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야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강신주 옮김, 조선경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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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수척해 보이는 한 여인이, 메마른 두 손으로 가시덤불을 온 가슴에 가득 껴안고 있다. 가시덤불에 점점이 번지고 있는 붉은 빛들은 꽃잎들일까, 핏방울들일까. 눈을 감고 이 모든 고통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 여인은, 바로 어머니다.

 

널리 알려졌듯, 안데르센의 동화는 보통 동화와는 달리 늘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 않는다(어렸을 때 성냥팔이 소녀를 끝내 죽여버린 그를 원망했던 것이 떠오른다.^^;). 또한 비교적 덜 유명한 작품 가운데에는 의외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영향도 있었을 거고, 또 그의 굴곡 많았던 삶도 다소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안데르센의 장례식에 대한 얘기를 읽었던 기억도 난다. 덴마크 국왕과 황태자를 비롯한 수백 명이 찾아왔던 그의 장례식에 정작 그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안데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딱히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이야기>도 일반적으로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결말로 끝맺지 않는다. '죽음'이 아이를 데려간 후, 아이를 되찾기 위한 어머니의 길고 모진 여정이 시작된다. 어머니는 검은 옷을 입은 '밤'의 바람대로 아이에게 들려주던 자장가들을 빠짐없이 들려주고, 가시나무의 바람대로 가시덤불을 품에 꼭 껴안고 따뜻하게 해주고, 진주 모으는 걸 좋아하는 호수의 바람대로 자신의 두 눈을 호수에 가라앉히고(실핏줄들을 혜성의 꼬리처럼 단 두 눈알이 호수로 던져지는 삽화를 그림책에서 만난 신선한 충격!^^;), '죽음'의 온실을 돌보는 할멈에게 자신의 검고 긴 머리카락을 준다.

슬픔에 싸인 어머니가 '죽음'의 커다란 온실에서 수많은 꽃과 풀들 하나하나에 몸을 굽혀 그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수많은 꽃과 풀들 중에서 자기 아이의 심장 소리를 어머니는 알아차린다.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과 비유인지.

 

'죽음'이 가져다 준 눈으로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 어머니는, 그를 협박하기 위해 방금 자신이 뽑아버리려고 했던 꽃들의 일생을 보게된다. 그리고 이제껏 간절히 염원해 왔던, 아이를 돌려달라는 기도는 사라져 버린다. 대신 자신의 눈물과 기도를 부디 잊어달라고,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기도가 어긋난다면 자신의 기도를 듣지 말아달라는 아이러니한 기도가 이어진다. 마음이 저릿해진다.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을 참으며 이런 기도를 올렸을까. 아이를 품에 안고싶은 마음을 이기면서까지, 아이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달라는(즉 데려가달라는) 어머니의 절절한 외침.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심장 박동 소리를 가진, 작고 파란 붓꽃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윽고 꽃에서 아이의 생명이 다시 태어났고, 둘은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기에 이 동화는 슬프다. 하지만 아이들이 읽는 동화라고 해서 죽음, 때론 아픈 삶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안데르센 아저씨가 이렇게 끝을 맺은 것에 고개를 끄덕여본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를 어쩐지 연상되는(이 책을 읽으며 자꾸,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있던 어머니를 그린 콜비츠의 작품이 겹쳐 보였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삽화와, 책 마지막에 옮긴이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까지, 가슴에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다. '죽음'이 떠나고 난 후, 남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부디 눈물만이 가득하지 않았기를. 시간이 지나 아이를 떠나보낸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간 후, 행복하게 아이 곁으로 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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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의 사건집 코너스톤 셜록 홈즈 전집 9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바른번역 옮김 / 코너스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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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못 걱정스럽다. 셜록 홈즈가 오랫동안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관대한 청중들에게 아직도 고별인사를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인기 테너 가수처럼 될까 봐 말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셜록 홈즈를 부디 놓아주시라!'(머리말 중에서)

 

아이구, 참 천연덕스럽기도 하지. 자신이 만든 이 인물이 자기 상상의 세계를 독점하다시피했다고, 이제 제발 놓아달라고 사정(?)하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웃음이 난다. 그리고 다시금 감사한다. 코난 도일이 1891년 런던에서 개업했던 안과에 환자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래서 그가 전문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에 그때 런던에 눈병이라도 유행하여 코난 도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니 아찔하다.^^; 추리 소설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인물 셜록 홈즈의 활약상을 이렇게 우리가 두고두고 즐길 수 없게 되었을지도.

