시키는 힘이 외관상 자본주의적 세력의 힘일 지언정, 그것을 넘어서는 교류의 힘의 증대가 진정으로 인도의 고전적인 억압관계를 붕괴시킨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본의 지구화를 넘어서는 운동의 지구화 속에서 인도의 고전적 억압의 문제와 함께하려는 움직임은 더욱더 커졌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지점에서 인도의 카스트문제를 봐야하지 않을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맑스가 러시아공동체에 대해 말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러시아공동체자체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서유럽혁명과의 연결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7. 부르주아지들이 공산주의자들이 가족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부인공유제를 주장한다는 것에 대해, 맑스는 현대 부르주아가족이 근거하고 있는 바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신생활과 공인된 매춘이라고 말하면서, 부르주아는 부인을 단지 소유물로서, 생산도구로서 사고하고 있다고, 그리고 부인공유제는 부르주아지의 난잡한 사생활 속에서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내는 공식적 매춘 속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사적소유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사적소유의 폐지를 통해 비공식적인 매춘과 공식적인 매춘을 소멸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관계의 폐지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독신생활과 공인된 매춘으로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폐지를 통해 맑스는 매춘관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지금까지의 정통적 맑스주의의 언어 속에서는 모든 남성우위적 노동자계급운동 속으로 모든 여타운동들이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신사회운동의 출현이후에 많은 운동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의한 운동을 추구하는 분리운동으로, 계급과의 관계단절로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초적 운동들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해야하지만, 그것이 계급문제와의 단절로 나아가서는, 정체성 운동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 관해서는 남성들 자신이 스스로를 자본의 명령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계급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한 위치가 되는, 어떻게 보면 스스로 자본가가 되는 방향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남녀관계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힘입니다. 자본은 남녀관계를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관계는 착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않지만, 불평등한 지배관계는 자본이 보이지 않는 착취(가사노동과 같은)를 가능케하기 때문에 자본은 그러한 관계를 누구보다 선호합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가부장제를 누가 가장 많이 지지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되겠지요. 따라서 마초적인 운동을 지향하는 남성들은 또 다른 자본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분리를 추진하는 정체성 운동들에 대해서도 불가피하게 비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노동운동이 가진 억압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위에서 상당부분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가장 커다란, 모든 사회관계를 자신으로 환원시키는 허리케인 같은 존재가 바로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본과 대결하지 않고는 우리 각자가 놓인 관계(가령 남녀관계)의 해결은 불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이버맑스]라는 책의 1장이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8. 현재의 사적소유의 폐지를 부르주아지는 개인적 소유의 폐지로, 더 나아가서는 개인들의 폐지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맑스는 개인적 소유의 폐지가 아닌 사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실제로 현행의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개인들은 개인들의 대립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지않느냐고 하면서,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해 계급적 차이들을 폐지하고, 각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고 주장합니다.


9. 맑스는 당시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행한 후에 마지막 장에서 각 나라별로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전개합니다. 역시 현실주의적 측면을 볼 수 있겠죠.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정당들과도 결합해야 하고, 합의해야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은 소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되어야 하며, 그리고 결국에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야함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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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자본론 다시 읽기

 

  들어가며

  맑스의 자본론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오늘날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지배형태를 낱낱이 파 해쳐 피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이 지배구조에 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이론적 전략적 기반을 제공해왔다. 반면에 이것이 노동계급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도리어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자본의 전략을 이끌어 내는 보고(寶庫)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자본론은 우리에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본론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고전이니까 재미로 읽어야 할 것인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읽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 읽을 것인가? 우리에게 약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허물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데 이용할 수 있도록, 즉 노동계급의 무기가 되도록 자본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철저히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주) 대표적인 부르주아 이론가인 슘페터는 맑스의 이론과 전략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맑스의 계급간의 투쟁을 자본계급간의 갈등으로 전환하여 역사이론, 자본축적론, 위기론, 계급론 등에 걸친 맑스의 혁명이론을 자본주의 발전이론으로 전환하였다. 이상락, ꡔ정보시대의 노동전략: 슘페터 추종자의 자본 전략을 넘어서ꡕ, 갈무리 출판사, 1999.


  자본론은 역사적 산물이며 또한 맑스도 인간이기에 자본론에도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맑스를 신격화할 필요도 그리고 자본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책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자본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자본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본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추출해내고 부족한 점을 보충할 때에 자본론은 오늘날 계급투쟁에서도 여전히 노동계급에 유용한 전략적 보고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이미 죽은 맑스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더욱 더 무장된 맑스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사회관계로서의 자본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을 물(物)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관계(계급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을 사회관계로 파악하지 않는 한 계급적 입장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인식한 맑스는 자본론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은 물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라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자본론 1권 제1장 상품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이를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물신주의의 폐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의하여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을 사회관계로 규정한 맑스의 다른 경고를 살펴보자.

