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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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오. 나 브라스 꾸바스가 스턴이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는지, 아니면 이 책에다가 염세주의의 투정을 집어넣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오."...(중략)

브라스 꾸바스에 대해서는 아마도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10쪽, 저자 서문)

 

정식 이름 주아낑 마리아 마샤두 지 아시스, 헉헉... 이름 한 번 제대로 부르기에도 꽤 험난한 이 작가는 브라질 소설가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히며 세계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이 작가의 작품만을 논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번에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처음 소개되는 터라, 첫 책장을 여는 마음이 두근두근 셀렌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아프리카 등 비서구권 문학의 성취를 조금씩이라도 야금야금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동할 뿐.

 

책을 여니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1896년 3판 저자 서문 뒷장의 멋진 헌정사가 눈을 끈다.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이 헌정사와 소설의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 브라스 꾸바스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1장이 '저자의 사망'이니, '소설의 시작=주인공의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1장에서부터 160장 '부정적인 것'까지, 총 160개의 장이 브라스 꾸바스의 이승에서의 삶을 찬찬히 잘 정리...해주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뭐랄까... 참 거침없고, 얽매임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들, 그리고 과감한 형식. 독자들은 때로는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받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한마디로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어떤 사건을 잘 회고하다가도 옆길로 새기도 하고,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가 끝을 맺지 않고 그냥 멈춰버리거나 다른 상황으로 슬쩍 건너뛰기도 하고(그러면서 꼭 독자 핑계를 댄다), 아예 한 마디 단어도 없이 말줄임표만으로 채워넣은 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장은 '이 장은 129장의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 사이에 삽입되는 것이 적당할 것'(270쪽)이라고 제시되기도 하고, 약혼녀 도나 에우랄리아 다마세나 지 브리뚜(이름 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그냥 그녀의 묘비명만을 소개하기도 한다. 다른 아무런 이야기 없이.

 

도대체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초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 독특한 소설이 무려 1880년 작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도대체 이런 실험정신 가득한 작품이 27세부터 평생 관료생활을 했던 작가가 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여러 공직을 역임하면서도 그는 정력적으로 시, 연극, 연대기, 소설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작품을 썼다고 한다. 괴물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다. 너무나 바쁘고 항상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의 눈에는 그 산만함이, 그 산만함 속에 담긴 풍요로움이 참 경이롭기만 하다. 산만하고 수다스러운 문체, 어떤 것을 묘사할 때 완결짓지 않고 멈추거나 슬며시 다른 상황으로 순간이동하는 모호한 문체 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겠다. 당시 브라질 수도인 히우지자네이루를 배경으로 한 노예에서부터 상류층까지의 다양한 인물들, 그 각각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한 내면의 심리를 담고 있는 산만함. 철학과 문학, 역사에 해박한 작가의 촘촘한 배경지식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산만함. 이 소설 덕에 나는 그동안 부정적으로만 여겨왔던 '산만하다'는 말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어는 1g도 모르지만, 딱 봐도 험난한 산으로 보이는 이 작품을 번역한 옮긴이의 노고에도 경의를. '현대적 의미로는 해석이 되지 잘 되지 않는 많은 어휘들과 문장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여기에 매우 독특한 그의 문체가 또다른 걸림돌이 되었다(309~310쪽)'라는 옮긴이의 한 문장은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담았던 말이었을까. 그런 땀방울 덕분에, 이렇게 그동안 다른 세상이었던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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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미술로 떠나는 불교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12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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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의 벽화는 화가들이 색채로 쓴 경전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눈으로 읽는 경전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만 하는 경전이다.'(5쪽)

 