 

<셜록 홈즈의 사건집>은 코난 도일이 남긴 최후의 단편집이다.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셜록 홈즈 시리즈를 애지중지하며 읽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 이 단편집과는 만나지 못했던 터라 반갑기만 하다. 어렸을 때 선물받았던 종합과자선물세트가 생각난다. 진작 다 먹었다고 생각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상자 구석에 숨어있던 무척 맛있어보이는 과자 하나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 힘을 뺀 가벼운 책 판형과 깔끔한 표지 디자인이 좋다. 가방에 쏙 넣어 다니면서 틈틈이 꺼내 홈즈와 왓슨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은 마냥 두근거리고 즐거웠다.

 

열두 편의 단편들은 뭐랄까, 촘촘히 정교한 거미줄처럼 얽힌 치밀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장편과는 또 다른 유쾌한 맛이 있다. 사건의 전모를 밝혀갈 때의 무서움이나 긴장감이 덜한, 부담없고 산뜻한 느낌. 물론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법! 홈즈는 특유의 번뜩이는 추리와 날카로운 통찰로 언뜻 보기에 불가사의해 보이는 다채로운 사건들을 마술처럼 휘리릭~ 해결해낸다.

단편이니까 좋은 점이 또 있다! 심지어 내 추리가 맞아떨어지기도 한다는 것. 홈즈의 신출귀몰한 추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종종 어질어질했던 장편에서는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는데~(감격 중)

홈즈가 의뢰인의 편지를 읽으며 "현대와 중세, 현실과 공상이 뒤섞여 있어서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군. 자네가 보기엔 어때, 왓슨?"(133쪽)이라고 운을 떼는 '서식스의 뱀파이어 사건'이 내가 참여(?)한 사건이다. 뱀파이어의 혐의를 받고 있던 페루 출신의 여인이 '혹시 상처에 입을 대고 독 같은 것을 빨아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홈즈가 집안을 장식한 각종 무기와 도구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장면을 보고 그 무기와 뱀파이어 사건을 머릿속에서 살짝 연결시켜봤는데... 나중에 홈즈가 내 생각과 비슷하게 추리하는 것을 읽으며 느낀 그 감동을 어찌하리.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열두 편의 단편 속에서 만난 홈즈는 여전히 까칠하고, 창백하고, 치밀하고, 예리하고, 명석하고, 우아하고, 매력적인 탐정으로 살아숨쉬고 있었다. 코난 도일이 머리말 마지막에 썼던 대로, '삶의 근심을 잠시 잊고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어렸을 적 처음 추리소설의 세계로 나를 초대해주었던 홈즈. 그때 당연하게 믿었던 것처럼, 지금도 이 예리한 탐정과 덜 예리한 동료는 이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것만 같다. 눈을 빛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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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소중한 삶을 위해 지금 멈춰야 할 것들 - 인생과 사랑과 일에 그만두기가 필요한 이유
앨런 B. 번스타인 & 페그 스트리프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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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그만두는 능력은 끈기만큼이나 '잘 사는 삶'의 소중한 도구다.'(9쪽)

'들어가는 말'을 읽으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뭔가 힘차게 때려치웠을 때마다 어르신들의 잔소리에 귀가 따가웠을 때, 이 책이 곁에 있었더라면 곰 같은 힘이 났을텐데. 난 단지 힘들어서 도망쳤던 게 아니라고(물론 그런 이유만일 때도 있었지만^^;) , 중단은 마음과 정신을 자유롭게 해 준다고, 지금 나는 그만두면서 성장과 배움을 허락하고 새 목표를 세우는 능력을 증진시키고 있다고 마음껏 나 자신을 축복했을 텐데.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인내의 신화를 먹고 자란 사람들'(27쪽) 속에서 꽤나 마음 고생했다 싶다.

