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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등대 -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우리에게 빛이 된 23인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그들의 모험을 발견하면서 각 인생이 얼마나 무한히 소중한지, 그리고 수십억의 인생들이 매 순간 인류의 거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9쪽)
<등대>의 서문을 곱씹어 읽는다. 깜깜한 밤바다를 헤매는 배들이 암초에 걸리지 않고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내해주는 등대가 된, 23인의 빛나는 삶을 각각 깊게 파고들어 그 의미를 조명하는 책.
읽다보면, 저자 자크 아탈리의 지성의 폭이 얼마나 전방위적인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한 인물의 일생을 찬찬히 펼치면서 중간중간에 그 시대에 세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어떤 문예사조와 어떤 음악, 미술 양식이 유행했는지, 동시대에 다른 인물은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이 척척 등장하는데, 놀라울 뿐이다. 이런 총체적, 입체적 시각으로 구성한 방식의 전기를 처음 접해서 감동이다. 왜 자크 아탈리를 두고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 유럽 최고의 석학이라 부르는지 절절히 공감하며...^^
23인의 '등대'들을 만나며 무척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아소카, 토마스 아퀴나스, 카라바조, 찰스 다윈 등 눈에 익숙한 이름들의 삶을 읽었을 때는 반가웠고, 또 내가 그 인물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나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낯선 인물들에 대해서 새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 마이모니데스, 압델카데르, 발터 라테나우, 마리나 츠베타예바, 함파테 바의 이름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유럽의 학자들이 보통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세계의 중심을 서구에만 두는 한계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대륙의 '등대'들을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자크 아탈리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만나서 특히 반가웠던 인물이 셋 있다. 서양음악사에서 이름과 악보가 남아있는 최초의 여성작곡가인, 12세기 수도자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중세 이슬람 세계의 대표적인 철학자, 의학자인 '살만 루슈드'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예전에 어떤 책에서 처음 알게 되어 '와! 중세에 이런 여성이 있었다니'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책에서는 살짝만 다뤄서 아쉬움이 남았던 차에, 이렇게 찬찬히 그녀의 비범했던 삶을 살피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이븐 루슈드!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림인,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가 로마 바티칸 궁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터번을 쓴 인물을 보고 갸웃했던 적이 있다. 아테네 시대에 웬 터번?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 터번의 인물이 바로 이븐 루슈드였다. 그 후 이븐 루슈드에 대해 열심히 탐구...했으면 좋았겠지만, 게으름으로 인해 어찌어찌 덮어두었던 차에 이렇게 '집중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이슬람 철학자가 로마 바티칸 궁 벽화에 그려졌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얻어서 만족.^^ 26년간이나 아랍어로 기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유럽에 전한 그가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유럽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옷을 입힌 중세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번째 인물은 예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스탈 부인'인데, 사실 '열정적 살롱의 여왕' 스탈 부인은 일반론적으로 보면 위인전에 포함되기에는 좀 어긋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문에서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멋지게 '예방약'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 모두가 모범적인 본보기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일탈 때문에 자신들이 비켜나지 못한 위험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이 등대들은 그들의 실수들을 통해서조차 나를 안내한다.'(8쪽)
그칠 줄 모르고 정열이 솟아오르는 열렬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스탈부인의 삶을 읽어가면서 나는 헉헉댔다. 뭐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가 다 있지? 독재정치에 대한 증오로 나폴레옹과 끊임없이 맞서서 추방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책을 쓰고 그 와중에서 끊임없이 애인을 만들고...^^; 암튼 자크 아탈리는 스탈 부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하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옮겨본다. 어쩐지 스탈 부인이 들었으면 굉장히 행복해했을 것 같은, 그런 명대사.
'그런데 제르멘, 즉 스탈 부인의 인생은 얼마나 대단한가! 단 1분도 행동의 중심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단 1분도 생각하거나 쓰거나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368쪽)
'이 책에 실린 사람들처럼 우리도 의지적이고 창조적이며 집념이 강한가? (혹은 그러기를 원하는가?)'(5쪽)의 말이 요즘 자꾸 입속에 맴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작가, 자크 아탈리의 훌륭한 안내로 귀기울일 수 있었던 23인의 열정적인 삶. 삶의 한 순간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밝혀주는 등대로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