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새로운 문화 읽기와 부르디외 읽기
문화와 아비투스 -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나남신서 241
홍성민 지음 / 나남출판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왜 어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설렁탕을 즐겨 먹는데, 어떤 사람들은 서양식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를 선호하는가? 개인적 취향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개인의 타고난 특징이나 선호가 아닌 다른 요인, 즉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믿을 만한 해답을 얻으려는 고민이 최근 사회학에서 진지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노동자의 푸른 작업복이 경영자의 하얀 셔츠에 대해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왜 노동자의 자식은 다시 푸른 작업복을 입는 노동자로 재생산되는가에 대한 단서를 문화적 차원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문화적 선호와 사회적 지위를 연결시키려는 가장 뛰어난 시도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문화적 상징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연결지점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지속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것으로 전이될 수도 있는 성향의 체계」로 정의되는 아비투스는, 개인의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의 조건에 근거하는 특정한 계급과 관련된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개인의 성향이란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서도 만들어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달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성향은 한편으로는 구조화되어 굳어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구조화를 계속하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계급적 기반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적 성향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과 취향을 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개인의 문화적 자본으로 작용하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때로는 개인의 학업 성취에도 작용하여 문화적 자본을 풍부히 소유한 계급의 자식이 학교에서 보다 높은 성적을 올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높은 보상을 받게 되면 마침내 문화적 차별성은 계급구조의 재생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문화와 사회의 관계를 부르디외와 같은 방식으로 읽어내는 것은 분명 새로운 시각임에 틀림없다. 부르디외가 현대 사회학 연구에 던진 문제의식과 영향은 상당히 크고, 그에 따라 그의 이론을 소개하려는 시도 역시 다양하게 있었다. 그 가운데, 저자의 『문화와 아비투스』는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저서보다도 부르디외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뛰어나다. 저자는 난삽하고 비체계적인 것으로 유명한 부르디외의 모든 저서를 섭렵하여 그 속에 흐르는 일관된 논지를 끄집어 낼뿐만 아니라 이를 아주 쉽고 평이한 언어로 옮기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고 있다. 부르디외의 난해하고 방대한 이론체계를 이렇듯 정리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른 저서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책만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깊이가 얇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사상체계가 구축된 지성사적 맥락은 물론이며 동시대 지식인들의 이론과 비교함으로써 그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비범한 능력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부르디외의 사상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사적 접근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베르그송(그리고 메를로 퐁티)이 부르디외에 미친 영향과 사르트르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이다. 부르디외에게 있어 개인과 문화, 사회를 연결하는 핵심적 개념은 앞에서 지적한 아비투스인데, 아비투스를 통해 개인의 성향이 형성되는 과정은 「개인의 의식 밖에 있는 사회구조가 의식 안으로 침투하고 나면, 과거의 기억을 담지하고 있던 의식의 내부가 이런 외부적 요인에 대해 일정한 가치관을 형성한 뒤 다시 의식 외부로 반작용해 가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식상태는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진행과정이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에 대한 파악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베르그송의 「의식의 흐름」이란 개념에 맞닿아 있는 생각이다. 이처럼 시간의 개념을 단순히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일차원적 인식이 아니라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담는 것으로 인식한 베르그송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서, 부르디외는 개인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전제된 경우에만 행동을 하게 된다는 상황적 인식으로 발전시킨다. 이것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입장에 서서, 개인의 행위가 과거의 상황이나 세계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 사르트르는 물론이며 모든 목적론적, 합리주의적 설명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부르디외의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학자는 맑스이다. 저자는 맑스와 부르디외를 정치학적으로 읽으면서, 맑스의 물신숭배 개념을 부르디외의 상징적 권력과 비교하여 두 사람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찾고 있다. 저자는 두 사람이 모두 인간들 사이의 지배구조를 중심 문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맑스가 객관적 사회분석을 통해 밝힐 수 없었던 부분을 부르디외는 분석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맑스의 물신숭배는 사회적 세력관계에서 비롯된 물질적 지배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나타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부르디외는 이 둘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고 「정치권력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도록 만드는 과정에 문화가 어떻게 개입하면, 그것이 사회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재생산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구조와 의식의 상관관계를 연결하려 했던 맑스와는 대조적으로 의식과 행위를 매개하는 문화를 연구함으로써 맑스의 이론을 보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저자는 이해한다.


  물론 저자가 무비판적으로 부르디외를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부르디외의 동시대인인 푸코와 비교하여 부르디외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한 인식으로 생각된다. 특히, 권력 개념에 대한 부르디외와 푸코의 비교는 이 책에서 가장 즐거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비교에서 저자는 푸코의 권력 개념에 대한 부르디외의 문제제기가 가진 허점을 집어내고 오히려 부르디외가 제시한 권력개념의 한계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지나치게 물질적 조건을 강조했다는 것이나 부르디외의 권력 개념에서 중요한 설명변수로 등장하는 인지구조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한 것에는 대부분의 독자가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와 푸코에 관한 저자의 인식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푸코의 역사적 접근이 지닌 장점을 살려 푸코의 생체권력과 부르디외의 상징적 권력이 대립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보완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즉, 푸코의 분석에서 나타난 주체화의 과정이 사회적 주체가 스스로 자아를 형성시켜 가는 점에 주목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이 지닌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두 가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 하나는 부르디외의 문화연구에 대해 갖는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부르디외 읽기에 대해 갖는 문제제기이다. 부르디외의 핵심적인 개념은 그의 저서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파악하듯이 아비투스의 개념이고 이 개념은 저자도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애매하기 그지없는 개념이다.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의 풍부한 의미를 조금 희생시키고 단순화하여 개념의 명료성을 얻고자 한다면, 이 개념은 개인의 실존적 조건(가령, 계급)이 성향을 결정하고, 이 성향에 따라 행동이 일어나며, 그 결과 행동은 하나의 구조로 표현됨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조는 끊임없이 재구조화되는 가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향과 행동이 일단 구조화된 이후 이를 다른 구조를 바꾸어가도록 만드는 동인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많은 기존의 문화연구를 접하면서 가졌던 의문, 즉 어떤 경우에 한 문화구조가 지속성을 갖고 어떤 경우에 변화의 계기를 갖게 되는가를 부르디외를 읽으면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부르디외의 방대하고 난해한 글들을 읽어낸 방식에 대해서는 앞에도 지적했듯이 놀라움과 칭찬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든 생각은 과연 부르디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었다. 부르디외를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학자로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저자의 부르디외 읽기가 가져온 조금의 당혹스러움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자는 일관되게 부르디외를 철학자로 혹은 정치학자로 읽으려고 애썼고,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분명하다. 저자가 왜 부르디외를 이런 식으로 읽으려하는지에 관해서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는 가장 프랑스다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를 프랑스 밖의 상황에서 어떻게 읽어야 그 활용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 듯하다. 「인간 행위의 아비투스적 속성은 개별 사회구성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보편적 담론 속으로 뭉뚱그릴 수 없다」는 염려를 저자는 하고 있고 그 해결책이 프랑스라는 사회의 독특성을 한껏 담고 있는 그의 이론을 프랑스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사회학이 아닌 철학과 정치학의 눈으로 부르디외를 읽어야 했을 것이다.