이 책의 저자는 인도 미술의 아름다움에 홀리어 20년 동안 수없이 인도를 오가면서 2,000여 점에 이르는 인도의 다양한 미술품을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뭔가 한 세계에 오롯이 홀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잔타 석굴과 인도 불교미술에 대한 저자의 뜨거운 애정이 가득 느껴져서 덩달아 들뜨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잔타 석굴 안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부처와 인간의 삶의 다양한 장면들,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자는 찬찬히 펼쳐 보여준다. 아잔타 석굴에 그려진 불화의 주제는 주로 '자타카(부처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이전 전생 이야기)'로, 석굴의 벽, 기둥, 천장 등 사원 전체에 25편의 자타카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부처, 보살, 나한 등 불보살을 중점적으로 그린 한국의 불화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시각화해야 하는 아잔타 불화는 주인공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설명적인 방식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이건 마치, 만화의 원형이 아닌가!). 벽화 장면 장면마다 한 편의 연속된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저자는 25편의 자타카 중 그림 보존 상태가 우수한 16개의 이야기를 벽화와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해준다. 자타카 이야기를 읽으며 할머니 무릎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던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한 번은 부처가 아리타자나카 왕의 아들인 마하자나카 왕자로 태어난 적이 있었단다... 한 번은 부처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황금 사슴으로 태어난 적이 있었단다... 한 번은 부처가 히말라야에 사는 커다란 물소로 태어난 적이 있었단다... 한 번은 부처가..."

윤회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고, 부처는 자비심을 지닌 인간이나 고귀한 보살로, 혹은 새나 사슴, 코끼리 같은 동물의 모습으로 태어나 자비와 희생을 베푸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던져준다. 원래 기원전 4세기 팔리어로 쓰여진 자타카는 모두 547편으로 구성된 이야기, 즉 부처의 보살로서의 547번의 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그 오랜 시간의 개념에서 보면 한 생은 덧없이 짧아 부지런히 갈고 닦아 수많은 덕을 쌓아야만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음의 길은 아주 멀고 먼 길인 셈이다.'(77쪽)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된다고 했던가.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 한번 아잔타 석굴에 가보고 싶어졌다. 뭣도 모르고 갔을 때도 참 장엄하고 감동적이었던 곳이었지만, 이 책 같은 든든한 안내자를 만나 그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나서 눈에 담게 되면 그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아잔타 벽화의 내용을 알고 잘 들여다보면 부처가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법문이 그대로 잘 느껴져 온다...(중략)...말하지 않아도 느껴져 오는 가슴 가득한 감동의 순간들이 아잔타 벽화에 가득하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벽화 앞에서는 발걸음을 떼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77~78쪽)

 

900여 년 동안, 뜨거운 인도의 공기 속에서 묵묵히 정과 끌로 석산을 쪼아내고 있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신을 만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로 만들어진 곳, 아잔타 석굴. 그 앞에 서면 인간은 한없이 순해지고 겸허해진다. 다음에 인도에 갈 때는 이 책을 품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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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무강 건강법 - 김일성 주치의 김소연 박사의
김소연 지음 / 비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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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옛 조상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과거엔 환갑, 진갑, 칠순이 되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많은 음식을 장만해 이웃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을 정도로 큰 '경사'였지만, 이제는 단출한 가족 식사나 여행으로 대신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로' 사느냐가 아닐까. 죽는 날까지 병에 걸리지 않고, 자기 체력을 유지하며, 시각/청각/후각 등의 감각 기능을 건강하게 지켜갈 수 있는 삶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일 것이다. 이런 축복받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저자 김소연 박사의 말대로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고, 가장 좋은 질병의 치유법은 아예 걸리지 않는 것이다. 건강할 때 그 상태를 유지해 질병이나 노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23~24쪽)'을 마음 속에 늘 새겨두어야 한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려고 노력하는 것, 참 싱거울 정도로 단순한 얘기지만 이것을 늘 일상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김소연 박사의 이력은 특별하다. 처음 의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곳은 북한, 자본주의적인 의료시스템을 알게 해 준 한국, 그리고 병의 치료는 의학 기술만의 문제가 아닌 행복한 삶이 기본이 되어야 그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미국, 이렇게 3국에서 차곡차곡 쌓았던 경험을 이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어렸을 적에 '김일성이 오래 살기 위해 젊은이들의 피를 수혈받는다더라'라는 괴담(!)을 들으며 '에이,설마'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이었다니 충격이다.-_-; 자신들의 피로 김일성에게 기쁨을 준다 하여 '기쁨조'에 소속되었던 젊고 건강한 20살 전후의 젊은이들은, 과도하게 피를 뺏겨서 전부 폐인이 되었고 심지어 조로증에 걸려 빨리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니... 하지만 인과응보이고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과다수혈로 인해 혈액형과 사상체질까지 바뀌어버리고, 젊은이들의 뜨거운 피가 근종으로 몰려 자라목을 압박해서 그의 생명줄을 더 빨리 끊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짬짬이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건강법들이 꼼꼼하게 소개되어 있는 <만수무강 건강법>. 그 중 혀를 입 안에서 이리저리 휘저어 침을 생기게 하여 자주 삼켜주는 '옥천요법'과 양쪽 어금니와 앞니를 서로 맞물리도록 부딪히는 '고치요법'은 바로 실행 중이고, 혈액순환을 개선해 신진대사를 활성화하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는 '양파 와인'도 당장 만들어 숙성시키고 있다. 어떤 맛일까 기대된다~^^

