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새로운 문화 읽기와 부르디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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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아비투스 -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ㅣ 나남신서 241
홍성민 지음 / 나남출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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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왜 어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설렁탕을 즐겨 먹는데, 어떤 사람들은 서양식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를 선호하는가? 개인적 취향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개인의 타고난 특징이나 선호가 아닌 다른 요인, 즉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믿을 만한 해답을 얻으려는 고민이 최근 사회학에서 진지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노동자의 푸른 작업복이 경영자의 하얀 셔츠에 대해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왜 노동자의 자식은 다시 푸른 작업복을 입는 노동자로 재생산되는가에 대한 단서를 문화적 차원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문화적 선호와 사회적 지위를 연결시키려는 가장 뛰어난 시도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문화적 상징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연결지점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지속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것으로 전이될 수도 있는 성향의 체계」로 정의되는 아비투스는, 개인의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의 조건에 근거하는 특정한 계급과 관련된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개인의 성향이란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서도 만들어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달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성향은 한편으로는 구조화되어 굳어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구조화를 계속하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계급적 기반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적 성향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과 취향을 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개인의 문화적 자본으로 작용하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때로는 개인의 학업 성취에도 작용하여 문화적 자본을 풍부히 소유한 계급의 자식이 학교에서 보다 높은 성적을 올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높은 보상을 받게 되면 마침내 문화적 차별성은 계급구조의 재생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문화와 사회의 관계를 부르디외와 같은 방식으로 읽어내는 것은 분명 새로운 시각임에 틀림없다. 부르디외가 현대 사회학 연구에 던진 문제의식과 영향은 상당히 크고, 그에 따라 그의 이론을 소개하려는 시도 역시 다양하게 있었다. 그 가운데, 저자의 『문화와 아비투스』는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저서보다도 부르디외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뛰어나다. 저자는 난삽하고 비체계적인 것으로 유명한 부르디외의 모든 저서를 섭렵하여 그 속에 흐르는 일관된 논지를 끄집어 낼뿐만 아니라 이를 아주 쉽고 평이한 언어로 옮기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고 있다. 부르디외의 난해하고 방대한 이론체계를 이렇듯 정리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른 저서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책만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깊이가 얇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사상체계가 구축된 지성사적 맥락은 물론이며 동시대 지식인들의 이론과 비교함으로써 그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비범한 능력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부르디외의 사상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사적 접근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베르그송(그리고 메를로 퐁티)이 부르디외에 미친 영향과 사르트르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이다. 부르디외에게 있어 개인과 문화, 사회를 연결하는 핵심적 개념은 앞에서 지적한 아비투스인데, 아비투스를 통해 개인의 성향이 형성되는 과정은 「개인의 의식 밖에 있는 사회구조가 의식 안으로 침투하고 나면, 과거의 기억을 담지하고 있던 의식의 내부가 이런 외부적 요인에 대해 일정한 가치관을 형성한 뒤 다시 의식 외부로 반작용해 가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식상태는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진행과정이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에 대한 파악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베르그송의 「의식의 흐름」이란 개념에 맞닿아 있는 생각이다. 이처럼 시간의 개념을 단순히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일차원적 인식이 아니라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담는 것으로 인식한 베르그송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서, 부르디외는 개인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전제된 경우에만 행동을 하게 된다는 상황적 인식으로 발전시킨다. 이것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입장에 서서, 개인의 행위가 과거의 상황이나 세계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 사르트르는 물론이며 모든 목적론적, 합리주의적 설명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부르디외의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학자는 맑스이다. 저자는 맑스와 부르디외를 정치학적으로 읽으면서, 맑스의 물신숭배 개념을 부르디외의 상징적 권력과 비교하여 두 사람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찾고 있다. 저자는 두 사람이 모두 인간들 사이의 지배구조를 중심 문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맑스가 객관적 사회분석을 통해 밝힐 수 없었던 부분을 부르디외는 분석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맑스의 물신숭배는 사회적 세력관계에서 비롯된 물질적 지배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나타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부르디외는 이 둘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고 「정치권력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도록 만드는 과정에 문화가 어떻게 개입하면, 그것이 사회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재생산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구조와 의식의 상관관계를 연결하려 했던 맑스와는 대조적으로 의식과 행위를 매개하는 문화를 연구함으로써 맑스의 이론을 보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저자는 이해한다.
