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붕의 나나 시공 청소년 문학 55
선자은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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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책 뒤의 '작가의 말'을 보니, 처음에는 <빨간 지붕의 나나>라는 제목만 있었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것도 작가가 먼저 떠올린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제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해서 시작되었단다(뭔가 작가의 주변 인물답다.^^;). 그렇게 제목과 작가와의 만남은 갑작스러웠지만, 작가는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던 사람처럼 써 나가기 시작했다'(245쪽)고 한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란에 '취미는 상상하기, 특기도 상상하기다'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렇게 이 제목은 한 소녀의 강요된 기억과, 그 기억의 빗장을 스스로 열고 자신의 삶을 마주보려는 이야기의 세계가 되었다. 인간의 상상력, 이야기력(?)에 경배를!

 

나를 나라고 여기게 하는 근거는, 나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다. 나의 지나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니까. 하지만 열일곱 살 은요는, 아홉 할 때 유괴당해 그때까지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버린 이후 끝없이 '평범하고 무난한 척'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 조각이 빠져 완전하지 않은 사람'(32쪽)이 된 것이다. 한창 꿈을 키워가야 할 나이에, 모든 가족이 자신 때문에 틀어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자책하는 모습이 아프다. 그건 네 탓이 아닌데.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나만 아니라면 모두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32쪽)

 

자꾸만 나타나는 여자아이의 환영. 사건 후 외국에 나가있었던 사촌동생 미루가 내민 색칠공부 책과 그 속에 적혀있는 '빨간 지붕 나나 집' 의 주소. 어린 시절 그 사건이 있은 후로 가지 못했던 할머니 댁. 어린 시절 친구였던, 그리고 나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진이와의 만남. 유일한 친구 민세가 보내주는 믿음과 응원... 그 속에서 은요는 8년 전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서, 금지되어 있던 기억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어른들이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끝내 찾아내려 한다. 그 여정은 안쓰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찾아간다는 것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나도 은요를 힘차게 응원한다. 봉인된 기억 속에 갇혀 살기를 거부하고,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금씩 나아가는 그애의 마음을.

 

앞으로 이 이야기를 읽을 분들을 위해 기억을 찾는 과정과 충격 결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니...^^; 아 참,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은요의 친구 민세와, 또 민세에 대한 은요의 마음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사실 내가 10대였다면 은요와는 별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매사 시큰둥하고, 친구에게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좀 까다로운 아이. 하지만 민세는 그런 은요에게 한결같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준다.

 

늘 민세의 관심을 부담스럽고 귀찮게 여겼었지만, 할머니 댁에 오고부터 민세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마음을 털어놓는 은요의 변화가 귀여웠다.^^ 처음에는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무작정 따랐던 작은아빠가 과거를 마주하는 일을 방해하자, 은요는 처음으로 작은아빠에게 반항하려고 한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으로, 늘 고분고분했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기는 힘들다. 서울로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 알아야 할 게 남은 것 같아서 가기 싫다, 결국 가게 될 것 같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표현한 은요의 메시지에 민세는 분명하게 답해준다.

'네가 오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야 해. 너 자신을 믿어.'(184쪽)

그 말에 힘을 얻은 은요는, 처음으로 작은아빠의 말을 거역하여 그곳에 남고 비밀을 풀어간다. 친구의 말 한 마디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주고 무한한 격려를 해 준 것이다.

 

나도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 한 마디, 작은 위로와 격려 한 마디가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성장시켰던 것을 기억한다. 힘든 여정을 마친 은요가, 민세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이 따스했다. 진실은 때론 잔혹해서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은요는 스스로 그 진실과 대면해내는 힘을 보여주었다. 혼자가 아니라 응원해주는 이들과 함께이기에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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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별아이 료마의 시간
신보 히로시 지음, 노인향 옮김 / 지식너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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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네가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 료마에게서 배운 것이 정말 많단다. 다 안을 수도 없을 만큼 크나큰 감동과 고마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지.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네가 나에게 알려주었어...