 

이 책에서 '그만두기'는,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는 과정이 아니라 쓸모없는 일과 사람에 대한 감정 낭비를 막고 더 소중한 삶의 목표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뭔가를 그만둔다는 행위에 이렇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입히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적 환경은 우리가 뭔가를 그만두는 것을 보통 부정적으로 보기 마련이니까.

 

'대체로 우리는 나쁜 습관을 끊는 것과 관련이 있을 때만 중도 포기를 능동적인 행위로 본다.'(22쪽)

맞다. 금연이라든가, 금주라든가, 도박이나 게임 중독과 결별했다거나 이런 것들 빼고는 뭔가 중단한다는 것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한다. 다들 '끝까지 버티는 것'의 미덕을 입을 모아 칭송한다.

또 인간의 '회피성향' 역시 우리가 뭔가를 그만두기를 꺼리게 만든다고 한다. '직장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할 때, 사람들은 그 일을 그만두고 떠나면 반드시 경험하게 될 미지의 영역, 즉 자기가 잘 모르는 정신적 혼란을 감수하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서적 고통을 계속 견뎌나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23쪽)는 얘기, 정말 그렇다. 헤쳐나가야 할 미지의 영역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괴로움을 택하겠다는 것. 참 그러고보니 인간이란 존재가 약간은 가엾게도 느껴진다.^^;

 

요즘 뇌 과학 쪽에 흥분해 있던 차에, 우리 뇌가 우리를 어떻게 무조건 버티도록 작용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득한 원시 시대부터 우리 뇌는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하더라고 무작정 매진하는 쪽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쪽으로 진화해왔고, 결국 중간에 멈춰서 새롭게 시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고 습관들을 타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 번 생각한 대로 계속 달려가게끔 되어 있는 거다(요컨대 뇌에도 관성의 법칙 같은 게 있는걸까?). 그 결과 우리는 목표가 정말 달성 가능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에 그리 능숙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굳어진 사고 습관과 중단에 대한 책임 의식은, 이렇게 우리가 만족스런 삶을 지속해가고 새 목표를 설정하는데 자꾸 삐죽 솟은 돌부리가 된다.

 

임상사회복지사로, 30년 넘게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저자의 내공이 묵직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풀어내는 삶의 경험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목표 이탈'이 무엇을 의미하고 왜 중요한지, 그만둘 줄 아는 사람들일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어째서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랐던 얼굴이 있다.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일본의 과학자 야마나카 신야. 널리 알려졌듯이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정형외과 의사였으나, 그는 수술에 재능이 지지리도 없었다. 다른 의사라면 20분이면 간단히 끝낼 수술을 2시간이나 질질 끌어 지도교수나 간호사, 환자 모두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동맥경화를 연구하겠다고 미국 여행을 떠났고, 막상 미국에서는 동맥경화가 아닌 암을 연구했고, 암을 연구하나 싶더니 귀국한 다음에는 ips세포를 연구했다. 그의 몰두의 대상은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바뀌었다.

만일 그가 의사의 길을 끝내 고집했더라면, 의사가 되기까지의 자신의 노력이 아까워서 그 길을 중단하지 못했다면 세포의 생체 시간을 되돌린 세포를 만드는 데 최초로 성공한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려 깊고 지능적인 이탈'을 하는 것이 (당연히)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중단과 이탈에 대해 그렇게 인상쓰고 세상 끝난 것처럼 굴지 말자는 것! 중단이나 이탈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이며, 자기가 원하는 삶으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는 것을 알고 현명하게 받아들이자는 것.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필요할 때는 기꺼이 뒤돌아보지 않고 이탈하는 거다, 저 멋진 신야 아저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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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 생각한다 이탈리아 - 시간이 빚어낸 가치
민혜련 지음, 김세윤 사진 / 멘토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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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정신'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이탈리아의 여러 명품들, 예술가들, 건축과 축제, 그리고 요리 이야기... 무척 다채롭고 풍요로웠다.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 가득한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여정이 내내 즐거웠다. 

