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뒤에 같은 반 친구 설터(가명)가 우리집으로 전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내 가명)~ 뭐하냐?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 설터가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엎드려서 만화책 보고 있어.  

좀 의외라는 듯 시큰둥하게 나는 대답했다..

설터는 같은 반 친구지만 나하고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좀 노는 녀석이었고 나는 정반대로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 따라서 우리가 그닥 친하게 지낼 일은 더더욱 없었다..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 나눠 피우는 사이 정도쯤이었을까?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시골 외할아버지 사시는 데 놀러가지 않을래? 

평소답지 않게 또다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설터가 내게 제안했다..

최소한도 나와 단둘이 방학 때 놀러갈 사이는 아닌 녀석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니 좀 당황스러웠지만,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러마고 대답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설터는 꽤 흥분돼 있었다.. 애들도 아니고 무슨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가는데 저렇게 기분이 들떠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덩치는 커다란 녀석이 정신연령은 아직도 어린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주절주절 지껄여대는 덕분에 심심하진 않아서 그건 좋았다.. 지금쯤 집에 있었다면 날씨는 더운데 할일은 없고 그저 방바닥에 퍼질러져서 누나가 구독하는 여학생 잡지나 훔쳐보고 있었을 테니까..

잠시 눈을 돌려보니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문득 영어 쪽지시험 때 틀린 갯수만큼 30cm 나무 자로 뺨을 때리던 미친개 선생님의 손동작 같아보였다..

 

그러니까,,지금도 기억하는 건 버스를 타고 충청남도 조치원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지명이 잘 생각나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당시에 연세가 팔순쯤 되신 설터의 외할아버지가 당신의 아들내외,,즉 설터의 외삼촌 내외분과 같이 살고 계셨다.. 

외숙모가 늦은 점심으로 만들어주신 수제비와 오이무침을 맛나게 먹고 해가 길어져 아직도 훤한 초저녁 시골마을의 풍경을 디저트 삼아 음미하며 걷고 있었는데 순간,,허연 살덩어리가 검정빛 냇물과 한몸으로 뒤엉켜있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가버렸다.. 저 앞 냇가에서 어떤 여자가 반라의 차림으로 멱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일곱 살 남자아이의 가슴은 저절로 붕뜨며 뜨거워졌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그날 밤 설터와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데 좀전에 냇가에서 봤던 그 여자 생각에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곁눈으로 힐끗 훔쳐보면서 지나가는데도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볼일만 보던 그 여자. 마음이 싱숭생숭. 늦게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어서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곁에서 자고 있던 설터는 벌써 세수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ㅡ 소크라테스~ 우리 오늘 조치원 가자.. 여긴 심심하고 답답해서 재미가 없지?  할아버지 뵀으니까 됐고 조금 있다가 떠나자.. 

어제 봤던 그 여자를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설터가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조치원으로 향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다시는 못 와 볼 것 같은 곳을 등진 채.. 

 

조치원은 설터의 외할아버지가 사시는 시골보다는 조금 더 발전된 곳이었다.. 설터의 또다른 외삼촌 내외분이 살고 계신 이 곳에서 며칠간 지내자고 설터가 제의했다..

평범한 단독주택에 들어서니 어른들이 계셨고 우리는 인사를 드린 뒤 밥을 먹고있는데 잠시 후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단발머리 여학생이 보였다.. 하얀 교복 상의와 감청색 치마. 결코 예쁘지 않은 얼굴. 시골 소년 같은 피부색. 여학생들만 앉아있는 학급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애들 중에 하나. 대학입시 때문에 방학인데도 학교에 가야만하는, 설터와 나보다 두 살 위인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 설터의 외사촌 누나였다..

 

그날 저녁,, 외삼촌과 외숙모는 며칠간 여행을 가신다고 하면서 집을 떠나셨다..

집에는 설터와 나, 외사촌 누나 그리고 얼마 전에 결혼을 한 스물대여섯 살쯤 된 설터의 외사촌형 내외 이렇게 남게 되었다..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터와 나 그리고 외사촌 형 이렇게 세 사람은 고스톱을 치면서 밤 늦은 줄도 모르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사촌 형과 갓 결혼한 형수님이 남편에게 이제 그만 자러 가자고 보채기 전까지는..

 

갑자기 내가 누워있는 방안이 고요해졌다.. 끈적거리는 밤공기가 혀를 낼름거리며 내 몸 구석구석을 핥아대고, 오래된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아주 천천히 똑딱거리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분위기.

설터와 내가 있는 방을 지나 마루 옆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설터를 부르는 외사촌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설터~ 이리 좀 와볼래? 