  정말 기쁘다. 앞으로의 삶이 지금처럼 평탄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아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료마가 힘을 내고 있는데 질 수는 없잖아. 앞으로도 너를 지킬 거야. 아빠는 언제나 너의 아빠니까 말이야."(119쪽, 료마의 열한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아빠의 편지 중에서)

 

"너는 아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단다... 네가 아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우연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를 만나고 나서부터 아빠는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삶의 태도까지 모든 것이 변했어.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지. 너와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귀중한 것들이야.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정말로 고맙다. 중요한 것을 알려줘서 고마워. 너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라기만 해. 정말로 고맙다."(161쪽, 료마의 열네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아빠의 편지 중에서)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아빠가 12년 동안 써내려갔던 일기. ​일기의 주인공은 세 살 때 소아 자폐증과 정신지체 판정을 받았던 료마다. 그리고 료마의 아빠와 료마의 할아버지, 할머니, 학교 선생님과 이웃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이 일기는, 맑았다. 푸른 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책 표지처럼. 들여다보는 내 마음까지 덩달아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마음을 미리(?) 단단히 먹었던 마음 한구석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그리고 평범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흠뻑 빠져들어간다.

 

처음에 료마 아빠는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된 거라고, 료마의 자폐증은 나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료마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얼마나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기도했을까. 매일 밤 꿈속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말을 거는 료마를 보았고, 그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는 료마를 보면서 좌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료마가 4살 되던 해, 료마의 이름을 따온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인 고치로 떠난 3박 4일 자동차 여행. 하지만 료마는 느닷없이 패닉상태에 빠진다. 첫날부터 고민에 빠진 부부는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으나 사흘 내내 료마의 패닉은 계속되었고, 나흘째 되던 날 료마와 아내를 신칸센에 태워 집에 보낸 료마의 아빠는 결심했다고 한다.'이제 그만 료마의 장애를 인정하자. 그리고 료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찾아보자'(28쪽)는 결심을.

 

그리고 료마의 아빠는 그 후 수많은 시간 동안 그 결심을 잊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것,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료마의 아빠는 아무리 료마가 더디 가더라도, 료마의 눈높이에 맞추어 세상을 보고, 료마의 발걸음에 맞추어 함께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료마가 아무리 늦더라도 한걸음씩 성장하고 있음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료마는 조금씩 커 간다. 그리고 느린만큼, 료마의 성장에 대한 기쁨과 감사는 더욱 커진다.

 

우리 가족에게는 '당연히'라는 것은 없다고 하던 료마 아빠의 말이 기억난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라도, 료마와 료마 아빠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장면이고 놀라움과 감동이 뒤섞인 사건이다.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닌 오직 료마의 시간에 맞춘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료마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한다는 것, 오직 그것만으로 하늘을 날듯이 기뻐하는 아빠의 모습. 료마야, 네 웃음이 그렇게 티없이 맑은 것은 그 때문이었구나. 네가 만들어 온, 수없이 많은 '기적'의 순간들을 함께 기뻐하는 아빠와 너를 떠올리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아빠가 패스한 공을 처음으로 다시 아빠에게 패스해 보여준 너. 입원하신 할머니께 편지를 전하는 생애 첫 심부름을 무사히 마쳤던 너. 부추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서 "미역, 더 줘!"라고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 너. 멀리서 지나가는 버스를 보며 '버슈'를 외치며 눈을 반짝이던 너. 차가 출발하지 않자 자동차 엔진 소리를 흉내내어 "투~타타"하고 내뱉았던 너. 학교에서 스스로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옷을 갈아입었던 너. 처음으로 아빠 등에 수건을 대고 문질러줬던 너. 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하던 밤 처음으로 귓가에 "아빠!아빠!"하고 불렀던 너. 초등학교 졸업식 날 똑바로 걸어가 졸업장을 손에 꼭 쥐어 아빠 눈에 눈물을 흐르게 했던 너. 선생님이 그린 선에 맞춰 스스로 연필을 쥐고 그 위에 선을 그린 료마. 14년의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아빠에게 '바이바이'라고 인사했던 너.