그밖에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건강식과 건강습관들 중에 해보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특히 바나나껍질이나 수박껍질을 이용한 발효음료나,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 생명식초는 꼭 시도해보고 싶다. 값비싼 식재료나 약재가 아닌 우리 생활에서 항상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활용하여 환경도 살리고 몸에 유익한 건강식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와 닿는다. 

 

뭔가 몸에 이상신호가 생기면 무조건 약이나 병원만 찾을 것이 아니라, 몸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본래 지닌 자연 치유력을 되살리기 위해 매일매일 정성을 기울이는 것, 평소에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는 습관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틈틈이 펼쳐보고 자극을 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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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등대 -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우리에게 빛이 된 23인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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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모험을 발견하면서 각 인생이 얼마나 무한히 소중한지, 그리고 수십억의 인생들이 매 순간 인류의 거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9쪽)

 

<등대>의 서문을 곱씹어 읽는다. 깜깜한 밤바다를 헤매는 배들이 암초에 걸리지 않고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내해주는 등대가 된, 23인의 빛나는 삶을 각각 깊게 파고들어 그 의미를 조명하는 책.

 

읽다보면, 저자 자크 아탈리의 지성의 폭이 얼마나 전방위적인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한 인물의 일생을 찬찬히 펼치면서 중간중간에 그 시대에 세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어떤 문예사조와 어떤 음악, 미술 양식이 유행했는지, 동시대에 다른 인물은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이 척척 등장하는데, 놀라울 뿐이다. 이런 총체적, 입체적 시각으로 구성한 방식의 전기를 처음 접해서 감동이다. 왜 자크 아탈리를 두고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 유럽 최고의 석학이라 부르는지 절절히 공감하며...^^

 

23인의 '등대'들을 만나며 무척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아소카, 토마스 아퀴나스, 카라바조, 찰스 다윈 등 눈에 익숙한 이름들의 삶을 읽었을 때는 반가웠고, 또 내가 그 인물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나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낯선 인물들에 대해서 새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 마이모니데스, 압델카데르, 발터 라테나우, 마리나 츠베타예바, 함파테 바의 이름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유럽의 학자들이 보통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세계의 중심을 서구에만 두는 한계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대륙의 '등대'들을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자크 아탈리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만나서 특히 반가웠던 인물이 셋 있다. 서양음악사에서 이름과 악보가 남아있는 최초의 여성작곡가인, 12세기 수도자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중세 이슬람 세계의 대표적인 철학자, 의학자인 '살만 루슈드'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예전에 어떤 책에서 처음 알게 되어 '와! 중세에 이런 여성이 있었다니'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책에서는 살짝만 다뤄서 아쉬움이 남았던 차에, 이렇게 찬찬히 그녀의 비범했던 삶을 살피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이븐 루슈드!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림인,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로마 바티칸 궁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터번을 쓴 인물을 보고 갸웃했던 적이 있다. 아테네 시대에 웬 터번?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 터번의 인물이 바로 이븐 루슈드였다. 그 후 이븐 루슈드에 대해 열심히 탐구...했으면 좋았겠지만, 게으름으로 인해 어찌어찌 덮어두었던 차에 이렇게 '집중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이슬람 철학자가 로마 바티칸 궁 벽화에 그려졌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얻어서 만족.^^ 26년간이나 아랍어로 기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유럽에 전한 그가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옷을 입힌 중세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번째 인물은 예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스탈 부인'인데, 사실 '열정적 살롱의 여왕' 스탈 부인은 일반론적으로 보면 위인전에 포함되기에는 좀 어긋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문에서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멋지게 '예방약'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 모두가 모범적인 본보기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일탈 때문에 자신들이 비켜나지 못한 위험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이 등대들은 그들의 실수들을 통해서조차 나를 안내한다.'(8쪽)

그칠 줄 모르고 정열이 솟아오르는 열렬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스탈부인의 삶을 읽어가면서 나는 헉헉댔다. 뭐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가 다 있지? 독재정치에 대한 증오로 나폴레옹과 끊임없이 맞서서 추방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책을 쓰고 그 와중에서 끊임없이 애인을 만들고...^^; 암튼 자크 아탈리는 스탈 부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하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옮겨본다. 어쩐지 스탈 부인이 들었으면 굉장히 행복해했을 것 같은, 그런 명대사.