물론 저자가 무비판적으로 부르디외를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부르디외의 동시대인인 푸코와 비교하여 부르디외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한 인식으로 생각된다. 특히, 권력 개념에 대한 부르디외와 푸코의 비교는 이 책에서 가장 즐거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비교에서 저자는 푸코의 권력 개념에 대한 부르디외의 문제제기가 가진 허점을 집어내고 오히려 부르디외가 제시한 권력개념의 한계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지나치게 물질적 조건을 강조했다는 것이나 부르디외의 권력 개념에서 중요한 설명변수로 등장하는 인지구조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한 것에는 대부분의 독자가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와 푸코에 관한 저자의 인식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푸코의 역사적 접근이 지닌 장점을 살려 푸코의 생체권력과 부르디외의 상징적 권력이 대립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보완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즉, 푸코의 분석에서 나타난 주체화의 과정이 사회적 주체가 스스로 자아를 형성시켜 가는 점에 주목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이 지닌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두 가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 하나는 부르디외의 문화연구에 대해 갖는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부르디외 읽기에 대해 갖는 문제제기이다. 부르디외의 핵심적인 개념은 그의 저서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파악하듯이 아비투스의 개념이고 이 개념은 저자도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애매하기 그지없는 개념이다.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의 풍부한 의미를 조금 희생시키고 단순화하여 개념의 명료성을 얻고자 한다면, 이 개념은 개인의 실존적 조건(가령, 계급)이 성향을 결정하고, 이 성향에 따라 행동이 일어나며, 그 결과 행동은 하나의 구조로 표현됨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조는 끊임없이 재구조화되는 가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향과 행동이 일단 구조화된 이후 이를 다른 구조를 바꾸어가도록 만드는 동인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많은 기존의 문화연구를 접하면서 가졌던 의문, 즉 어떤 경우에 한 문화구조가 지속성을 갖고 어떤 경우에 변화의 계기를 갖게 되는가를 부르디외를 읽으면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부르디외의 방대하고 난해한 글들을 읽어낸 방식에 대해서는 앞에도 지적했듯이 놀라움과 칭찬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든 생각은 과연 부르디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었다. 부르디외를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학자로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저자의 부르디외 읽기가 가져온 조금의 당혹스러움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자는 일관되게 부르디외를 철학자로 혹은 정치학자로 읽으려고 애썼고,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분명하다. 저자가 왜 부르디외를 이런 식으로 읽으려하는지에 관해서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는 가장 프랑스다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를 프랑스 밖의 상황에서 어떻게 읽어야 그 활용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 듯하다. 「인간 행위의 아비투스적 속성은 개별 사회구성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보편적 담론 속으로 뭉뚱그릴 수 없다」는 염려를 저자는 하고 있고 그 해결책이 프랑스라는 사회의 독특성을 한껏 담고 있는 그의 이론을 프랑스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사회학이 아닌 철학과 정치학의 눈으로 부르디외를 읽어야 했을 것이다.
부르디외를 철학으로 읽든 정치학으로 읽든, 그것이 오독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르디외를 부르디외로, 즉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를 사회학의 눈으로 읽지 않음으로써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할 것이다. 부르디외를 사회학의 눈으로 읽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계급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개인의 일상적 생활에서 아비투스를 통해 문화적 성향을 결정하는 개인의 실존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의 계급적 배경이다. 동시에 개인의 아비투스에서 문화적 성향이 달라짐이 의미를 갖게되는 것도 개인의 문화적 자본이 이것에 의해 결정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자본으로 전화되어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게 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부르디외의 방대한 저서를 섭렵한 저자가 유독 이 문제와 관련된 글들에 대해서만 정당한 관심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는 부르디외를 사회학적으로 읽었을 때 얻었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소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부르디외와 그의 새로운 사회와 문화인식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현재의 한국상황에서 다음 과제는 사회적 민주화와 문화적 민주화일 것이다. 아비투스의 정상화를 통해 문화권력을 폭력으로부터 민주화시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할 새로운 과제이고, 이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