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 유니스, 사랑을 그리다
박은영 글.그림 / 브레인스토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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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빨강과 분홍의 표지부터 무척 강렬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책. 서정적인 글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일러스트들 덕분에 읽는내내 눈과 마음이 포근해지는 시간이었다.

 

동화작가이고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어른들을 위한 이 그림책은 특정한 줄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 스스로 동화적인 이미지와 에세이적인 픽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책이라고 한 만큼,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들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의 이야기와 그 이미지들을 느껴보면 족할 것 같다.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어도 주인공 비슷하게 등장하는 여성이 있는데,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붉은 색깔의 긴 드레스를 자주 입는 듯한 '유니스'다(그러고보면 책의 부제도 '유니스, 사랑을 그리다'로군). 유니스는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래도 다시 만날 것을 믿고 희망을 놓지 않기도 하고, 다시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우리가 그러했듯, 그러하듯이.

 

또 유니스와 그의 사랑 외에도 등장하는 다양한 무생물(?) 일러스트들도 인상적이다. 원색과 난색 계열을 주로 써서일까,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따뜻해지는 그림들이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섬세한 선들의 느낌도 좋고. 집, 여행가방, 구두, 우산, 피아노, 침대, 탁자, 전화, 고양이, 케이크, 안락의자, 창가, 화분... 다채로운 일상의 소재들을 포착한 그림들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 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가끔 글과 그림의 이미지가 연결이 안 되는 책을 만나면 참 안타까웠는데, 역시 글쓴이가 그림을 그리니 뭔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연둣빛 배경을 바탕으로 왼쪽, 오른쪽 페이지에 각각 놓여있는 두 개의 의자 그림이 있다. 한 의자에는 유니스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고, 다른 의자는 비어 있는데 여기에 놓인 글은 이렇다.

 

빈 의자

 

대상 하나에 드는 생각이 너무 많다.

모두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의 틀 안에서 대상을 본다.

그의 의자와 나의 의자가 같다고

착각하지 말자.(98쪽)

 

책 마지막에는 특별부록이 있는데, 책 속에 들어간 일러스트들을 각 장별로 나누어 정리해놓은 것이다. 일러스트마다 붙은 제목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마치 햇볕 따사로운 날, 아담한 갤러리에 들어가 어슬렁거리는 기분으로 그림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사랑해, 참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말.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말. '우리 인생은 같은 마음으로 함꼐하는 이가 있을 때 가장 빛난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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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한옥에 살다
이상현 지음 / 채륜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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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외국인 친구와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갔던 적이 있었다. 800여 채의 한옥이 모여있는 그림같은 풍경 속을 거닐며 우리는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한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꽤 난감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냥 '한옥=자연미, 곡선미' 등의 주입된(?) 공식으로, 민족적 자긍심으로 한옥이 아름답다고 여겼지, 왜 아름다운 건지,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책으로 미리 눈을 틔우고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내 경험에서도 그랬듯, 우리는 그냥 쉽게 한옥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을 한옥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대부분 한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책날개의 지은이에 대한 소개글에서 '한옥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한옥 목수 일까지 배웠다'가 더욱 강하게 남았다. 몸으로, 마음으로 한옥을 품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쓴 책답게, 충실하게 밀도 있게 읽힌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한옥에 대한 지은이의 애정과 열정에 나도 전염되는 기분이 든다.