옆에 누워있던 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외사촌 누나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몇시쯤 됐을까?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나는 이렇게 불을 환히 켜둔 채 드러누워 천장의 낡은 벽지 무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저 옆방에선 설터와 외사촌 누나가 맞고스톱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고스톱을 칠 거면 나도 좀 끼워주지 왜 지들끼리만 치고 저러는지 샘이 났다..

쟤 왜 안 자니? 

내가 누워있는 방에서 외사촌 누나가 설터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히.

잠시 후,,우당탕 방바닥에 몸 부딪치는 소리. 비닐장판에 살갗이 스치며 찌익찌익 거리는 소리. 가끔씩 터져나오는 거친 호흡소리. 애써 참아보지만 조절이 잘 안 돼 나오고야마는 옅은 신음소리.

 

얼마 후 설터가 실실 쪼개면서 내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 처럼.

누나가 너 왜 안 자냐고 묻더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설터가 나보다 싸움을 훨씬 잘했으니까.. 그냥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방에 불을 껐지만 활활 타오르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퍼져있는 내 모든 촉수는 결코 꺼지질 않았다..

그냥 이렇게 잠들 수는 없다.. 나도 외사촌 누나가 있는 방에 가볼까? 나도 설터처럼 누나와 섹스를 해볼까? 어쩜 누나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아니지. 만약 그렇게 했다가 누나가 소리라도 지르면서 욕을 해대면 그땐 어떡하지? 그럴 땐 힘으로라도 제압해서 덮칠까? 소삼하고 용기없고 겁쟁이인 내가 과연 그런 힘이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만 하면서 밤을 꼬박 세웠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 밤엔 외사촌 누나가 설터를 한번 더 불렀고, 설터는 좋아라하고 달려갔으며, 설터가 다시 돌아왔을 땐 나역시 억지로 자는 척을 하느라 개고생을 했다.. 이게 여행이라니.

 

나도 모르게 얼핏 잠이 들었던지 마당의 인기척 소리에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뭐에 이끌린 듯 몸을 일으켜 바깥을 내다보니 외사촌누나가 학교에 가려는지 대문을 열고 있었다..

순간,,한여름 눈부신 아침 빛살에 흠뻑 젖어 유난히 더 하얗게 보였던 누나의 교복. 그리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 

고개를 돌려보니 설터는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입을 헤벌리고 여전히 잠에 빠져있었다.. 지나가면서 발끝으로 녀석의 허벅지를 슬쩍 걷어찼다.. 그래도 모르고 잠만 자는 놈.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까지 내 주위에서 타인이 섹스를 하는 걸 어젯밤 처럼 실감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빨간책이나 야한 영화를  통해 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말 현실적인.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근친상간. 성폭행 만큼이나 나쁜 짓.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건 하면 안 되는 짓.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고, 굳이 핑계도 대지 않고 솔직히, 설터의 외사촌 형이 낚시를 하러가자는 제의도 거절한 채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설터와 조치원을 버려두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설터는 왜 나와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까?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혼자서 조치원에 가면 좀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누구랑 같이 가긴 가야겠는데 소크라테스가 아닌 다른 친구, 그러니까 좀 드센 놈을 대동했다가 괜히 말썽이 나면 골치 아플 수 있다는 걸 미리 염려한 건 아니었을지.. 외사촌 누나와의 로맨스(?)를 꿈꾸는데 나 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용한, 자기주장이 없어보이는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지. 내가 꿈(?)꿨던 것처럼 설터가 하는 짓을 보고 자기도 하겠다고 나서는 그런 드센 녀석과 동행했다면 정말 문제가 커질 수도 있으니까. 

 

설터는 외할아버지를 뵙기 위한 것, 친척 어른들께 인사를 하려는 것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외사촌 누나와 그짓을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 나를 끼워놓고 엑스트라로 써 먹은 것이다.. 외사촌 누나와는 벌써 일 년 전부터 그짓을 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설터의 말을 나중에 들었을 때 비로소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들의 그림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친한 친구도 아닌 설터에게 당시엔 배신감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나를 자신이 노는 데 이용만 했다는 것에 분노 마저 치밀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언제부터인가 설터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위선적일까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십 걸음에서 백 걸음 사이에 놓여있는 도토리들이 서로 자기 키가 크다고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러자 어느새 설터에게 그동안 가져왔던 불쾌감이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한 조각 버터가 되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근친상간에 대한 기억마저도.. 

 

나는 이제 더이상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아니다..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다.. 무감각해졌고 뻔뻔스러워졌으며, 내 마음 속 진심이라는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보이고 있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가끔 옛날 생각이 나고, 그럴 때면 하얀색 교복을 차려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쟤 왜 안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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