  부르디외를 철학으로 읽든 정치학으로 읽든, 그것이 오독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르디외를 부르디외로, 즉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를 사회학의 눈으로 읽지 않음으로써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할 것이다. 부르디외를 사회학의 눈으로 읽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계급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개인의 일상적 생활에서 아비투스를 통해 문화적 성향을 결정하는 개인의 실존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의 계급적 배경이다. 동시에 개인의 아비투스에서 문화적 성향이 달라짐이 의미를 갖게되는 것도 개인의 문화적 자본이 이것에 의해 결정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자본으로 전화되어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게 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부르디외의 방대한 저서를 섭렵한 저자가 유독 이 문제와 관련된 글들에 대해서만 정당한 관심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는 부르디외를 사회학적으로 읽었을 때 얻었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소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부르디외와 그의 새로운 사회와 문화인식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현재의 한국상황에서 다음 과제는 사회적 민주화와 문화적 민주화일 것이다. 아비투스의 정상화를 통해 문화권력을 폭력으로부터 민주화시키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할 새로운 과제이고, 이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새삼 불러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나는 지배받지 않는다
마리아 자이데만 지음, 주정립 옮김 / 푸른나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로자 룩셈부르크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90년대 초반 급작스런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긴장 속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게 된 정치적 원인을 분석하고 있던 필자는 레닌주의 당이론에 대한 세련되고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처음 대면했다. 베른슈타인과의(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의무) 마르크스 수정주의 논쟁(룩셈부르크의 사회개혁이냐 사회혁명이냐), 레닌과의 당이론 논쟁, 스파르타쿠스단,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암살. 이러한 것들이 필자에게 남아있는 로자에 대한 인상이다.
한 혁명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의 사상과 열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를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때론 화려한 이론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이야기들. 강철같게만 보이는 한 혁명가의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 등.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인 ‘나는 지배받지 않는다’는 이제껏 필자가 주목하지 못했던 이러한 점들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핸디캡이라는 핸디캡은 다 가지고 살았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미움받는 유대인이였으며, 가정에서 뜨개질이나 하고 애들이나 키우는 것이 여성의 본분 그리고 천성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정열적인 정치활동을 했으며, 15세 연하인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코스챠 체트킨과 열애했으며, 다리를 절뚝거리는 불구였으며, 왕권신수설을 굳게 신봉하는 빌헬름 2세 치하에서 코뮤니스트였고, 조국 폴란드는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학대받고 있었다.
프로이센 군인들에겐 늙은 갈보라고 불리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혁명이라는 악의 유혹을 퍼뜨리는 갈리시아의 유대인을 추방해야된다고 떠들어대던 독일의 우익 보수언론들의 마녀 사냥식 지탄. 로자의 첫 애인이었고 그녀와 더불어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의 대표자이자 창설자인 레오 요기헤스에게서 받아야 했던 봉건적인 남성 우월주의의 억압. “당신은 고압적이고 노골적으로 지시해대고 있어요. 아돌프하고 이러저러해라. 라브로브를 찾아갈 때는 이러저러하게 처신해라, 이것을 준수해라, 저것을 준수해라, 이것들 모두를 생각하면 불쾌감과 피곤, 허탈, 불안이라는 지울 수 없는 인상만 얻게 되는군요.”
또한 로자는 자유로운 학문적 연구와 활동을 위해서 스위스 쮜리히로 가야만 했다. 1893년 유학시절 쮜리히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날 제3차 총회에서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대표자라는 로자의 자격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심지어 폴란드 사회주의당은 그녀와 레오 요기헤스, 율리한 마르흐레브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이 짜르정권의 비밀경찰 조직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로자는 자신의 대표권을 주장하기 위해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각국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권위에 맞서야 했던 로자.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그녀는 플레하노프의 권위에 단지 순종하여 따르는 것만으로 혁명의 열정을 식히지 않았고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독립을 지키기에 힘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부로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레오 요기헤스가 감옥에서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러나 그녀와 레오 요기헤스는 플레하노프의 비신사적인 비난을 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는 로자와 레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편협되고 옹졸한 평가절하와 비난이 담겨졌다.
자신의 신체적 핸디캡을 감추기 위해 옷입기에도 신경을 써야했던 그녀는 한마디로 당대의 사회모순을 온몸에 떠안아 그것을 넘어서며 살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후 남긴 고백은 이러한 그녀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 이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이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나는 언젠가 증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베른슈타인, 레닌과의 화려한 논쟁의 이면에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삶의 아픔들과 고통이 있었다. 부르주아의 탄압보다 더 힘들게 했던 소위 동지에게서 받은 억압과 오해. 남성우월주의와 봉건적 권위주의 성향이 강한 다소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권력욕과 명예욕에 불타던 혁명가들. 화려한 이론의 뒷 이야기들은 자주 더러운 것들이며, 그것에 의해 그녀는 가장 힘들어하고 고뇌했는지도 모른다.
망명차 머무르던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역시 망명생활을 하던 레닌과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 그녀는 자주 레닌과 만남을 가졌고, 특히 당조직 문제에 있어서 그녀는 이미 레닌과는 무척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자기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문제」에서 레닌의 당이론을 메마른 야경꾼 정신이라 비난했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이후 진행될 볼세비키당의 관료화 독재화를 예견하며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쿠오칼라에서 벌써 레닌과 로자는 분열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혁명과 함께 하기 위한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봉기 역시 실패함으로써 쿠오칼라에서 시작된 레닌과 로자의 분열은 회복할 기회를 완전히 잃게된다. 그리고 실패자인 로자의 사상은 한 동안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녀의 사상이 필자에게 다시 다가오는 것은 승리자 볼셰비키의 패배가 당시 패배자인 로자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해주는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는 승리자의 담론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로자의 사회주의든 레닌의 사회주의든 모두 패배해버린 오늘날의 역사적 국면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과 사상을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해본다.

“양쪽 끝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그녀의 말과 그녀의 운명적인 삶. 로자 룩셈부르크가 걸었던 삶과 혁명활동, 그리고 그녀가 맞이해야 했던 죽음을 보면 몽테뉴가 테르모필레 전투에 남긴 글귀가 떠오른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이 부친 다리우스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정벌하고자 나섰다. 25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바다와 절벽으로 배수진을 치고 싸웠던 7000의 그리스 연합군은 예상외로 잘 맞서 싸웠다. 배신자의 안내로 페르시아군은 절벽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스파르타인 레오니다스는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키고 직속부대인 300 명의 스파르타인과 소수의 군인들만 데리고 최후의 결전을 할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웠고, 전멸했다. 헤로토투스에 의하면 그들은 칼을 놓친 후에는 손과 이로 싸웠다고 한다. 그들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고향으로 보냈으며 그것이 그들의 묘비명으로 남게 되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했던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혔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이들의 죽음은 그리스인들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그 이후 살라미스 전투와 플래테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는 30 년 안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테르모필레(300 인이 전원 전사한 유황온천이 있는 절벽)전투를 떠올리며 몽테뉴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로자가 1916년 12월 그녀의 옥살이를 돕던 마틸데 부름에게 보낸 편지)

로자 룩셈부르크여!
내 이상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이라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이 조건이 되는 그러한 미래사회에 있다면, 그리하여 꼭 그래야 하기에 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려야 한다면, 나도 당신처럼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증오하는 법을 배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증오하지 않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인지?