 

 그래, 이런 것이 바로 행복의 모습인 것을. 네 아빠가 말했었지. 처음으로 네가 아빠가 준 공을 패스해 준 날, 꿈이 현실이 되었다고. 너와 함께 공을 패스하며 노는 것이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여겼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불과 1~2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네가 패스한 공이 꿈과 희망을 싣고 아빠의 가슴에 와 닿았고, 그 후로 아빠에게 '포기'란 단어는 사라져 버렸다고.

너는 정말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구나. 왜 그렇게 다들 힘겹게, 안달복달하면서 그것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 왔을까 싶어. 네 아빠 말이 맞아. 네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어. 문어별&바위별 아이인 료마야, 아니 이젠 문어별 청년이라 불러야 하겠구나. 앞으로도 아빠와 함께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행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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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샤쓰 눈이 깊은 아이 문학을 보다 1
방정환 글, 이일선 그림 / 눈이깊은아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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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년샤쓰. 참 정겨운 제목의 이 이야기는 방정환 선생님이 몽견초란 필명(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필명을 돌려가며 썼다고 한다)으로 1927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했던 원고를 되살린 책이다. 1927년이면 발표된 지 거의 90년이 다 되어가는데... 좋은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빛을 발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슴 따뜻한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아니, 모든 것이 흘러넘치도록 풍요로우면서도 오히려 마음은 더 공허한 시대라 더 그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나는 사실 만년샤쓰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담임선생님이 이 책의 주인공 창남이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던 것이다(그때는 현대화(?)해서 '만년셔츠'라고 들려 주셨다^^;). 키가 작았던 나는 교탁 바로 앞 맨 첫째줄에 앉아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열심히 창남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집이 타 버린 상황에서도 더 딱한 처지의 동네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옷들을 나누어주었던 창남이와 창남이의 어머니. 추워서 떨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신의 하나뿐인 셔츠와 양말을 벗어 드린 창남이. 새 원피스가 갖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던 철없던 나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었던 이야기였다. 나도 창남이같은 사람이 되어야지,하며 일기도 썼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창남이. 여전히 밝고 쾌활하고 시원스럽게 잘 웃고, 누구보다도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창남이를 보면서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이십 리 밖에서 학교를 걸어 다니면서도 언제나 씩씩하고, 다 해져서 너털거리는 구두를 헝겊과 새끼줄로 감아매고 오느라 생전 안 하던 지각을 하면서도, 체조 시간에 양복저고리를 벗으란 선생님의 호령에 맨몸 '만년샤쓰'를 보이면서도 언제나 구김살 없이 꿋꿋한 창남이. 하지만 그 시린 겨울에 맬가슴에 양복저고리, 다 해진 겹바지에 맨밥에 짚신으로 먼 길을 걸으며 얼마나 추웠을까. 그리고 아무리 밝은 창남이지만 친구들의 시선과 놀림이 왜 부끄럽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한창남! 왜 웃옷을 안 벗나?"

창남이의 얼굴은 푹 수그러지면서 빨개졌다. 그가 이러기는 참말 처음이었다.

한참동안 멈칫멈칫하다가 고개를 들고,

"선생님, 만년샤쓰도 좋습니까?"

"무엇 만년샤쓰? 만년샤쓰란 무어야?"

