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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쓰는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없다. 하루종일 넘겨본 인터넷 게시물이며 동영상이 몇 갠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묻는다면,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하루종일 쏟아진 말과 글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되묻고 싶다. 언택트니 비대면이니 하지만, 발문처럼 차고 넘치는 연결들은 정작 한없이 낮은 밀도 탓에 세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
뒤탈없고 가벼운 관계만 범람한다. 부스러기 차 버리듯 툭 털어내면 그만일 말과 '우리 사이'들. 이해하려 애쓸 수록 벌어지는 모호와 오해의 간극. 그런 이유로 사는 내내 이질감을 존재의 무게추로 삼아왔다.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연한 살을 몽땅 안으로 말아넣고 그저 둘둘 굴러다니고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걸까. 북적대는 번화가에서, 볕 좋은 강가에서 우뚝 멈춰서버리고 싶었던 걸까.
p.157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군데가 단단히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p.206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사는 일 너무 재미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지겨워했다. 뻔해서 지겹고, 알만해서 지루하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지 않을 방도가 없어 초라하고 비참했다. 부끄러웠다. 사건도 사고도 없이 다사다난한 일상을 맴돌다 작가가 그려내는 이들을 맞닥뜨렸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흐릿한 바닥에 색이 차오르고서야 발붙일 마음이 들었다.
일곱 편의 이야기, 그 안의 사람들에서 나는 낯설고 난감하고 익숙한 얼굴을 본다. 만원버스에서 한껏 움츠려 자리를 내주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 괜히 미안하고 멋쩍은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엉거주춤 문을 잡아주는 사람. 누구에게 보일지도 모르면서 꼭 요만큼의 벽을 세워두고 영영 지켜보이려 애쓰는 사람.
p.146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폐를 끼치고 누군가는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고. 그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공평의 문제라기보다 경계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아주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게 발생하는 것이다.
p.207 문득 내가 지키고자 했던 그 최소한의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얼굴을 외면할 방도가 없어 두 손을 세워 입가에 갖다 대는 이에게 "아뿔싸, 이러면 별도리 없지,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은 사람,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아,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 팔팔 뛰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찮고 사소하게 거듭되는 실패, 좌절, 미끄러지는 의도와 떨칠 길 없는 슬픔 따위는 그렇게 곁을 내주는 마음이 된다.
보풀 일고 습기 먹은 이야기들을 걸쳐입은 지금, 차마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누추한 나와 구질한 실패 따위를 박박 닦아 서랍 구석에 모셔두고야 마는 그런 마음을 아느냐 묻고 싶다. 살아봐야지, 입속말로 우물대고 싶다. 별것 아닌 친절을 건네고 요상하고 찌질한 미련을 내비치곤 "인간의 쓰임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르려 애쓰는 일" 같다는 작가의 말을 한구석에 대롱, 매달아두며.
p.20 "그런 건 누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더라. 인사 잘 하는 법 같은 거 말이야." 기문은 작별 인사를 아주 오랫동안 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상대가 먼 길을 갈 때는 배웅도 오래 걸리는 법이라고.
p.72 새들이 낮게 나는 모양을 한참 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완전히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뒤늦게 추위가 엄습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헛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되뇌었다. 이중일은 죽지 않는다. 그들로부터 영원히 죽지 말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활력 있는 형벌과도 같았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