'그런데 제르멘, 즉 스탈 부인의 인생은 얼마나 대단한가! 단 1분도 행동의 중심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단 1분도 생각하거나 쓰거나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368쪽)

 

'이 책에 실린 사람들처럼 우리도 의지적이고 창조적이며 집념이 강한가? (혹은 그러기를 원하는가?)'(5쪽)의 말이 요즘 자꾸 입속에 맴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작가, 자크 아탈리의 훌륭한 안내로 귀기울일 수 있었던 23인의 열정적인 삶. 삶의 한 순간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밝혀주는 등대로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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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의 교육론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교육 3부작 시리즈 2
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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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였던가, '우리 사회에서 계층을 초월해 만나서 3분 안에 합의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교육문제'라는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 부모, 교사 모두 불행한 얼굴을 하고 '견디는' 시간들 앞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이 등장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다. 아니, 더 심화된 경쟁속에 더 불행해진 모습들만 보일 뿐...

 

이 책은 41년간 거창고등학교를 비롯한 같은 재단 샛별초등학교, 샛별중학교를 이끌어오며 저자가 경험했던 것들,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의 삶, 그가 생각하는 참된 교육에 대한 생각과 교육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한 목소리로 담고 있다. 가슴으로 쓴 책이고, 뜨거운 책이다.

 

'거창고'가 워낙 유명한 이름이라, 사실 이렇게 절절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저자 전성은의 아버지 전영창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조국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모든 것이 보장된 대학이 아닌 벽지로 가리라 결심한다. 2년 전 개교했다가 빚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 된 거창고를 맡기로 하고 교장 취임식을 할 때의 일화는 참 마음 아팠다. 폐교 직전의 학교에 새 교장이 취임한다니까 학생들이 모두 책상과 의자를 들고, 타 학교에 인수되기를 바라는 교사가 인솔해서 떠나버린 것이다. 2백여 명의 학생 중 겨우 8명이 남아 새 교장의 연설을 들었다 한다.

학교가 망하면 밥값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한 하숙집들이 교사들의 하숙을 받아주지 않았고, 지붕이 뚫린 교실은 비라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 들고 공부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월급을 자진해서 반으로 줄인 선생님들이 있었다. 하숙을 구할 수가 없어서 교실 한 칸을 비워 합숙을 하고 삶은 감자로 겨우 끼니를 때우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한 선생님들의 열정이 있었다. 그렇게 20년, 누구나 탐내는 대학의 부학장 자리 대신 빚더미에 앉은 시골학교를 택한 그의 외롭고 험난한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내 교육은 실패했어'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기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난다.

 

"그 한마디의 말이 오늘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그 말은 나로 하여금 40년 동안 교육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했다."(10쪽)

 

그는 왜 맨주먹으로 거창고를 훌륭하게 키워낸 아버지가 당신의 교육을 '실패'였다고 불렀는지, 참교육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파고들었고 치열하게 현실과 싸웠다. '서울공화국'의 '시골'학교에서 교사 구하기가 힘들어 갖은 고생을 하면서, 교육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놓지 않았다. 그와 그를 있게 해 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속에 그 사유들이 겹쳐져 빛난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 타인에게 고통 당해 느끼는 아픔을, 내가 책임질 이유가 없는 그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픔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바로 나라고 인식하는 사람이다."(117쪽)

"교육은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 힘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허위 논리임을 밝혀내는 일이다...(중략)...그리고 인류의 참 평화는 사랑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는 일이다."(245쪽)

 

무조건 다른 이보다 앞서 나갈 것을 종용하는, 옆에서 누가 넘어지든 다치든 외면하고 오직 자기 살 길만 찾으라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교육 풍토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이끌어갈 교육학은 사랑에서 나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깊다. 부디, 너무 늦기 전에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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