"매 매 맨몸 말씀입니다."(26~27쪽)

 

항상 유쾌하게 웃던 창남이가 마지막에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남이 걱정이 있어 얼굴을 찡그릴 때에는 우스운 말을 잘 지어내고, 동무들이 곤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좋은 의견도 잘 꺼내는'(12쪽) 창남이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니. 날마다 한 가지씩 옷이 없어지는 이유를 묻던 체조 선생님도, 창남이의 모습을 보고 고아원이다,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아이 같다고 떠들던 아이들도 아마 같은 마음으로 함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여덟 살의 내가 처음 만났던 창남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일기장에 썼던 그 다짐도. 어른이 되어서 떠올려보니 참 부끄럽기만 하다. 자기연민과 번민으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 부끄럽다. 창남이는 결코 자신의 아픔 속에 갇혀있지 않았는데.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거나 비관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더 헤아리고 보듬어주었는데. 나는 창남이보다 훨씬 큰 어른이지만 마음의 키는 너무나 한참 아래다. 부끄럽고 막막하지만 마음을 다잡아본다. '만년셔츠'입은 창남이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셨던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33세의 나이에 서울대학병원 병실에서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은 방정환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그 어두웠던 시대에서도 오직 어린이들을 생각했던 방정환 선생님. 일제의 눈을 피해 필명을 써가며 창남이의 이야기를 쓰면서, 아마 행복한 얼굴이셨을 거다. 우리가 창남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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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빛나는 밤에 - 천체물리학부터 최신 뇌 과학까지, 우주의 역사부터 과학의 역사까지
이준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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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138억 년에 걸친 우주의 역사에서 수많은 우연과 사건이 얽히고설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10쪽)

 

3월, 진주에서 4개의 운석이 발견된 이후 한바탕 운석 열풍으로 떠들썩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 주변의 반응들을 살펴보니 운석의 소유권에 대해서, 그리고 운석의 천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보통 관심이 집중되는 듯 했다. 운석 가격이 수억 원에 달한다며 '로또 운석'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지만, 과연 왜 그렇게 운석이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운석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오로지 경제적인 가치에 대해서만 초점이 맞춰지는 듯해서 한편으론 씁쓸했던 운석 열풍이었다.

이렇듯 여전히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들의 낯선 영역, 소수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는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과학 지식을 일반인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고맙게 느껴진다. 저자의 표현대로, '비타민을 먹듯이 누구라도 쉽게 과학 교양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9쪽)를 고민한 흔적이 책 곳곳에서 느껴졌다. 책장을 넘기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져들었다.

 

총 11장의 '빅 히스토리'로 나누어진 이 책의 1장은 빅뱅에서 출발한다. 138억 년 전, 거대한 폭발 이후 장엄한 역사가 마법처럼 펼쳐지고 별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46억 년 전으로 가서 새로운 질서인 태양계가 형성되고 드디어 지구의 등장! 3장에서는 36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고, 4장에서는 6억 년 전 생물의 번성, 진화의 대폭발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렇게 자꾸만 시간이 흘러서 20만 년 전 인류가 등장하고, 1만 년 전 문명이 시작되고, 500년 전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치고... 10장 현대 과학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11장으로 끝을 맺는다(인류가 차지하는 분량(?)이 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지를 다시금 실감한다. 우리는 세상의 지배자인 척 자만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시간별로 구성한 전체적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물리, 화학, 천문학, 생물학, 수학, 역사까지 다채로운 분야의 지식들이 서로 맞물려서 이해하기 쉽게 샤샤샥 펼쳐진다. 어려운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쓰는 친근한 말들로 차근차근히.

 

한 주제당 배분한 양이 3~4장 정도로 간략하게 정리해 주는 점도 좋다. 사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빼기가 더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법인데, 더 파고들어가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핵심을 짚어주는 점이 마음에 든다. 개념이 조금 어렵다 싶은 부분은 어김없이 일상생활이나 영화 이야기 등에 빗대어 친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챕터 마지막 부분에 늘 등장하는 '세상이 좀 달라 보이나요?'에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하며 신나게 책장을 넘긴다. 진짜다. 달라 보인다. 세상에 과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다니. 이런 식의 수업을 고등학교 때 만날 수 있었다면 내 진로도 바뀌었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고.^^;

 