 

책은 미학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무척 흥미롭고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인문학적인 가치, 미적 태도를 서양과 달리할 수밖에 없게 한 한옥의 특성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준다(지은이가 한옥에 대한 강의로 명성이 높다고 하던데,과연!). 특히 한옥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고전미학이 아닌 현대미학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대상에 속해 있던 아름다움을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 놓은'(41쪽) 변화 속에서, 엄격한 비례미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비례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새로움이 중요해진 현대적인 관점과 한옥의 미가 통한다는 사실이, 시간을 뛰어넘어 그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의 지은이는 생각의 고리들을 연결짓는 마술사같다. 한옥을 끊임없이 여러 인문학적인 주제거리들과 연결시키고 다채로운 사유로 확장해간다. 그 연결고리들을 따라 함께 나아가는 여정이 즐겁기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아름다움의 세 가지 형식에서부터 세잔과 베이컨의 그림들, 플라톤, 니체, 하이데거, 칸트, 하이데거, 스피노자, 벤야민... 한옥과 연결되는 인문학적인 사유의 틀들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다니. 우리 한옥을 접한 경험이 아마도 없었을 서양철학자들이 지은이의 상상력 덕분에 한옥과 끊임없이 만난다. 플라톤과 한옥이 통하기도 하고, 스피노자가 한옥의 숭고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칸트와 한옥이 결별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은 벤야민은 그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건축은 시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이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활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에게 건축은 그런 의미가 강했습니다. 아마도 벤야민이 우리 건축 한옥을 보았다면, 흥분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253쪽)

 

한옥은 자연의 속성을 인공적으로 해치지 않고 보존하는, 자연 자체를 담은 건물이라는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생활 속에서의 숙련이 흥으로, 대상의 상과 소통하면서 만든 형이 바로 예술이 되는'(250쪽) 우리의 한옥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책, 고맙다. 한옥은 단지 옛 조상들이 살던 집, 박제된 문화유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축적해 온 삶의 문화가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한옥의 소중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 보람있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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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 창의성을 깨우는 열두 잔의 대화
김하나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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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반짝임이 녹아있는지를 유쾌하게 깨닫게 해 주는 책을 만났다. 평소에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들과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혹은 마음 속에 있으면서도 뒤죽박죽 정리가 안 된 생각들을 속시원히 좍좍 풀어주는 부분이 많아서 '맞아맞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퇴근길에 '나'는 단골인 작은 술집에서 '그녀'와 만나 대화를 주고받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재즈곡 <미스티>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그 곡의 탄생에 대한 얘기를 꺼냈는데,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말한다. 그런 '창의성의 신화'에는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어쩐지 셜록 홈스가 왓슨과 나누는 대화를 내내 연상시키는, 그녀가 주도권을 잡는 다소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지하게.

 

'창의성의 신화'란 말에 무척 공감이 갔다. 워낙 붕어빵틀 같은 교육과정을 거치며 성장했기 때문일까, 창의성 창의성 하면서도 우리는 내심 창의성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깃드는 비범한 능력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아이디어와 영감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선택된 누군가가 거기 사로잡혀 신탁처럼 그걸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는 신화'(18쪽)가 우리를 창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창의성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소수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에요. 말했죠? 창의성은 하나의 태도라고요.'(28쪽) 그렇다. 창의성은 어떤 특별한 감각을 지녔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

 

거창하고 모호한 '창의성'이라는 말 대신에 벽돌처럼 쓸 수 있는 구체적인 말 '아이디어'를 사용하자는 그녀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존재한다는 것, 일상에서 깨알 같은 씨앗들을 발견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 서로의 아이디어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것들을 곤죽이 되도록 굴리고 살을 붙이며 소통하는 것... '나'와 '그녀'가 대화의 연료인 셰리주를 기울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풍성해져간다(셰리주... 이거 도수가 은근 강해서 홀짝대다 보면 몽롱해지던데, 이 사람들은 어째 갈수록 더 생기발랄해지는지!^^;).