로자가 활동하였고, 필자가 유학하였던 독일 베를린시에는 해마다 로자가 서거한 날이면 유대인이자 폴란드인인 그녀의 죽음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말을 사는 독일인들에게 로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길래 그들은 그녀를 추모하는 것일까 하고 질문해 보았다. 승리에 필적하는 패배를 거둔 자에 대한 무관심과 우리의 편향된 역사인식이 안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화폐와 허무주의 - 화폐의 권력에 관한 맑스의 이론

 

이진경


1. 가치에서 화폐로

가치론과 관계 속에서 화폐론은 직접적으로는 화폐의 몇 가지 경제적 기능에 대한 요약 이상이 아니다. 한편 가치-화폐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모두 가치-화폐를 내용-형식의 관계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경우 화폐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가치(내용)로 환원될 수 있는 가격(형식)의 문제가 된다. 즉 가치론 안에서 화폐의 문제는 가치에서 가격으로의 전형문제로 된다.*주)

*주) 전형문제는 ① 생산된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일치, ②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의 일치라는 두 개의 총계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스라파(Sraffa)는 표준상품 개념과 생산가격의 방정식을 통해 가격문제를 다룰 수 있는 틀을 제시했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간주되는 모리시마 역시 이 방정식과 표준상품의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계급투쟁의 문제를 표현한다고 간주되었던 이 방정식은 스라파를 잇는 신리카도주의자들에 의해 결국 가치 개념의 폐기라는 역설적 결과로 귀착되고(Steedman), ‘계급투쟁’의 논리는 땅콩가치론의 ‘조롱’으로 변환된다(Bowles and Gintis). 한편, Lipietz는 화폐의 노동등가물 개념을 도입하고, ①을 순생산물의 가치(총부가가치)=순생산물의 가격이라는 명제로 대체하여 해결하려 했지만,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비율로 노동등가물을 정의할 때(즉 ①을 다시 도입할 때) ②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난점에 빠진다. 이에 관해서는 강남훈, 「전형문제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ꡕ, 까치, 1986; 조원희, 「노동가치론의 철학적·이론적 기초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 논쟁ꡕ, 풀빛 참조.

그런데 ‘가치법칙’의 현실적 기능(효과)과는 다른 차원에서, ‘가치론’의 문제는 전형문제의 해결 여부와 무관하게 현실에 대한 별다른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가치론의 가치는 다만 노동가치론이 옳다는 것을 통해 맑스주의가 옳다고 입증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이 맑스주의의 기초라는 고전경제학적 공리를 기각한다면, 반대로 맑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주1) 가치론의 변명과도 같은 궁색한 논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네그리는 이러한 생각을 좀더 격하게 표현한 바 있다. “가치론은 범주적 종합에 관한 이론으로서 혁명의 장에 들어가는데 없어도 괜찮은 고전이고 부르주아적 사기의 유산이다.”*주2)

*주1) 이에 관해서는 이진경, ꡔ맑스주의와 근대성ꡕ(문화과학사, 1997)의 제3장(맑스의 근대 비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참조.

*주2) A. Negri, Marx Beyond Marx, 윤수종 역,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 새길, 1994, 91쪽.

한편 화폐의 문제를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는 한, 화폐의 문제는 가치론으로 환원되고,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적 메커니즘은 사유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된다. 화폐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러한 환원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형식이 내용의 형식화라면, 형식에 대한 검토는 그 안에 형식화된 내용에 대한 검토를 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내용과 형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내용에 대해서만 언급하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것이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이용하는 한 언제나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그러나 ‘변증법’에서도 말하듯이 형식 없는 내용은 있을 수 없다면, 내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용의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가치란 그런 점에서 ‘내용’이라고 말할 때조차도, 그런 형식을 취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이고, 따라서 내용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반면 그것은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은 고유한 표현의 형식을 갖는다. 화폐가 표현형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차원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의 형식)이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약간 부연할 필요가 있다. 가령 어떤 이론의 내용이 계급적 내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해도, 잘 알다시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계급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다. 즉 내용이 계급적일수록, 표현은 계급적이지 않으며, 내용이 이데올로기적일수록 표현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다. 계급적인 내용이 초계급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표현의 형식에 대한 연구는 내용에 대한 연구로 환원되지 않으며, 표현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는 내용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다.*주)

*주) 내용과 표현의 개념이나, 그것의 비환원성에 대해서는 Deleuze/ Guattari, Mille Plateaux, 이진경/권혜원 외 역, ꡔ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ꡕ, 1,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2000, 50쪽 이하와 94-95쪽을 각각 참조.

요컨대 화폐는 단지 가치라는 내용을 표시하는 형식이 아니라, ‘착취의 메커니즘’이고 ‘착취의 표현형식’이다. 착취라는 메커니즘의 표현형식이 화폐라면, 그 내용의 형식은 (잉여)가치 내지 (잉여)노동이다.*주1) 한편, 이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은 착취 내지 잉여노동인데, 이는 생산양식 내지 전유(appropriation) 양식을 구성하는 관계(형식)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화폐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으로서 착취 내지 생산양식에 대해 노동과정과 노동의 체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주2) 착취와 상관적인 표현의 형식에 관해서는 화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화폐는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조직하고 추동하며, 그 안에서 착취 내지 포획이 이루어지는 형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삶의 형식에 대한 질문은 화폐를 경유할 수밖에 없으며, 착취는 화폐와 무관할 수 없다.*주3)

*주1) 자본주의에서 가치란 이미 처음부터 잉여가치다. 소상품생산이라는, 유지되기 힘든 역사적 생산방식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가치’라는 관계(형식)을 취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전혀 다른 배치를 이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모든 노동은 이미 처음부터 잉여노동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가 국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매우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Deleuze/ Guattari, 앞의 책, 2권, 280-282쪽 참조.

*주2) 이진경, 앞의 책, 제5장 참조.

*주3) 이런 점에서 맑스의 ꡔ그룬트리세ꡕ(Grudrisse)가 화폐에 관한 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나, 이를 지적하면서 화폐론의 새로운 중요성을 상기시킨 네그리(A. Negri)의 문제설정은 올바르다. “화폐론에 직접 종속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가치론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같은 책).

다른 한편 루카치(G. Lukcs)는 상품과 화폐를 다루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화’(Verdinglichung)에 관한 ꡔ역사와 계급의식ꡕ의 유명한 장에서 상품과 화폐의 문제를, 노동의 결과를 양화하여 계산가능하게 만드는 형식으로 포착한다. 즉 화폐는 노동이 갖는 질적인 모든 측면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며, 이로써 인간과 노동의 질적인 세계는 양적으로 계산가능하게 된 사물들의 세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주1) 이는 條文(code)에 의해 통제되는 계산가능한 세계로서 근대에 대한 베버의 연구와 ‘화폐의 철학’에 관한 짐멜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특히 짐멜은 생활양식(Der Stil des Lebens)의 차원에서 화폐의 문제를 다루는 훌륭한 선례를 남긴 바 있다.*주2)

*주1) G. Luk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박정호 외 역, ꡔ역사와 계급의식ꡕ, 거름, 1986, 172쪽 이하.