  “만약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직접적 생산자, 즉 노동자 자신의 소유인 경우에는 그것들은 자본이 아니다. 그것들은 노동자의 착취수단이자 지배수단으로서 봉사하는 그러한 조건하에서만 자본으로 된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하에서만 그는 노예로 된다. 면방적 기계는 면화로 실을 뽑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 하에서만 그것은 자본으로 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떼어낸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금이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며, 또 사탕이 사탕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본은 사회적 생산관계이다. 그것은 역사적 생산관계이다.”  “자본은 물건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관련되는 특정의 사회적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가 물건에 표현되어 이 물건에게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은 물질 즉 생산된 생산수단의 총계가 아니다. 자본은 자본으로 전환된 생산수단인데, 생산수단 그 자체가 자본이 아닌 것은 금 또는 은 자체가 화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은 사회구성원의 일정 분파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생산수단이며, 살아있는 노동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이 노동력과 대립하고 있는 노동력의 생산물이자 활동조건인데, 이것들이 이 대립을 통하여 자본으로 인격화되고 있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들면,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진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맑스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맑스주의자들이 많이 있어 왔다. 대표적인 집단이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은 맑스를 위대한 경제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를 메기고 맑스의 업적을 종래의 정치경제학의 오류를 수정하고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즉 맑스의 자본론은 리카아도의 원리보다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는 맑스를 경제학의 영역에만 한정하고 정치의 영역은 당대의 맑스주의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문제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유하고 여기서 나온 생산성을 당이 주도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자연히 그들은 노동계급의 주도권과는 별도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축적을 분석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불안정성 또는 착취적 성격을 분석하는데 그쳤다. 결국 그들은 혁명 또는 개량에 의한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치유법을 사회주의적 계획과 사유재산의 철폐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맑스에 대한 분석이 경제학에 한정되면 당의 정치적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될 뿐이다. 계급투쟁을 중앙무대에서 밀어내고 생산에 대한 물신숭배는 사회주의를 합리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특정 형태, 즉 임금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맑스의 이론을 자본주의 공장과 그 임금노동자에 관한 이론으로 축소하였으며, 그 결과 ‘노동자계급’은 임금을 받는 산업노동자라는 낡은 정의 역시 그냥 유지되었다. 이러한 이론적 태도는 나머지 사회부문을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외된 대상은 국가와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실업자, 가정, 학교, 보건, 언론, 예술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농민봉기를 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범주에 밀어 넣었으며, 학생운동은 쁘띠부르주아나 룸펜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으며, 여성운동은 묘한 가정적 생산양식의 틀 속에 엮어졌다.


  자본을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사회관계로 파악할 때 진정으로 계급간의 투쟁이 전면에 대두된다. 계급투쟁은 자신의 사회질서를 강제하려는 자본의 노력과 자신의 독자적인 이익을 지키려는 노동계급의 노력, 그 둘 사이의 충돌이다. 투쟁을 초월하는 제3의 객관적인 관점은 없다. 항상 두 개의 관점, 즉 자본의 관점과 노동계급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범주와 현상에 관한 분석을 양면적이어야 하며 계급관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두 관점을 넘어 객관성이 설 곳은 없다. 객관적인 과학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임금을 살펴보자. 임금은 노동자에게는 소득이지만 자본가에게는 비용이다. 자본은 그것의 착취 및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분리를 은폐하기 위하여 임금형태를 사용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이 같은 착취를 공격하기 위해 임금을 사용한다. 임금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며 또한 착취를 보장하는 주요 도구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바로 그러한 분열을 공격하는 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 임금은 투쟁(계급)관계임을 알 수 있다. 임금을 자본의 관점에서 분석하느냐 혹은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하느냐에 따라 전략에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나 기술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 모든 개념도 계급관계로 전환해서 투쟁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부르주아 이론가) 말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회과학 이론을 투쟁의 언어로 전환시킬 수 있으며 또 전환시켜야 한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도 가장 구체적인 계급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

  자본의 사회관계를 계급관계로 설명하더라도 노동계급을 단지 희생물로만 파악한다면 이는 자본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될 것이며 투쟁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진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은 인민을 노동시장으로 내몰고, 인민을 생산과정에 있는 자본을 위해 노동하도록 강요하고, 노동과정에서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만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성만을 심도 있게 간파할 따름이다. 여기에 그친다면 자본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자본의 동학만 설명하게 되어 자본의 자기 잘못을 지적해주는 자본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나 노동을 단지 희생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자본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한 경우가 많다. 특히 맑스는 시초적 축적에 관한 분석에서, 농민들의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축출과 토지를 몰수당한 농민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전환하기 위한 유혈적 입법에 자본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러한 조치에 대해 저항한 투쟁에 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어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전략으로 사용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다.


