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우선,, 노르웨이 출판업자들과 자국의 독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만약,, 우리나라의 어느 신진 작가가 미스터 크나우스고르가 쓴 <나의 투쟁>류의 작품을, 그것도 3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소설을 들고 와서 한 출판사에 출간을 원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출판사는 이 작품을 출간해 줬을까?... 설령 용기(?)를 내서 책이 출간됐더라도 대한민국의 독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사서 읽었을까?... 물론 한국의 독자들도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혹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비롯한 시리즈들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 작품들은 대하소설,, 즉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태백산맥>류의 소설들 처럼 한반도의 수난사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조명하려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지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과 같은 일상적인, 한 개인의 지극히 평범한 일들을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한 책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그런 류의 작품이 이 나라에 출간됐다면 글쎄,, 솔직히 난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았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노르웨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이렇게 세 나라는 지구상에서 복지정책이 가장 잘 돼있는 나라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쓸데 없이 이런 얘길 주절거리는 이유는,, 한 나라의 복지정책이 잘 돼 있을수록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이토록 여유로움의 형태로 나타나, 한국에서 몇 십년을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나의 투쟁>이라는 이 작품이 그닥 심금을 울리거나 감동을 자아내는 소설이 아니라고 느껴지는데도, 노르웨이 본국에서는 총 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50만 부가 팔렸다는 얘길 접하고서 '과연 복지국가 국민들의 감성은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른 데가 있구나'라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또한번 빠지게 됐다..

 

1. 문학 이노베이터의 실체..

월 스트리트 저널 매거진의 광고 내용이다.. 즉 <나의 투쟁>을 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낸 개척자라는 칭찬이다.. 문득 20세기 최고의 소설 <율리시스>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위대한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가 떠오른다.. 물론 크나우스고르 스스로는 말도 안되는 비교라고 하겠지만, 이 책을(비록 1권밖에 읽지 않았지만)조근조근 읽어가면서 느낀 것이 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벤치마킹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그럴것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크나우스고르 자신이 어릴 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미치도록 읽었었다는 대목도 나오는데다가,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이 자신의 떠오르는 기억에 의해 시점이 순간순간 변하기도 하고, 심심찮게 뜬금없이 주위의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를 하거나, 어느 예술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세밀하게 비평하는 부분들은, 작가가 자신이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런 비평을 작품 속에 담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여러가지 비슷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유수의 세계적 언론사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새로운 형식의 소설기법을 칭찬하는 걸 보면, 앞서 말한 프루스트 따라하기는 아닌 것 같고 나같은 일반 독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 대단한 문학적 기법의 창시자이긴 한 모양이다.. 

 

2. "응석받이"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작품내내 작가가 우는 소리로 작가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섭섭함과 원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결론은,, 결코 작가의 아버지에겐 어떤 점에서도 크게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노르웨이 한 도시의 중학교 선생님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했고,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무난하게 키웠다.. 특별히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대했거나 학대하지 않았고, 별다른 괴롭힘도 주지 않았다.. 도대체 작가는 자식으로서 어떤 점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 원망, 심지어는 증오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 것인지 나로서는 뚜렷한 이유도, 이해할 만한 잘못된 아버지의 모습도 찾지 못했다.. 다만,,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형과 자신의 자유와 정체성 마저 인정하려들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유린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노르웨이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정서와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꽤 많은 차이가 난다는 걸 느껴본다.. 작가는 1968년생이고 따라서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지면 인생의 마일리지가 어느정도 쌓인 세대이다.. 신세대도 아닌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받지 못했다고 이토록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작품 속에 그 원망과 아쉬움을 녹여놨다는 건,, 그가 응석받이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결론밖에는 달리 뭐라 할 말이 없다..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작가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로서 삶을 마감한 부분에서는, 이미 자식들이 장성한 뒤의 일이었으므로 그건 결코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알콜중독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건 아버지의 인생이라는 얘기이다.. 성인이 된 자식으로서 불만을 가질 사항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3. 해도해도 끝이 없는 청소..

작품의 후반부에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작가의 심리적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여지껏 책을 보면서 그토록 세세하게 청소하는 장면을, 그것도 실시간으로 중계하듯 묘사해 놓은 작품은 처음 봤다.. 당시에 노르웨이의 마트에서 판매하는 세제란 세제는 모두 총동원하여 부엌 침실 거실 욕실 계단 마당...쓰레기를 치우고 쓸고 닦고 문지르고 광을 내고 헹궈내고...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가 지금 소설을 읽는 건지 아님 청소하는 방법에 대한 실용서를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청소하는 장면이 쉴새 없이 묘사된다.. 왜 그랬을까?.. 작가는 왜 청소하는 장면을 그토록 지면에 많이 할애했을까?.. 표면적인 이유야 더러우니까 치우는 것이고, 그 집에서 장례식을 치루기로 했으니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래서 기절할 정도로 청소를 깨끗이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즉 작가는 그 집을 청소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신이 몇 십년간 쌓아왔던 애증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저 지워버리는 것에만 중점을 뒀다면 그렇게 오랜시간 청소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흔적을 지움과 동시에 그 집에 아직도 남아있는 아버지의 냄새,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의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원망한 만큼 그토록 집착했던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존재의 실체를 아직까지 저 세상으로 보낼 준비가 안 돼있던 것이고 또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비록 1권밖에 못 읽었지만),,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야기되는 모든 장애와 곤란을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 넘고 해결하는 모습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누구나가 다 경험하고 성공하며 좌절하고 실패하는 사람들 속에 자신이라는 한 사람의 얘기를 멋지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투쟁이라는 단어로 상징화 한 좋은 작품을 탄생시킨 듯하다.. 

 

"가끔씩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마다 글을 쓰고, 글을 쓸 때마다 좌절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오늘도 세상살이에 끝없는 투쟁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픈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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