*주2) G. Simmel, Philosophie des Geldes, 조희연 외 역, ꡔ돈의 철학ꡕ, 한길사, 1983. 한편 여기서는 사라져버린,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을 수 있던 시절에 대한 (ꡔ소설의 이론ꡕ에서의) 그리움이, 기술과 예술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cf.하이데거) 그 좋던 시절의 장인적인 노동, 즉 그 본질이 유효하기에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이는 브레이버만 역시 동일하다. H. Braverman, Labor and Monopoly Capital, 강남훈 외 역, ꡔ노동과 독점자본ꡕ, 까치. 이는 짐멜이나 베버는 물론 하이데거나 아도르노도 결코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인데, 루카치는 이를 노동 개념의 철학적 원천인 헤겔에게 맑스의 철학을 되돌리는 전환점으로 삼고 있으며, 노동의 인간학으로 맑스주의를 회귀하게 하는 이론적 전거로 삼고 있다. 물화에 대한 개념으로서 물신성(Fetischismus).

이러한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루카치는 자본뿐만 아니라 상품 형식 자체를 폐기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데, ‘사회주의와 코뮨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 위에서’ 이는 그를 이른바 ‘좌익 공산주의’(Left-Wing communism)의 궁지로 몰아간다. 또한 노동의 인간학과 헤겔주의는 상품과 화폐에 대한 루카치의 분석이 갖는 새로운 측면을 ‘인간주의’라는 구태의연한 도식 안에 다시 밀어 넣는다.

우리의 생각은 화폐란 착취의 표현형식이며, 또한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 자체를 착취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모든 살아있는 활동을 가치화(Verwetung)과정 속으로, 즉 자본의 가치증식(valorization) 과정 속으로 포섭하여 그것이 생산하는 결과를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생산물들을 현실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부정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러한 포섭과 포획을 통한 동질화를 강제하는 화폐적 등식을 통해, 일종의 초월적 권력을 장악하고 작동시키며, 그와 반하는 현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는 허무주의적 메커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표현형식으로서 화폐가 초월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통해 착취와 포획을 수행하는 한편, 포섭된 내부에 대해서는 동질화하는 권력의지를 작용시키고, 배제된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의 권력을 작용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화폐적 메커니즘을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식의 도식에서 출발하여,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nihilism)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허무주의’란 화폐적 등식으로 표시되는 ‘가치형태’의 의미와 효과를 뜻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등식과 상품과 노동이 계열화될 때 ‘철학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고, 이 등식과 자본이 계열화될 때 경제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이 등식을 국가나 시장과 관련하여 검토할 때 근대 사회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새로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등식을 국제통화의 문제로 확장할 때 세계체제 내지 세계경제의 문제에 접근할 또 다른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등식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 혹은 자본에 반하는 운동 내지 혁명의 문제를 새로이 포착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가치형태: 화폐화의 논리

알다시피 ꡔ자본ꡕ의 첫 장은 상품의 가치형태에 대한 유명한 도식들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화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상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다. 먼저, ① 단순한 가치형태는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xA=yB)
라는 도식으로 표시된다. 여기에서 좌변의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 우변의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즉 상품 A는 자신의 가치를 상품 B의 사용가치를 통해서 표현한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고 그것의 표현을 위해 이용되는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여기서 A는 B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능동적’ 역할을 하며, B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주1) 이 관계는 등가적이므로 서로 반대의 역할을 할당할 수 있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등호의 좌우변을 바꾸어야 한다. 즉 등호의 좌변은 주어고, 우변은 서술어며, 등호는 ‘is'라는 동사인 것이다.*주2) 가치형태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맑스가 말할 때, 그것의 요체는 어떤 상품의 가치가 반대편의 등가물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치란 등가형태를 통해 정의되며, 등가형태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1) K. Marx, Das Kapital, Bd. I, 김수행 역, ꡔ자본론ꡕ, 상, 비봉출판사, 1989, 60쪽.

*주2) 이는 포르-루아얄(Port-Royale) 논리학에서 동사의 이론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양의 언어에서지만) 모든 문장은 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동사는 tre (be; sein)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ꡔ말과 사물ꡕ, 민음사). 여기서 tre 동사는 등호(=)의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② 전개된 가치형태.



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외연적 확장이다. 이는 등가형태의 추가를 통해서 상품 B의 가치가 특정한 하나의 등가형태로부터 탈영토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제 다양한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 상품 A의 가치는 그 자신의 특정한 사용가치와 무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가치는 다른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는 능력(잠재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전개된 가치형태는 우변의 항들 간에 교환을 보장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가 성립하는가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만일 라면 이 전체 등식은 A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즉 A의 가치는 우변의 사용가치들로부터 완전히 탈영토화되지 못한 것이고, 가치는 일반적인 교환가능성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 교환가능성으로서 가치가 정의되기 위해서는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일반화된 가치형태로의 변환이 필요하게 된다. 맑스가 말하는 ③ 일반화된 가치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화된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이 특정한 하나의 상품 E를 통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공통적으로 표현한다. 상품 E는 일반적인 등가형태다. 여기서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달리 E를 통해 좌변의 모든 상품들 상호간에 일정한 등식이 언제나 성립한다. 다시 말해 ‘단일한 등가형태로 등가형태를 일반화함으로써’,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 때 일반적 등가형태를 이루는 좌변의 상품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만드는 가치관계를 통해 등가형태의 일의성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배제는 인위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다만 자신의 가치형태를 표현할 등가형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E가 좌변의 상품세계 안에 온다고 해도, 맑스 말대로 ‘z량의 상품 E = z량의 상품 E’는 단순한 동어반복일 뿐이며, 여기서 좌변은 상대적 가치형태가 아니고, 우변 역시 등가형태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며 그런 만큼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 등가형태로 작용하는 E 역시 ‘하나의 상품인 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는 시장상황에 따라 등가형태로서 자신의 일반성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동요하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품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배제하여, 상품과는 다른 것으로 위치짓고 상품 아닌 것으로 작용하게 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완성된다.
알다시피 ④ 화폐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 등가형태의 자리에 상품이 아닌, 그러나 상품의 가치를 표현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들어설 때 화폐형태가 성립한다. 화폐 G는 교환비율의 시장상황과 무관하게 일의적인 등가형태로 기능하며, 이로써 상품들은 하나의 단일한 척도와 규칙을 통해 안정적으로 질서지워진 단일한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화폐는 단지 상품교환의 등식이 확대되고 나열되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으며, 다양한 상품들이 어떤 일반적인 등가형태를 통해 일반화되는 것만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된 어떤 요소를 인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이전의 형태와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이제 좌변과 우변은 능동과 수동의 역할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상품 간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화폐가 아닌 상품과 상품이 아닌 화폐라는 이질적인 두 항 사이의 ‘불가역적 관계’를 표시한다. 이전의 가치형태와 단절을 만드는 이러한 불가역성은 국가장치 내지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

반복하건대, 화폐는 상품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며, 상품세계의 ‘외부’이다. 다시 말해 화폐는 상품세계의 외부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상품 세계의 내부에 있다가 ‘배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품세계에 일의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상품세계의 외부, 시장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국가장치가 바로 그 외부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화폐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와 같은 기능적 차이뿐만 아니라 이처럼 발생적 차이를 포함하는 명제다.