 

대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 에피소드와 온갖 인용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분식집 아주머니가 테이블을 옮기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노상에 세워둔 차에 꽂아둔 중고차 딜러의 광고지, 치즈가 든 샌드위치에 뿌린 고춧가루, 바르셀로나 시의 로고 디자인,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스케치 과정, 온갖 소설과 영화 이야기, 고양이 사진가 쿠퍼, 간디의 비폭력 투쟁 이야기, 올레길의 이정표, 적정기술... 꽤 종횡무진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내 안의 곤죽에도 깨알같이 살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호기심의 안테나가 전 방위적인 사람과 에너지 넘치는 대화를 나누고 기분좋게 잠자리에 드는 기분이랄까. 따스하고 풍요로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새롭게 눈을 뜨고 방법을 찾을 씨앗들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문제에 부딪쳤을때, 늘 하던 식으로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사소한 것이라도 시도해보며 '이러면 좀 낫지'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말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아이디어를 내는 게 훨씬 낫지요'(246쪽)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더 많은 반짝임을 발견하고, 더 많이 감탄하고, 더 나은 세상을 끊임없이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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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300일의 마음수업
이창재 지음 / 북라이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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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올 한해를 되돌아보며 정리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후회스러움도 고개를 드는 이때, 마음 속에 잔잔한 울림과 위로를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오직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 백흥암. 사시사철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선원을 열지만 외부인들에는 1년에 단 두 번 부처님 오신 날과 백중날에만 문을 여는,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곳이라고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저자는 젊은 날의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던 첫사랑 같던 불교를 떠올리며, 자신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절실한 궁금함으로 백흥암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린다. 예상대로 촬영 허가부터 쉽게 나지 않았던 영화는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고 한다. 그 후 300일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다사다난했던지, 오죽하면 '매번 촬영차 절에 내려갈 때면 휴가 마치고 복귀하는 이등병의 심정이었다(278쪽)'고 했을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지금까지 누려왔던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출가를 택한 비구니 스님들,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속이 차분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수덕사의 여승'같은 노래를 들으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뭔가 기구한 사연이나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 분은 없었다.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때가 되어 출가한 분들도 있었고, 가족과 사회의 울타리를 부수고 힘들게 출가한 분들도 있었지만 오직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결심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수행의 길.

 

그동안 궁금했던 스님들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느낀 점도 많았다. 출가를 결심하고 나서 삭발하기 전 짤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 절에서 그냥 사는 시간, '관찰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은사 스님이 정해지고 삭발을 하고 행자 생활을 한다고 한다. 수습 스님인 행자 과정은 새벽부터 그야말로 쉴 틈이 없는 바쁜 생활의 연속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했을 때 내 마음에서 어떤 것들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서, 그 감정들을 보듬고 부처님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행자 과정을 무사히 마친 후 수계교육원에서 공부한 후 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

고된 일을 하면서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닦는 행자 과정, 절에서의 가장 굳은 일인 해우소 청소와 불 때는 소임인 화대 임무를 법랍이 높은 스님들이 담당하는 것... '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면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불교 내부의 전통과 규칙은 생각보다 훨씬 지혜롭고 사려깊었다'(121쪽)는 저자의 말에 동감하며 책장을 넘긴다.

 

안거와 만행, 도반과 사제 관계... 저자가 만난 스님들의 삶의 모습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세속의 관계를 끊고 출가했으나 이곳에서도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고,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몇 시간을 달려가 밤을 새우는 우정이 만들어진다.

감옥보다도 더 지독한 자기 통제의 공간, 무문관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감옥처럼 창문에조차 철창을 덧댄 세 평 남짓한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처절하게 정진하는 곳, 그 고통을 고비고비마다 넘기며 3년씩 견디고 나오는 마음들은 어떤 것일까. 마음의 공부라는 것이 세속의 공부처럼 뭔가 형태로 남아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꼭 어떤 성취를 얻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 혹독한 수행의 길을 기꺼이 택한 분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살아가는 날들의 답은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길을 찾는 것, 자신의 길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 무문관을 나서며 드는 생각이었다.'(257쪽)

 