 

1부에서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의 창업 정신과 성공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2부에서는 르네상스 천재 장인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3부에서는 파스타, 피자, 젤라토와 에스프레소 등 세계인의 식탁을 사로잡은 이탈리아 요리 속 장인정신을 해부한다.

명품 브랜드 쪽에는 문외한이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구치 가문의 이야기나 명품옷을 입은 공산당원 미우치아 프라다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디자이너 출신도 아닌 정치학을 전공했던 미우치아 프라다가 고급 트렁크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놓은 검정색 방수천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고급 가죽으로 된 다른 명품 가방들과는 달리 왜 프라다의 가방은 나일론 소재로 되어있는지 안그래도 궁금했었는데(솔직히 장바구니 같은 핸드백이 왜그리 비싼지 의구심도 들었고), 아무튼 그당시 일반적인 명품 가방들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낙하산 만드는 나일론 원단을 쓴 프라다의 이런 시도는 경악에 가까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않았던 이 가방은 실용성을 원하는 시대의 흐름과 합치했고, 프라다는 유행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2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요절했던 천재 화가 마사초(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 다루어진 점이 살짝 아쉬웠다~)와 '건축의 시인' 렌초 피아노다.

많은 미술사가들이 현대 미술이 있게 한 선구자라고 손꼽는 마사초, 신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사물을 보려는 시도인 원근법을 최초로 시도했던 그가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젊디젊은 나이에 돌연사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은 숨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는 원근법이라는 상식이, 14세기 초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마사초가 그린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 삼위일체>를 처음 본 피렌체 시민들은 깜짝 놀라 벽 속으로 걸어들어 가려고 했다는 일화는 마치 만화 속 상황처럼 재미있으면서도 한편 상식이라는 것,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시대의 상식이 다른 시대에는 뒤집어지기는 것이 도리어 상식이 되기도 하고, 그 시대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시도로 동시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뒤흔드는 사람은 그 시대에는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당한다는 것...

파리 퐁피두센터에 반한 이후로 쭉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렌초 피아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즐겁게 읽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제한 없이 다양한 건축 재료를 사용하는 등 실험정신이 강한 건축계의 반항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실험정신 뒤에 깃든 명장의 따뜻한 인간애와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명품 브랜드와 예술 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1,2부와 달리 이탈리아의 다채로운 요리를 이야기하는 3부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의 푸근하고 풍요로운 일상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 요리만큼 전 세계에서 널리 일반화되고 사랑받는 것은 없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며 거듭 실감했다. 커피, 파스타, 피자, 젤라토, 와인, 치즈, 프로슈토 햄... 특히 저자가 와인 전문가인만큼 와인에 대한 설명들이 참 알찼다. 특히 농가에서 포도주를 만들고 나서 남은 찌꺼기를 모아 증류시킨 토속주 '그라파'에 대한 이야기는 왜그리 감칠맛이 나는지, 복잡하고 오묘한 향을 가졌다는 그 술을 꼭 마셔보겠다고 벼르게 된다.^^

 