화폐형태 아래서 중요한 역전이 나타난다. 등가형태로서 화폐는, 좌변에 있는 상품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폐형태가 확립되면, 화폐라는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만이, 다시 말해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는 것만이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상품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화폐와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여했어도 상품이 아니며, 가치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은 화폐를 통해서 ‘상품화’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치는 화폐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라는 등가물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가치란 가치화(Verwertung)를 통해서, 화폐와의 등가성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3. 화폐와 허무주의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태의 도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폐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좌변에 있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상품들을 ‘하나로 묶고 통합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니 어떤 생산물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화폐와 등가관계를 취해야 한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물은 화폐를 통해 상품세계 안으로 들어가며, 화폐는 그 상품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세계로 통합한다. 가치의 유혹을 통해 생산물들을 상품세계로 끌어들이고 그 세계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통합자로서 화폐.

또한 화폐는 이제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로서 나타난다. 생산물들에게 상품세계의 회원증을 나누어주는, 아니 가치를 분배하는 초월적 지배자로서 화폐. 이것을 통해서만 어떤 생산물도 상품이 된다는 점에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이다.

초월자로서 화폐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정의되는 이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가치가 ‘화폐적 가치로 동질화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생산물은 어떤 것도 화폐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화폐와 교환가능한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에서는 존재이유(raison d'tre)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생산물이 계속하여 생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폐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 그런 ‘가치’를 갖는 생산물은 점차 소멸의 길을 밟게 되고, 화폐로 환원가능한 가치만이 살아남게 된다.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것은 화폐적인 가치로 동질화된다. 화폐로 표상/대표되는 가치의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초월적 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화폐형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가치는 오직 화폐일 뿐이다. 동질화하고 획일화하는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는 화폐화의 강박을 만들어낸다. 이제 상품이라고 불리고자 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비상품으로서 화폐를, 상품세계의 피안에 있는 저 초월적 가치인 화폐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치환하고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욕망한다. 각각의 생산물이 갖고 있는 고유한, 종종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가치는 초월적 존재로서 화폐의 화려한 금빛 광채 앞에서 자신의 빛을 잃어버리고, 그 금빛 광채로 자신의 신체를 둘러싸고자 하게 된다. 생산물의 특이적인 ‘가치’의 초월적 피안으로서 화폐와 그것을 통해 부정되는 차안으로서 ‘가치’들. 생산물들의 현재적인(현세적인) 능력의 부정과, 단지 장래의 교환가능성을 뜻할 뿐인 미래적인(비현세적인) 능력의 찬양. 결국 화폐가 대표하는 가치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은 ‘생산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의 부정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 피안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선망과 찬양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다.

화폐적 허무주의는 모든 가치의 화폐적 획일화, 모든 능력의 화폐적 동질화, 모든 관계의 화폐적 단일화를 작동시킨다. 화폐화되지 않는 어떤 질이나 성질, 특성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존재이유를 상실해간다. 가령 파종되는 씨앗들은 오직 화폐로 치환가능한 비율을 기준으로 하게되며, 그 비율이 큰 품종으로 점차 축소되고 획일화된다. 연구하는 지식들은 화폐화되기 쉬운 것으로 수렴하며,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것도 특별한 조건이 없으면 생산되거나 생존하지 못하게 된다.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점차 제거하고 축소하며 ‘부정’한다.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상품들 간의 관계로 변형되는 것이 상품관계의 특징이다. 이러한 관계는 화폐를 통해서 상품의 가치가, 결코 가치를 갖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 대상(화폐)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맑스는 ‘물신주의’라고 했다. 이는 화폐로 하여금 동질적인 가치공간을 형성하게 하는 권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제거할 능력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주의는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가치화된 활동이고, 가치화하는 과정에 기여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구매된 노동이고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주) 이런 점에서 가치화는 (잉여)가치증식이다. 그렇지 않은 활동, 그렇지 못한 ‘노동’은 무가치하며,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활동이요 소모적인 행동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짓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의자를 수리하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운전을 하는 행동 등등. 이런 점에서 노동력이 상품화되는, 다시 말해 노동력이 화폐적 표현형식을 통해 가치를 갖게 되는 양상을 우리는 앞서와 유사한 화폐형태의 도식으로 표시할 수 있다.

*주) 맑스는 이를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한 스미스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서 분명하게 한 바 있다. K. Marx, Theorien über Mehrwert, Bd.1, ꡔ잉여가치학설사ꡕ, 1권, 아침, 1989, 165쪽 이하 참조.



이제 생산적 활동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화폐가 통합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외적이고 초월적 가치의 자리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이 도식은 보여준다. 모든 활동은 그것이 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활동도 가치가 없다.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서 화폐화될 수 없는 활동은, 아니 다른 것보다 화폐화되기 어려운 활동은 점차 소멸과 종말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화폐화될 수 없는 생산물, 화폐화 되기 힘든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4. 화폐와 자본주의

어떠한 상품이나 생산물도 화폐의 이러한 가치 승인을 통해서만 그 가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치법칙이란 이러한 화폐적 승인의 소급적 과정을 통해 거꾸로 노동과 생산, 투자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다. 다시 말해 가치법칙은 가치화(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노동이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고, 모든 것을 화폐적 가치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이며,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활동들을 의미 있게/의미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요컨대 가치법칙이란 화폐적 세계의 허무주의가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배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와 화폐를 통한 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맑스의 다음 도식에 집약되어 있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해지고, 반대로 화폐를 통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생산능력으로서 노동력을 생산의 조건인 생산수단과 분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폐는, 혹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수한 종류의 화폐로서 자본은 능력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는 부정의 권력의지를 작동시킨다.

노동력은 화폐적 등가물을 통해서만 가치를 승인받고 유효한 생산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품이 됨으로써 화폐적 질서 안에, 화폐가 통치하고 통제하는 질서 안에 통합되며, 화폐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질서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이제는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만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화폐화할 수 없는 활동이나 능력은 생산적이지 못한 노동이요 비노동이 되며, 사회적으로 승인될 수 없는 노동이다. 승인 받지 못할 노동은 부재해야 하며 소멸해야 한다.

여기서 화폐는 노동이 가능한 지대를 구획함으로써 이전의 생산의 공동체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과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지극히 포괄적인 ‘공동체’지만, 또한 그런 한에서만 받아들이는 지극히 배타적인 ‘공동체’다.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자본주의에서, 그 가치를 승인받을 수 없는 활동을 하는 자, 혹은 일자리를 잃고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자라면, 누구든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그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진경,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 ꡔ진보평론ꡕ, 창간호, 1999년 가을 참조.