향기로운 책이다. 백흥암에서 성불도 놀이에 몰두하시는 스님들의 모습, 천 포기의 김장을 함께 힘을 합쳐 영차영차 하며 달아오른 얼굴들, 참선 때마다 막대를 이용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던 영운 스님의 얼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시는 소현 스님과 선우 스님, 무진 스님의 맑은 미소가 눈에 어른거린다. 밥을 하는 것도, 아궁이의 재를 치우는 것도, 모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수행이 아닌 것이 없었던 스님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늘 밀쳐둔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행이 삶이고 삶이 곧 수행인 날들, 머리 깎지 않은 우리도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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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삶
이서희 지음 / 그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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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자유롭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자. 섣불리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그들 눈에 괜찮은 여자일까 아닐까를 고민하지 않는, 나로서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 말입니다. 이런저런 실험도 해 보면서 나의 욕구에 눈을 뜨고 그것을 표현하고 누리는 행복을 배웠습니다."(에필로그 중에서)

 

어떤 책에는 그에 어울리는 시간이 있다. 낮에 읽으면 좋은 책이 있고 밤에 읽었을 때 잘 스며드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단연코 후자다. 며칠 동안 해질 무렵부터 펼쳐들어 아껴가며 읽었다.

 

당당하고 거침없음. 강인하고 솔직함. 연애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투명하게 거울에 비춰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경험을 꺼내며 주저한다거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다던가 피해의식이나 죄책감 따윈 없이.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 한켠이 후련해지곤 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과 성에 관련한 담론은 언제나 양극단에서 방황 중이다. 한쪽에서는 한없이 엄숙하고 경건한 탈을 쓰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방탕한 사각지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연애 경험, 사랑과 성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쉽지 않다. 사랑과 성에 관련한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솔직한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조강지처와 애인 등 이분법으로 구성된 체계에서 하위의 지위를 대체로 부여받는다. 저자가 말한 '나의 욕구에 눈을 뜨고 그것을 누리고 표현하는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여자는 마녀사냥 대상이 되기 딱이다.

 

물론 저자의 경우 유학을 떠난 후 주로 외국에서 생활해 왔고, 지금도 외국인 남편과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꼭 남편이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아마 이런 여성과 사랑의 도주를 감행할 정도의 남자라면.  

아마도 이 책은 독자의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보통의 남성 독자일 경우 읽으면서 꽤 심기가 불편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은 여자가 애인과 섹스 비디오 찍은 이야기까지 다 해? 말세다, 말세... 뭐 이런 식으로. 

 

고등학교 다닐 때, 이른 새벽 등교길에 이른바 '바바리맨'을 만나고 내가 죄지은 것 마냥 놀라고 무서워했던 날이 기억난다. 버스 안에서 내 다리를 더듬던 손 때문에 하루종일 우울했던 날도. 그때 내곁에 이런 대담하고 든든한 언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자는 파리 유학 시절 국산이 아닌 외제 바바리맨을 어두운 광장에서 만났던 경험을 들려준다.

'이미 남자 성기 보는 데에는 제법 단련된 나였지만, 원치 않는 물건이 강제로 좌판을 벌이는 데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불어로) 튀어나왔다.

"하, 그것 참 쪼끄만데! 너 참 뻔뻔하구나."'(193쪽)

멋지다! 바바리맨 공식 대처법으로 등극해놓고 싶군.

 

누군가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일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그 누군가는 겉으로 보기엔 대차고 강인하지만 내면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가득차 있어서 일기장 한 장 한 장마다 농도가 짙었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뭔가 나의 시간이 가만히 위로받는 느낌도 들었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어린시절의 경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기억 속에 새겨진 선생님과 친구와의 이야기도 무척 아름다웠다. 이 책 덕분일까. 나도 오랜만에 먼지 쌓인 옛날 일기장을 꺼내보았다.

'삶은 매혹, 기필한 매혹, 그러므로 나는 삶을 유혹하고 그로부터 매혹되기 위해 다시 한번 몸을 띄울 준비를 한다.'(153쪽)

그렇다, 삶은 때로는 참 팍팍하고 비루한 것 같지만, 매혹적인 것이다. 아찔할 정도로 눈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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