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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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께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봄을 앞둔 추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는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겨울의 끝자락, 이번만 지나면, 약속처럼 떨치는 위세에 묻는다. 삶의 의미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찰나에 끝나버리지 않는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구하고 천진한 계절에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한 풍경을 지나, 침묵 속에 다시 덮는 순간. 사람 키만큼 온다는 눈에 파묻히고 싶어졌다. 무작정 걷고 싶었다.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옛날 일이 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본 길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쓸려가다 만 흔적을 도로 밟아 새기고 싶었다.

p.14 어쩌면 자신, 바움가트너가 냄비에 손을 덴 바로 그 순간 플로렌스 씨도 손가락이 잘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고,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훨씬 크다 해도, 그래도, 각각의 경우-

p.36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전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그 아래 작게, 언제고 떼버릴 요량으로 얹어둔 메모에는 이렇게 썼더랜다. 어떤 상실은 도난-당함이다, 뜯겨나감이다. 그 바로 다음 줄에는, 환상통은 마취 없는 절단에 발병한다, 라고. 옳은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레 환지통으로 불리는 그것은 phantom이다. 유령처럼. 닿을 수도 헤집을 수도 없는 것.

p.77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버린다.

p.228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도로에 어수선하게 깔린 파인 곳이나 떨어진 물체를 피해 방향을 틀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차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충동적인 모험은 절대 하지 마라. 충돌은 사실 치명적일 수 있고, 일단 죽으면 영영 죽은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 바움가트너, 이 외로운 남자의 날들을 고립과 고사 언저리에 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삶도 있다고, 볼 장 다 보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바닥났다 해도 다음 장이란 게 남아 있다고, '가만한' 위안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른 흔적에.

그러니까, 여전히 두서없는 마음에 물음표가 되다 만 호선 비슷한 것을 슬쩍 두어도 좋겠다면, 묻고 싶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게 끝없는 해변을 걷는 일과 같다면,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간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발을 적시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그냥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p.245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

p.254 (김연수 에세이) 인생의 후회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한밤에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한다면? 그때도 인생은 바뀔 테지만, 번개를 맞는 일과는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의해서 인생은 바뀌는 것이니까.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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