  맑스주의자들도 노동계급을 희생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노동자의 투쟁보다 자본가의 음모에 편향된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은 공장 독재, 문화적 지배, 그리고 노동계급의 도구화라는 자본의 기제에 몰두하여 진정 적대적인 주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할 정도이다. 제국주의 이론은 국가적인 자본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계를 점령하고, 분할하고, 재분할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종속이론은 개발과 저개발의 계층을 중심으로 자본의 세계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계체제 이론은 자본이 그들 자신의 전체성에 알맞게 이 세계를 만든 것으로 본다. 1980년대 우리 나라의 ‘신식민지 독점자본주의론’이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우리의 시선을 독점자본, 국가, 매판자본, 지주, 자본의 예속 등 자본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자본의 일방적인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는 단지 비도덕적이고, 무정부적이고, 음모적이고, 소외적인 것으로만 파악된다. 자본의 천박함과 혹독함을 계급투쟁에서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사용하더라도 자본에 모든 권능을 부여하는 이론은 단지 자본의 이익을 더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노동계급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의 힘에 편향된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들은 단지 억압에 대해 반항만 하고 혁명을 위해 그들은 지도력을 받아야만 하는 일종의 종속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격을 단편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파악, 그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가르쳐 줄 직업적인 혁명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프랑크프르트학파에서는 직업적 혁명가 대신에 전문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인식하는 유일한 주체는 자본가계급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거의 항상 자본의 발전의 하나의 파생물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이란 일방적으로 자본가 사의의 경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는 실현될 수 없고, 노동계급을 이끌어 줄 메시아나 아니면 자본의 내적 모순에 의해 자연히 붕괴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계급은 자본의 맹공격 앞에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수동적이고 반사적인 희생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그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규정하고, 그들 자신들을 위해 투쟁하고, 단순히 착취에 대항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 자신이 지도력을 갖고 계급투쟁에 공격적이며,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가 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의 계획에 순종하는 소극적인 객체가 아니라 생산의 적극적인 주체이며, 기술, 지식, 창의성, 협동의 보고이다. 노동계급의 힘은 자본주의 발전을 강요하기도 하고 또한 제약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이 기존의 기율, 지도력, 이론 등을 거부하고 새로운 생존형태를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 누구에 의해서도 지배받을 수 없는 주체성, 독자성, 자율성을 발견할 수 있다.*주)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투쟁의 관계에서 사회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자본에 대해 자율적이고, 노동자의 공식조직(노동조합이나 당)으로부터 자율적이며, 특정 노동자 집단이 다른 노동자 집단으로부터 자율적인(예를 들면 남성으로부터 여성),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강조하는 맑스 전통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운동과 사상은 자율주의, 즉 영어로는 Autonomist Marxism, 이탈리아어로는 Autonomia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생산의 동학과 로직을 제공해 준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이란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두 적대적 주체들의 세계에서는 유일한 객관성은 그들의 갈등의 결과일 뿐이다. 물리학에서 두 벡터 힘이 그 둘과는 다른 방향과 양을 지닌 합성력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자본의 발전을 구성하는 계급투쟁에서도 ‘운동법칙’은 대결이 가져온 계획하지 않은 결과이다. 두 주체의 힘의 종합은 전적으로 개방적이어서 그 방향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 방향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투쟁관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직선적인 연속성이란 없으며, 적대를 지닌 각각의 결정적 순간과 서술의 각 도약마다 항상 새로운 서술들을 찾는 탐구 리듬 속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관점들의 다원성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결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적 유물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엥겔스는 맑스의 자본 분석을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를 포함한 전 우주의 보편적 철학체계로 확대하고자 시도했다. 이 세계관은 자본이 자체의 논리를 세계에 강제하는 경향을 이론화한 부르주아 철학의 낙관주의적 계기로 볼 수 있다.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에 의해 결국 모든 사회가 통과해야 하는 엄격하고 단선적인 생산양식의 진행으로 더욱 단순화된다. 생산관계에 의해 씌어진 사슬을 끊어 버리는 힘에 관한 맑스의 말은 어느덧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의 영원한 변혁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노동계급의 고별은 운명론적이지 않고 계급간의 정치적 힘의 문제이다. 투쟁은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다. 전통적인 맑스주의 언어에서 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출현은 항상 ‘이행’의 문제로, 즉 사회주의를 통해 공산주의로 옮아가는 문제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유일한 이행은 혁명적 주체에 의해 자본이 지닌 모든 결정들을 거부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투쟁은 유토피아적인 접근법도 거부한다. 이행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미리 구상된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과소평가하기에 이를 거부해야 한다. 과학적 맑스주의는 현재의 운동을 따라 미래로 나아가며 이러한 운동이 결정성이나 목적론 없이 일어난다. 미래를 구성할 현재의 중심적 운동은 자본의 결정을 전복하고 자기가치증식을 해 나가는 혁명적 주체의 운동이다. 혁명전략은 관념적인 비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개발된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노동계급의 무력함(자본의 헤게모니)과 노동계급의 승리(혁명적 자본폐지) 사이의 인식상의 틈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의식고취’라는 영역으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 속에서 자라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계급의 자율성의 증대로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기반하지 않는 어떤 운동이나 사상도 진정한 노동해방으로 갈 수 없다. 노동계급의 자율적 힘을 인식할 때 탈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는 유일한 경로는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제하는 당이 관리하는 사회주의적 이행질서를 통해 가능하다는 정통 맑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하게 된다.