요컨대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할 수 없는 자는 ‘인간’의 대열에서 배제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 된다.*주)

*주) 노동력의 상품화는 생산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하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화폐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 자체를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를 통해 동질화하는 과정이며, 생산적 능력 자체를 하나의 단일한 가치를 통해 측정하는 과정이며, 그럼으로써 화폐화될 수 없는 한, 생산적인 어떤 능력도 무능력으로 간주하는 과정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생산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화폐화하는 능력이며, 생산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화폐화하는 활동이다. 이제 생산하는 활동보다 차라리 그것을 판매하고 화폐화하는 활동이 더 중요해지고(농부와 유통중개상의 관계, 상업 내지 유통활동의 위상), 지적 활동보다 그것을 팔 수 있는 정치적 활동이 중요해지고, 예술적 활동보다 그것을 비싼 값에 화폐화할 수 있는 경영적 활동(매니저와 매니지)이 중요해진다.

능동적인 힘으로서 생산적인 힘, 욕망을 그것이 현재화할 수 있는 조건인 생산수단에서 분리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이라면, 생산적인 긍정적 의지를, 생산의 조건을 장악한 자본의 의지(부정의 권력의지!)로 대신함으로써 이제 능동적 힘은 부정의 권력의지 아래 생산적 힘으로 행사된다. 이를 니체는 ‘반동적 생성’이라고 불렀다.*주)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생산적 힘, 생성능력을, 생산조건 내지 화폐를 소유한 부르주아지의 의지와 목적에 제공함으로써 자본의 증식을 의미할 뿐인 반동적 생성에 봉사한다. 맑스가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부른 과정은 이 반동적 생성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허무주의화하는 힘으로서 화폐의 증식이라는 점에서 허무주의적 메커니즘 안에 있는 것이다.

*주) 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범순 외 역, ꡔ니체, 철학의 주사위ꡕ, 인간사랑, 1993, 116쪽 이하; 고병권,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1997, 82쪽 참조.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다. 즉 잉여노동이 가치의 형태로 자본으로 포획되는 과정이 바로 축적과정이다. 따라서 축적이란 현세적 활동이 화폐의 초월적 세계를 증식시키는 과정이고, 그에 따라 화폐적 가치의 독립성과 초월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며, 그런 만큼 현세적 활동이 위축되고 축소되는 과정이다. 맑스가 말한 ‘소외’라는 말은 이러한 ‘화폐적 허무주의화(nihilization) 과정’의 다른 표현이다.

종종 공황이라고 번역되는 위기(Krise)는 승인받지 못한 상품들의 가치가 실제적으로 무효화되는 과정(Entwertungsprozeß)이고, 그에 따라 그 상품들의 가치가 잠식되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화폐적 세계가 승인ㅈ할 수 있는 크기에 의해 가치가 재평가되는 폭력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가치법칙이 생산활동 자체에 반작용하는 소급적인 과정이며, 그런 만큼 초월적인 화폐적 가치가 잠재적 가치의 세계에 관여하여 조정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능동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파괴와 탈가치화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생산의 세계에 대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주)

*주) ‘유예된 소비’로서 저축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정의 역시 이러한 허무주의적 場 안에 있다. 화폐적 축적을 위한, 소비의 무한한 연기로서, 소비에 대한, 아니 사실은 생활에 대한 평가절하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이다.

5. 화폐와 사회

상품가치의 화폐형태 도식이 보여주듯이, 화폐는 다양한 상품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질적인 면에서 각각의 상품이 갖는 이질적인 특징들은 화폐의 끈을 통해 하나의 질서로 묶인다. 즉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가치를 등가물에 양도하고 그것을 통해 대의(代議)하는 상품들과, 그러한 위임을 통해 상품의 가치를 대표/표상하는 대표로서 화폐. 요컨대 상품들의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이다.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그 설명의 논리에서나, 작동의 논리에서나 근대인과 근대 국가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설명의 논리에서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척도적 역할을 위임하고 부여하는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은 화폐의 탄생을 설명한다. 마치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정확하게 동형적이다. 또한 이러한 설명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초월적인 권력을 갖는 화폐에 의해 상품세계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치론적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양상 역시 국가적 권력과 인민간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러한 화폐의 초월적 위상과 통합적 기능을 전제하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질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자동적인 조절의 메커니즘으로 나타나는 시장은, 초월적인 외부의 배제를 통해 가능한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개입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 즉 이미 자동화된 메커니즘 안에 초월적인 제3항으로서, 통합 및 통제를 수행할 전제적 위치를 점유한 화폐의 항상적 개입을 통해 시장은 작동한다. 또한 그것은 화폐의 그러한 기능을 정의하고 보증하며 강제하는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이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국가의 기능이란 바로 ‘화폐적 통합과 통제를 보증하는 국가의 개입’인 것이고, ‘화폐를 통한 국가의 개입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강제와 폭력의 메커니즘’이라고 하겠다.

모든 가치의 승인으로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모든 가치를 단일한 가치로 동질화하는 조건으로서 화폐를 전제하며, 화폐를 통해 작동한다. 자유주의의 조건으로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란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에 따르는 비용에 대한 책임이며, 결국은 그러한 계산을 자유의 전제라는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계산하며 효율적 최적점을 찾는 공리주의적 인간을 전제한다.*주) 이러한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이 모두 화폐로 환원되는 것이란 점은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레세 페르’(Laissez faire!)를 외치는 자유주의자의 호기(豪氣)는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의 형식을 통해 항상-이미 작용하고 있는 화폐의 권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며, 결국은 화폐의 메커니즘, 화폐의 권력에 맡겨두라는 언명인 셈이다.

*주) 결국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화폐와 계산을 통해 하나의 단일한 계열로 수렴한다.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경제 개념에서 공리주의적 인간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H. Arendt, The Conditions of Human, 이진우 외 역, ꡔ인간의 조건ꡕ, 한길사, 1997, 94쪽 이하 참조.

6. 화폐와 세계자본주의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국제경제적 통합 메커니즘에 대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 체제의 주도권의 변화는 다른 ‘화폐상품’들의 척도가 되었던 이른바 국제통화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변화된 제국주의 나라 간의 역관계와 상응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제국주의 나라의 헤게모니와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국제통화는 제국주의의 헤게모니 내지 통합의 경제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국가의 화폐가 갖는 통합 및 포섭의 권력이 각국의 자본주의를 하나로 묶고 통합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영국 제국주의의 지배시기에 스털링 체제나, 미국 제국주의 지배시기에 달러 체제가 그러한 사례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맑스의 도식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듯이 어떤 나라의 화폐가 국제 경제 내지 무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국의 통화 M이라는 ‘등가형태’를 통해야 한다. 여기서 국제통화로 기능하는 헤게모니국의 화폐는 상품세계를 통합하고 조직하는 화폐의 기능을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화폐가 상품에 대해 갖는 권력과 통합력을 국제경제에서는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행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가 갖는 사회적 통합의 기능 역시 그것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국 자본주의는 국제통화의 일의적 지배 내지 통합 체제 아래 복속되고 포섭되는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일차적 단위는 국제경제인가? 알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이전의 ‘화폐형태’와 ‘국제화폐 형태’ 간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이전의 화폐형태와 달리 화폐상품과 국제통화 간의 이러한 관계에서 첫째, 국제 통화인 M은 각국의 ‘화폐세계’에서 배제된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다. 즉 국제화폐는 화폐상품의 일부다. 다시 말해 상품과 달리 스스로 가치를 갖지 않았던 화폐와 달리, ‘화폐세계’의 일부로서 ‘가치를 가지며’ 그런 만큼 자국내 경제여건에 따라 변화된다는 점에서 불안정한 척도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자국 내에서 상품 ‘가치’의 표현자인 한,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같은 표현력의 가변성을 피할 수 없는 한, 가치를 갖지 않는 상품세계의 외부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화폐적 통합의 안정성은 확보할 수 없다.