책을 덮으면서 저자가 나폴리에서 며칠 머물면서 관찰했다는, 골목의 가정집 저녁식사 풍경을 상상해본다. 식당 창문이 1층 길가로 나 있는 집들,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고 다같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간, 군침 도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오고... 저자가 그 골목을 지나 트라토리아(가정요리를 주로 파는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야경을 보고 들어올 때까지 매일 몇 시간이고 떠들면서 계속 식사를 했다는 그 흐뭇한 풍경을.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은 식사가 아니라 주유(注油)하는 거라고 늘 주장하는 나에게는 이상적인 풍경이 아닌가! 마음이 훈훈해지고 유쾌해졌다.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매력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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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별자리 이야기 어린이 고전 첫발 1
재클린 미튼 지음, 원지인 옮김, 크리스티나 발릿 그림 / 조선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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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12궁을 포함한 밤하늘 주요 별자리에 얽힌 그리스 신화들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 책장을 넘기며 밤하늘의 별자리에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들에 흠뻑 빠져들었다. 별자리 이야기를 읽다보면, 고대인들의 무궁무진하고 풍요로운 상상력과 이야기력(?)에 한없는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 이야기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일 것이다. 밤하늘에 흩어져 무심히 빛나는 별들을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태어나게 했으니.

 

표지부터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이 우선 눈길을 잡아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각 별자리를 표현한 신비로운 느낌의 그림들... 그린이 크리스티나 발릿은 다수의 일러스트레이션 상을 수상했다는데, 그럴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담하고 화려한 색깔과 화면 구성도 그렇고, 기하학적인 문양과 섬세한 묘사도 뛰어나다. 몇번 접했던, 그냥 예쁘게만 그린(혹은 예쁘지만 어딘지 조악한)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의 그림들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어린이용 책이지만 어른도 책꽂이에 꽂아둘 가치가 충분히 느껴지게 하는 멋진 그림들!

 

널리 알려진 별자리 이야기인 황도 12궁 외에도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리라자리, 백조자리, 뱀주인자리, 용자리, 안드로메다자리, 페가수스자리, 큰개자리에 얽힌 다채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근데 왜 '거문고자리' 대신에 굳이 '리라자리'라고 번역했을까?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 쓰였던 악기니 거문고가 아니라 리라가 정확한 명칭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천문학계에서 공식적으로 번역해서 일반에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쓰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페가수스'로 알려져 있는 걸 굳이 '페가소스'라고 번역한 이유도 모르겠다).

고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천체망원경이나 천문학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을 서로 이어서 여러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 사람들... 그렇게 경이로운 상상력을 품고서 밤하늘을 눈에 담았던 사람들 덕분에 후손들은 이렇게 풍요로운 이야기들 속에 살고 있다. 밤하늘의 별들을 서로 이어서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 고대 그리스로 그것을 전해주었던, 오천 년 전 바빌로니아의 유목민들에게 감사를!

 

각 계절의 대표적인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는 '별보다 반짝이는 별자리 이야기' 코너에서 어린 독자들을 위한 기초적인 천문지식들을 소개해주는 점도 좋다. 안그래도 이 책을 함께 읽는 동안, 조카가 "왜 계절마다 별자리가 다르게 보이는 거야?"라고 물어서, 음 지구의 공전 때문이야(이 주입식 교육의 오랜 힘이라니!)라고 건조하게 대답하려다가, '별보다 반짝이는 별자리 이야기' 코너 덕분에 그 호기심을 알차게 채워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구 어느 곳에 있는지에 따라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어린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게 다정하게 설명해준다. 남반구에서는 큰곰자리나 작은곰자리는 절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조카의 그 흥분이라니!(당장 호주에 있는 작은 이모에게 메일로 그 사실을 자랑(?)하는 열성을 보인다).

 

처음 별자리를 찾았던 어렸을 적 밤하늘의 설렘을 생각나게 하는 예쁜 책. 산타클로스가 되어,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머리맡에 한 권씩 놓아두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 봄이다. 북쪽하늘에선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을, 남쪽하늘에서는 봄철을 상징하는 별 아르크투루스와 처녀자리의 스피카를 눈에 담을 수 있는 행복한 계절! 아름다운 이 책으로 처음 별자리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조카와 함께, 이번 주말엔 천문대를 찾기로 꼬옥 손가락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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