노동계급의 적대감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적대감에서 읽는다는 것이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로서 규정하지 않고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 사회관계는 적대적 두 주체간의 힘의 관계이다. 이 적대는 자본주의적 생산 및 그것에 상응하는 사회질서가 지닌 해결할 수 없는 한계 및 과정의 동학에 대한 열쇠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계급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본을 흡혈귀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다. “자본은 죽어 있는 노동인데, 이 죽어 있는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이 같은 적대감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기초로 하지 않은 노동계급의 전략은 자본의 전략과 그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조절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노동의 지배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주된 관심은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상대적으로 무시하면서 축적구조를 어떻게 잘 운영하는가에 두어져 있다. 노동과정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국가형태의 조절을 통해 축적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개혁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장기순환에 관한 논쟁에 참여한 만델이나 실버(B. Silver)와 같은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노동가치론과 이윤율 하락의 경향의 법칙을 이론적 기반으로 자본주의 장기순환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자본의 축적과정이 동일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그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제안 속에서 자본의 위기는 해결의 기회로, 즉 자본주의 사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로 등장한다.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인식하지 못하는 맑스주의자들의 분석은 내용상 부르주아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맑스주의자들이 자본론의 분석적 틀과 용어를 이용해서 경기순환을 분석했다는 점뿐이다. 모양은 맑스주의지만 내용은 자본발전의 전략인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노동계급의 적대감에 대한 인식은 노동계급의 전략을 추구하는 밑바탕이 된다.


  적대감을 철저히 인식할 때 자본론에서 변증법적 해석이나 개량주의로 해석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변증법이란 어떤 종류의 대립을 종합적인 통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자본이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자본이란 사회관계에 묶어두는 형식이다. 자본은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항상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관계 내에 묶어 두려고 한다.


  자본의 확장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이지만, 대신 확정할 때마다 해결되어야 하는 적대적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자본이 더욱 고도한 수준의 모순 및 적대로 나아가는 동력이다. 자본이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자본주의 발전에 이용할 때, 자본은 변증법적 관계의 모순적 통일을 강요한다. 자본은 항상 개량주의적인 발전을 추구하며, 이 개량주의는 자본에 노동자측의 비판에 대항하는 보호물을 제공한다. 그러나 관계를 형식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관계가 지닌 본질적인 조건들을 피하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이 적대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대의 토대를 이룬다. 자본은 파괴 이외의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계급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다른 계급을 파괴하고자 하는 계급을 특징짓는 것은 적대의 논리, 분리의 논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대한 적대의 논리, 분리의 논리뿐이다.


노동계급의 이론 구성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한 맑스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지배의 기제를 감지하는 습관을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의 기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해방의 기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본론에서 자본에 대한 설명을 노동에 대한 설명으로 전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의 동학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많이 했으나 노동계급의 주체성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본론의 비판적 재해석을 통해 이러한 맑스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있어왔다. 한 예로 ‘자본의 구성’이라는 맑스의 개념과 관련하여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인식한 1960년 초기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계급구성’이란 개념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맑스의 자본의 기술적 구성, 가치구성, 유기적 구성이란 개념을 통제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통제 가능한 기계로 대체하려는 자본의 한 경향으로 이해하고, 이 개념을 산업생산과정에 있어서의 실질적 변화들과 그것들이 노동계급의 힘이라는 논점과 맺는 관계에 대한 더욱 깊고 더욱 세밀한 분석으로 이끌었다.


