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교양인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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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교양인

거장이라고는 해도 사망(이라고 해야 할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죽기는 했으니) 당시 향년 45세, 어리지는 않아도 나름 젊은 나이였으니 '젊은 날'의 그와 후기 작품세계를 구분하는 일은 영 난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대가의 반열에 올라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기 이전, '소설가 미시마'로만 존재하던 때, 끓어오르는 혈기와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하던 때의 작품은 이후의 냉소와 거시적 세계관의 시기와는 퍽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의 바다〉를 시작으로 미시마의 작품세계에 파고든 독자에게 『파도 소리』에 드러나는 작가의 자의식과 모상을 탐구하는 일은 당황스러운 동시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내 깔끄럽게 느껴졌던 부분도 이와 별개라고 할 수는 없으니. 서설가는 무엇을 그려내는가? 재-구성된 세계에서 그는 어느 위치에, 어떻게 거하는가? 질문들은 이 이야기를 풋풋하고 거친 사랑의 단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와 멀지 않다.

p.98 신지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인 경건함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아직 여자를 몰랐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여자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인 핵심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오래도록 깨어날 수 없을 듯한 취한 기분과 문밖의 기괴한 파도 소리, 나무 끝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가 자연의 한결같이 고조된 가락 속에서 함께 물결치고 있음을 느꼈다. 이 감정에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듯한 지복이 깃들어 있었다.

p.102 치요코는 도쿄가 그리웠다. 이렇게 폭풍이 부는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동차가 오가고 승강기가 움직이며 전차가 혼잡한 도쿄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곳에서는 '자연'이란 것들은 일단 정복되어 있고 아직 버티고 있는 자연의 위력은 적이었다. 그러나 이 섬에는 사람들 모두 자연의 우방이었고 자연의 힘에 가세했다.


미시마의 도덕적 결벽성, 흠결없는 자아상과 순수에 대한 집요한 고수는 주인공 신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우직하고 무심한 심성과 단조로운 반복으로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과는 작가가 열망해온 남성성과 결부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지위나 처세술 따위가 아닌, 타고난 '근성'과 부단한 수행으로 증명된 성취라고 말해지는 듯하다.

그의 주인공은 미숙하다. 서툴고 거칠다. 그러나 이는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파와 정념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성을 드러내는 면모로 그려진다.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주인공은 그 자신만의 속도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어떤 '숭고함'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자격은 그 자신의 성취로 얻어지는 동시에 초월적인 가호, 고유하고 신비한 '도덕'의 보호 아래 있다. 마치 영웅의 그것과도 같은 초월적 각성과 단련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성장은 거듭 증명을 요구받고, '시험'을 통과한 후의 '자격'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성취물이 된다.

p.56 두 사람의 볼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내음이 바다 냄새처럼 강하게 퍼지면서 서로의 열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마르고 갈라진 두 입술이 맞닿았다. 소금 맛이 조금 났다. 신지는 하쓰에의 입술이 해초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지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경험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른 몸을 떼고 일어섰다.

p.205 신지는 귀를 기울였다. 그 사내다운 얼굴 바로 위에는 태풍이 있었다. 그는 낮잠을 자는 듯 포근한 자연의 품 안에도, 지금 이 순간처럼 광기로 얼룩진 향연의 자리에도 똑같이 초대받을 자격이 있었다. 비옷 속에서 비 오듯 땀이 나서 가슴과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비옷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목이 둥근 흰 셔츠를 입고 맨발이 된 신지의 모습은 어둠과 폭풍 속에서 혼자만 우뚝 솟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상 일색으로만 읽는다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작품 내내 두드러지는 시각적 묘사는 일방적인 관음과, 자연 그리고 그 일부로 살아가는 이들의 생명력에서 뿜어져나오는 관능 사이를 줄타기하며 이어진다. 후자를 근현대 서구의 전능신의 무구하고 순결한 피조물보다는 사납고 위험한, 이해 너머에 발을 걸친 야생의 짐승에 가까운 이미지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상에 어쩐지 은근한, 성애보다는 멸시 어린 경외의 대상와도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와 가깝다 여기는 것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선은 사람의 매력이나 욕망어린 이끌림보다는 잘 자란 과실과 짐승에의 경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p.14 청년은 주방 문 앞에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넙치는 이미 흰 법랑 대접시에 놓여 가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가미에서 피가 흘러나와 희고 매끄러운 살갗에 번지고 있었다.

p.173 장작불 주위로 밀치락달치락 법석을 떨고 있는 수많은 유방 중에는 이미 시들어버린 것도 있고, 마르고 딱딱해진 건포도 같은 젖꼭지만 흔적처럼 남아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잘 발달한 대흉근이 무거운 유방을 아래로 처지지 않게 넓은 가슴팍 위에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생김새는 그들의 유방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날마다 태양 아래에서 과실처럼 자라 왔음을 말해준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주인공을 통해 그려지는 자아상은 여러 인물을 안팎으로 조명하며 거듭 단호하게 고수된다. 이는 일견 대조의 형태를 띄나 결과적으로는 주인공의 '오염될 수 없는 본질'을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모종의 고집, 그 자신조차도 이렇게 해야만 지켜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는 비단 그의 '종착지'를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미시마의 작품들 전반에서 느껴지는 예민하고 위태로운,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집착은 그를 둘러싼 명성과는 달리 그가 스스로를 얼마나 혹독하게 몰아붙였는지, 그렇게 벼려진 '극의'가 도달한 자기파괴적 결말이 어떻게 숭고로 고착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풋풋한 사랑의 포말로 소개할 것이다. 우뚝 선 존재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인간 미시마의 연약하고 사나운 발버둥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p.148 '그 애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이상 기대하면 못써. 그 애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지. 그걸로 만족하고 그 이상 그 애의 사랑을 기대하면 안 돼. 그 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왜 못된 짓을 한 걸까. 나의 질투 때문에 어째서 그 애를 지독한 불행에 빠뜨렸단 말인가. 더구나 내가 배신했는데도 그 애는 나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선물을 주었어. 속죄해야 해. 무언가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보답을 다해야 해.'

p.232 그제야 신지는 생각했다. 그토록 고생했지만 결국 하나의 도덕 안에서 두 사람을 자유로웠으며 신들의 가호는 단 한 번도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마침내 어둠에 둘러싸인 이 작은 섬이 두 사람의 행복을 지키고 사랑을 이루어주었다고. (...) 신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험을 헤쳐 나온 것은 자신의 힘 덕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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