책의 부록인 '<과학이 빛나는 밤에>가 추천하는 과학도서 43'도 무척 유용할 것 같다. 사실 좋은 과학 책은 많지만 내게 맞는 책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멋진 제목에 꽂혀 두꺼운 과학책을 샀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장식용으로 묵혔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3단계 난이도별로 정리하여 간략하고 깔끔하게 각 책들의 특성을 정리해준다. 이 책 <과학이 빛나는 밤에>로 '평생 권장량'의 과학상식을 부담없이 꼭꼭 잘 씹어 소화시키고 나서는, 또 어떤 맛있는 걸 먹어볼까?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지구라는 착한 행성,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은 평범해보이는 자연현상들,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사물들도 다 너무나 복잡 미묘하고, 격렬하고 역동적인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을. 경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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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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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끔찍한 아우슈비츠의 사진을 보지 못하거나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어보지 못한 어린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은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난징의 강간에 대해 물어보면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 심지어 최고학부를 마친 지식인들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70년 전 난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282쪽)

 

부끄럽게도, 나도 그 '대부분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난징대학살에 대해 몇 차례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리 특별한 관심을 가져본 기억도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책 첫 페이지에 있던 문장들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대학살을 잊는 것은 두 번 째 학살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 위젤)"

몸서리쳐진다. 질서정연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마음편히 이 책의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저자 아이리스 장에게 이 책을 쓰게 한 원동력은, 이 잊혀진 아시아의 홀로코스트를 결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저자는 소녀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난징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듣고 자랐다고 한다. 수년간의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저자의 부모님은 미국으로 건너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중일전쟁의 악몽을 잊지 못했고, 그녀가 그 사건에 대해 잊지 않기를, 특히 난징의 강간에 대해 기억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읽는 것도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 책을 쓰는 과정이 얼마나 길고 험난했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리스 장은 자신의 이 책이 '난징에 남아 있는 수십만 개의 주인 모를 무덤에 바치는 묘비병인 셈'(313~314쪽)이라고 말한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난징대학살에 대한 진실을 세상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수많은 증언자들을 추적하여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발굴해낸 고통스러운 소재들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우울증에 걸려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 바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 큰 주목을 받자 일본 극우세력들의 끈질긴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릴 뿐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여러 차례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해야 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만행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했다.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이런 짓들을 저지를 수가 있었을까...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학살에 대한 증언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이리스 장이 '닫는 글'에서 '난징으로부터 얻은 몇 가지 교훈 중 하나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종잇장처럼 얇다는 사실이다'(314쪽)라고 단정지은 것이 정말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리스 장이 발굴해낸 진실은 난징대학살의 잔학성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세계에 걸쳐 학살의 기록을 찾아다니면서 당시 목숢을 걸고 일본에 대항헤 수십만 명의 중국인들을 살려낸 몇몇 영웅들의 삶을 찾아내었다. 대학살 기간 동안 국제위원회를 구성하여 난징안전지대를 만든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기적처럼 들렸다. 그런 지옥 속에서도 끝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그들은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그 참혹한 난징을 떠나서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 난징의 중국인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던 나치당원 존 라베,  난징대학살 기간 동안 난징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외과의사로 자신의 건강을 해쳐가며 사람들을 치료했던 로버트 윌슨, 일본군으로부터 수많은 여성들을 보호했던 용기로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이라 불렸던 미니 보트린... 하지만 폭력과 공포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애를 보여준 이들이 치러야만 했던 대가는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불명예스럽게 추방되었고, 모국에서는 조사받고 배척당했으며, 치유하기 힘든 정신과 육체의 상처로 인해 자살을 감행하기도 했다. 

 

아이리스 장은 이 책을 쓰면서, 역사뿐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과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난징대학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징의 강간은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십대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그들을 살인 병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이 사건은 잘 설명해준다. 두 번째로 난징의 강간은 민족 학살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중략)... 세 번째 교훈은 가장 비참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대량 학살을 받아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수동적인 방관자기 되었다."(314쪽~315쪽)

 

지금도 일본의 역사 왜곡 망언은 계속되고 있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일본의 침략 전쟁이 신성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런 어두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비참한 세 번째 교훈, '수동적인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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