  맑스의 연구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서의 상승이 어떻게 상대적 잉여가치의 실현의 수단이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이들은 노동분할이라는 맑스의 연구와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이러한 연구로 노동계급의 구성(계급구성, 정치적 재구성, 탈구성 혹은 구성의 와해)이란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자본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정적이고 수동적인 노동계급이란 의미에 대항하여, 계급구성(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재구성)은 노동계급의 사회화 과정을, 그리고 투쟁 속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밑으로부터 나오는 노동계급의 적대적 경향의 확산, 통일 및 전면화를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노동계급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제공하여 축적을 보장해 주는데 알맞게 사회적 기술적 분할, 문화적 상황, 조직적 형태, 정치적 방향 등을 이용하여 노동계급을 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자본이 부과한 계급구성에 대항하여 이를 침식시킨다. 이러한 변화들을 성취하는 투쟁은 계급관계의 정치적 재구성을 야기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계급 내적 구조의 재구성이며, 그것이 계급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자본은 자신의 지배 메커니즘의 어떤 특정한 배치들의 이러한 극복(노동계급의 정치적 재구성)에 대응하여, 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관계들을 ‘탈구성’하고 그 위에 어떤 새롭고 통제 가능한 계급구성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노동계급의 구성의 변화로 설명하였다. 자본의 순환적 형태의 발전과정을 ‘계급투쟁의 주기’로 분석하였다. 경기순환에서의 하강국면은 노동자들에 의한 정치적 재구성의 시기를 나타내며, 상승국면은 계급적 탈구성의 과정을 포함한다. 자본의 경기순환의 과정을 노동계급의 구성의 변화로 발전시키면서 자본의 이야기에서 노동의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더욱이 정치적 재구성 개념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이론적으로 명료화해 준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정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살펴 볼 수 있게 해주며 투쟁전략을 모색하는데 그 기초가 된다.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노동계급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또 다른 예로 노동계급의 ‘자기가치증식(Self-Valorization)’이란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맑스의 자본의 가치증식이란 개념에서 노동계급의 이야기로 전환한 것이다. 맑스는 인간의 삶을 노동의 일차원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과, 그리고 다측면적 존재를 위한 시공간을 창출하려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여기서 노동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그리고 가치척도로서의 노동시간의 처분가능한 시간으로의 대체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노동에 반대하는 구체적 투쟁에 대한 맑스의 상세한 연구는 이러한 투쟁에 의해 자유로워진 시간을 채우려는 노동자의 시도에 대한 그만큼 상세한 연구는 보충되지 않았다


  이러한 부족 분을 메우기 위해 네그리는 노동계급의 자기가치화라는 개념을 제시했다.*주1) 이 개념은 자본주의 권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지배를 전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거부의 권력의 완전한 잠재력 및 표현을 파악하기 위해 빤지에리, 뜨론띠 등의 연구로부터 발전시킨 것이다. 이는 자본의 가치화(자본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생산적 활동을 종속시키고 변형시키고 활용하는 방식)에서 파생한 노동계급의 소외와 탈가치화를 인식하고 나서(여기까지는 맑스나 맑스주의자들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자기가치화로 나아가는 계급관점의 역전이다. 그러므로 자기가치증식은 자본주의적 가치화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 노동계급의 자기구성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나아가는 자기규정적인, 자기결정적인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자본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한 노동계급의 자기 활동성의 긍정적 내용을 다룰 수 있게 만들었다.


나오며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우리들은 현실문제에 대해 좀더 효율적인 노동계급의 전략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IMF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만약 자본에 초점을 맞춘다면 IMF위기는 단지 이윤율 하락의 경향, 규제장치의 한계, 전세계적인 자본의 경쟁 등의 기준에서 살펴 볼 것이다. 여기서 얻은 처방이란 어려운 상태에 처하게된 민중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자본의 재구조화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한국의 노동계급이 어떻게 이 위기로 몰고 왔는지, 자본은 이 위기를 자본의 발전으로 어떻게 전환하려고 하는지, 발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의 힘을 어떻게 탈구성하려고 하는지, 자본의 공격에 대해 노동계급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지, 노동계급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등 노동계급에 그 초점을 맞출 것이다.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유용한 무기를 제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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