둘째, 국제화폐에 의해 묶이는 각국 화폐, 즉 화폐상품들은 이미 각국 내에서 상품세계를 질서지우고 통합하며,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강제적이고 제도적인 화폐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예컨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경우처럼 국제화폐에 의해 경계지워진 화폐세계에서 배제되는 경우에도 자국 내에서는 화폐로서 여전히 기능한다는 점에서, 화폐화되지 못하면 파괴되고 소멸되는 상품과 달리 독립성을 갖는다. 이는 헤게모니국의 화폐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존재가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국적 화폐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이는 통합된 화폐세계에서 일국적 단위의 독립성과 일차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셋째, 일국에서 화폐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했던 국가가 있었던 것과 달리 국제경제에서 국제통화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하는 것은 국제적 국가가 아니라 헤게모니국 자신의 힘과 능력이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적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과 능력이 약화된다면, 다른 경쟁국에 의해 통합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화를 대체하려는 경쟁이 항상적으로 잠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품-화폐의 관계와 또 다른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의 또 하나의 요인이며, 국제적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일국적 자본주의가 독립성과 일차성을 갖는 또 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위기는 이러한 국제통화가 갖는 안정성의 동요 내지 변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통화를 포함하여 각국 통화가 국제통화를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국제적인 환투기는 국제화폐 자체가 화폐상품이라는 사실, 투기대상이 되는 국제통화의 가치표현능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 등에 기인한다. 이러한 투기로 인해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되며, 이는 국제적인 경제관계는 물론 일국적인 차원에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국지적인 국제화폐가 발생하고 기능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 국의 지배체제와 갈등 속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EC에서 ‘유로’라는 새로운 통화체제를 만들려는 집요한 노력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7. 화폐와 코뮨주의

이상에서 본 것처럼 지배적 가치형태로 자립한 이래,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그것이 결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이래 화폐는 생산물을 질서지우는 초월적 기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이나 사람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척도였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공동체를 대체하고 대신하여 사람들의 결합과 통합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었다. 화폐는 “모든 것을 냉정한 계산의 찬물 속에 집어넣는다”는 맑스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폐화된 관계는 화폐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넣는다. 이를 사회적 관계에서 허무주의라고, 혹은 허무주의적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코뮨주의란 이런 관계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고, 그런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제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경제주의적 정의를 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공산당 선언」)으로서, ‘현실적 이행운동 그 자체’(ꡔ독일 이데올로기ꡕ)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코뮨주의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초월적 가치, 초월적 권력에 대한 비판이요, 그것이 야기하는 허무주의의 초극으로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코뮨적 관계에 대한 꿈으로서 코뮨주의.

한편 자유와 평등에 대한 등가적 관념, 교환에 대한 등가적 관념, 관계의 공평성에 대한 등가적 관념은 모두 앞서 말한 화폐적 질서 안에 있다. 예를 들어 평등한 교환은 가치가 동일한 물건의 교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비화폐적 교환, 비화폐적인 관계는 모두 공허한 환상이요 몽상일 뿐이다. 그런데 흔히 현실성의 이름으로 비판하듯이, 이 화폐적 척도는 과연 넘어설 수 없는 것인가?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 내지 척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활동이 교환되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잘 알다시피, 이전에 맑스는 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가변성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화폐 내지 화폐적 관계는 어떠한가? 소유를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맑스주의자들조차도, 상품이나 화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화폐적 관계의 폐기가 소유관계의 폐기보다도 곤란하고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코뮨주의는 화폐적 관계의 초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이른바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대한 기존의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 관념을 넘어서서, 코뮨주의를 현재성의 시제를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재정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레닌 이후 거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그랬지만,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 경제를 규제하는 원리로서 존립하는 한, 그것을 통해 사회주의를 넘어서 코뮨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치법칙과 화폐관계는 코뮨주의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전혀 내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행의 계기, 그것은 바로 가치법칙과 화폐관계에 반하는 투쟁, 화폐의 비자본주의적 사용, 비화폐적 관계의 확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코뮨주의란 바로 이처럼 화폐에 반하고 가치법칙에 반하여 사람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운동 그 자체가 아닐까? 화폐와 무관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가치법칙에 반하여, 화폐에 반하여 새로운 사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가 바로 코뮨주의가 아닐까?*주)

*주) 역으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만 유의미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선형적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순진한 공상성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마치 루카치가 그랬듯이.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그 안에 내재하는 외부로서 코뮨적 조직과 코뮨적 관계로서 코뮨주의는 가치법칙을 벗어나려는 현실적 이행운동을 통해서만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맑스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자본>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자본 읽기>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자본>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초고>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1844년 초고>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공산당 선언] 이 제기하는 문제

0. 이 텍스트의 제목은 [공산주의당 선언] 입니다. 흔히는 [공산당 선언]으로 얘기가 되기도 하고, ‘당’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이야기하고 하죠. 또는 [공산주의 선언]으로 말하기도 하고. 그런데, 맑스가 글의 서두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당이라는 실체를 부여해주고자 하는 의미로 이 글을 쓰고 있기에 우리는 공산주의당 선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당시 맑스가 ‘당 PARTY'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당‘에 대한 관념은 맑스 사후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파티라는 말은 사실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일 텐데, 그 당시 맑스는 그러한 말을 공산주의적 의견을 가진 모든 부분들, 모임들에게 붙여주고 싶었던 거 같구요. 그래서 맑스 당시의 당이라는 표현과 현재의 당에 대한 우리의 관념 간에는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1. 저작선집에서 다루어진 첫번째 서문인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맑스는 [선언]에서 개선될 부분을 몇 가지를 얘기합니다. 특히 2절 뒤에 실린 혁명적 방책들이 시대적 변화 속에서 낡았음을 말합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고 있는데, 대공업의 엄청난 발전과 이와 함께 전진된 노동자 계급의 당 조직, 그리고 빠리꼬뮌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동시킬 수는 없다"는 것.


세 번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 같은데요.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의미없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좀더 정확한 의도 즉 국가소멸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인 그룹이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당시, 즉 맑스가 서문을 쓸 당시에 맑스가 강조하고자 했던 정치적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향후에 고찰해봐야 할 것.


어쨌든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맑스의 전략의 중요한 부분은 어쨌든 당시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정향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될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맑스의 정치학의 주요한 측면 중의 하나를 저는 현실주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맑스 자신도 누차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죠. 현실적인 조건에서 혁명으로 향해가는 도정에서, 국민국가들의 본격적인 형성기에 맑스가 취할 수 있는 혁명전략의 상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국가들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방점이 취해졌다는 것, 그것인 바로 인터내셔날(INTER-NATIONAL 간 - 국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본문상에서도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상 처음에는 일국적일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끝장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와서 문제가 되는 그러한 부분을 사고할 때 중요한 건 다시금 "현실주의"라고 생각이 드네요. 현실적 조건 속에서 맑스의 사고를 재평가하고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겠죠. 현재의 일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해야 하는 자본의 힘이 단지 일국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일국적 관점을 채택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운동을 전개해야만 하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들 속에서 맑스 사유의 낡은 부분과 새롭게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 가려질 것이니깐요.


2.  1882년 러시아어판 제2판 서문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지적된 것은, 맑스가 그 동안 간과해왔던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인정입니다. 러시아의 오브쉬치나라고 불리는 공산주의적 공동점유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인가를 맑스는 묻고 있습니다. 즉 서구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해체과정으로 나아갈 것으로 이 공동체를 사고해야 할 것인지, 즉 해체될 낡은 관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힘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겠죠. 그러나 중요한 점은 맑스가 이러한 공동체 문제를 고립적으로 러시아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것은 아니고, 서유럽의 혁명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로 사고하면서 양자가 서로 연결된다면 러시아의 공동체적 관계는 공산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맑스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간략히 말하면 1847년에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운동이었고, 공산주의 운동은 노동자운동을 의미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 게급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를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공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 외부에서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네요.  


4. 지배계급이 자신의 반대자로 낙인찍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자본주의와 관계 속에서 그러한 세력이 처한 조건과 힘을 구체화시켜주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5.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이다라는 말로 본문은 시작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너무나도 중요한데, 많은 역사서들은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를 그리기보다는 승리자의 역사로, 자본 주체성의 역사로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렇다면 계급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맑스의 계급개념은 사회학적인 실체적이고, 계량적인 계급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사회를 수량화하고 계량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범주화를 시도하면서, 실제로는 끊임없는 실천의 관계에 놓인 것을 정태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사회학적인 계급개념인데요,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은 계급을 역사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상대되는 계급개념을 우리는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계급이라는 말을, 경험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소재와 의식의 측면 모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며 외관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합하는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나는 계급이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계급을 ‘구조’나 심지어 ‘범주’로서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happen)하는(그리고 발생해온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더욱이 계급 개념은 역사적 관계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다른 어떠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계급은, 만약 우리가 어떤 주어진 시기에 그것을 정지시켜놓고 그 구조를 해부하고자 한다면 분석망을 빠져나가는 유동적인 어떤 것(a fluency)이다.
… 만약 우리가 어떤 주어진 시기에 역사를 정지시켜놓는다면, 거기에는 계급은 없고 단지 다양한 경험을 지닌 수많은 개인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변화가 진행되는 적당한 기간에 걸쳐 이 사람들을 관찰하면 우리는 그들의 관계와  관념 그리고 제도에서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계급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며 이것이 바로 계급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정의이다.”


6. 맑스와 엥겔스는 이 글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서문에서도, 그리고 본문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은 인간을 과거의 봉건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주었지만, 그러한 자유는 오직 상업적인 자유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은 종결되겠지요.


현대에도 그러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역할이 일부지역에서는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것은 인도의 경우인데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가장 강력하게 붕괴시키고 있는 힘이 바로 자본주의적 힘이거든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업과 계급만을 고수하면서 평생 살아가고자 하고있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산업의 발전에 장애가 되자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힘이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힘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인도에 잘 침투하길 바래야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파괴의 힘을 자본주의적 관계의 측면에서만 사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관상 자본의 힘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인간들 간의 교류의 증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이 그러한 것을 상당부분 강제해왔고, 그 결과 기존의 관계들이 파괴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인간들 사이의 교류 속에서만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자본은 그런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자본관계는 부정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한 자본관계가 점유하고 있는 인간능력 마저도 부정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자본을 그렇게 해외로 밀어붙이는 힘의 원천 역시도 인간교류의 증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역량의 성숙에서 발견해야 하겠지요. 지금 현재 인도에서 카스트제도를 붕괴시키는 힘이 외관상 자본주의적 세력의 힘일 지언정, 그것을 넘어서는 교류의 힘의 증대가 진정으로 인도의 고전적인 억압관계를 붕괴시킨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본의 지구화를 넘어서는 운동의 지구화 속에서 인도의 고전적 억압의 문제와 함께하려는 움직임은 더욱더 커졌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지점에서 인도의 카스트문제를 봐야하지 않을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맑스가 러시아공동체에 대해 말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러시아공동체자체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서유럽혁명과의 연결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7. 부르주아지들이 공산주의자들이 가족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부인공유제를 주장한다는 것에 대해, 맑스는 현대 부르주아가족이 근거하고 있는 바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신생활과 공인된 매춘이라고 말하면서, 부르주아는 부인을 단지 소유물로서, 생산도구로서 사고하고 있다고, 그리고 부인공유제는 부르주아지의 난잡한 사생활 속에서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내는 공식적 매춘 속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사적소유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사적소유의 폐지를 통해 비공식적인 매춘과 공식적인 매춘을 소멸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관계의 폐지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독신생활과 공인된 매춘으로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폐지를 통해 맑스는 매춘관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지금까지의 정통적 맑스주의의 언어 속에서는 모든 남성우위적 노동자계급운동 속으로 모든 여타운동들이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신사회운동의 출현이후에 많은 운동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의한 운동을 추구하는 분리운동으로, 계급과의 관계단절로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초적 운동들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해야하지만, 그것이 계급문제와의 단절로 나아가서는, 정체성 운동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 관해서는 남성들 자신이 스스로를 자본의 명령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계급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한 위치가 되는, 어떻게 보면 스스로 자본가가 되는 방향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남녀관계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힘입니다. 자본은 남녀관계를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관계는 착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않지만, 불평등한 지배관계는 자본이 보이지 않는 착취(가사노동과 같은)를 가능케하기 때문에 자본은 그러한 관계를 누구보다 선호합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가부장제를 누가 가장 많이 지지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되겠지요. 따라서 마초적인 운동을 지향하는 남성들은 또 다른 자본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분리를 추진하는 정체성 운동들에 대해서도 불가피하게 비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노동운동이 가진 억압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위에서 상당부분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가장 커다란, 모든 사회관계를 자신으로 환원시키는 허리케인 같은 존재가 바로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본과 대결하지 않고는 우리 각자가 놓인 관계(가령 남녀관계)의 해결은 불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이버맑스]라는 책의 1장이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8. 현재의 사적소유의 폐지를 부르주아지는 개인적 소유의 폐지로, 더 나아가서는 개인들의 폐지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맑스는 개인적 소유의 폐지가 아닌 사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실제로 현행의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개인들은 개인들의 대립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지않느냐고 하면서,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해 계급적 차이들을 폐지하고, 각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고 주장합니다.


9. 맑스는 당시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행한 후에 마지막 장에서 각 나라별로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전개합니다. 역시 현실주의적 측면을 볼 수 있겠죠.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정당들과도 결합해야 하고, 합의해야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은 소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되어야 하며, 그리고 결국에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야함을 제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