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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평점 :
책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지면 위에 붙박인 활자는 수 년이고 수백 년이고 정지한 채 침묵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 전까지 그 안의 말을 품어안고 그저 가만히, 가만히 잠들어있다. 얼마나 크고 깊은 세계를 보여줄지, 그 경이를 알아봐줄 이를 기다리며.
이제 당신은 손을 뻗어 한 권의 책을 꺼내든다. 손바닥으로 등을 받치고 손가락으로 표지를 열어 제목을 지나 한 장, 한 장 넘긴다. 글이 시작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쉰 후 첫 문장을 따라간다. 오, 잿빛 종이에 바늘땀처럼 놓인 문장은 당신에게 산만한 배경소음이 아닌 완전하고도 애쓰는 관심을 요구한다.
나를 보라고, 흘러가는 '자극'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마주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당신은 그 상냥한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고, 가만히 숨을 죽이며 한 줄, 또 한 줄...
p.13 미안한 얘기지만, 그대는 나를 읽는 동안, 스스로를 어떤 다른 인물이 아니라 그대 자신으로밖에 여길 수 없을것이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윽고, 어딘가의 한 줄에 도달한 당신에게 불쑥, 책이 말을 건다. 안녕? 아 잠깐만 잠깐잠깐!!! 던지지 마세요!!! 책이 말 좀 할 수도 있지!!!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농담이 아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집이 아니었지... 그 순간에 비명 안 지른걸 아무래도 인생 업적에 넣어야 할 것 같다는, 아무래도 작가가 독자에게 원한을 품은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 첨가된 생각을 하다 이내 궁금해졌다.
p.15 나는 그대가 동화나 옛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나를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나는 그대의 눈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물론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때로는 사물이 의식을 지닌 존재를 도와줄 수도 있다. 때로는 사물이 살아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 게다가 나는 살아 있다.
p.16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어떤 대단한 것, 언제 어디에서든 그대의 생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그대를 홀로 있게 하지 않고 늘 그대 곁에 머물면서 위급할 때는 비상구를 마련해 줄 존재, 한마디로 말해, 종이로 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앞서 말했듯 책은 정지한 채 침묵하는, 극도로 수동적인 매체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책이라는 시공을 사이에 둔 채, 독자와 세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나서며, '말'을 걸 수 있을까? 책과 독서, 쓰는 자와 읽는 자는 유사 이래 주류였던 적이 없다. 가장 치열한 외톨이이자 수다스러운 은둔자들이면 모를까.
이 책은 에세이다. 작가가 독자에 직접 말을 걸고자 한다. 동시에 거대한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현실을 뚫고 관념의 세계에 잠겨들 것을 요구한다. 지금 여기에 발 묶인 이들에게 무언의 명령을 쏟아붓는다.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라. 소리치듯이. 꿈을 꾸라. 헤엄쳐라. 날아오르라.
p.109 스스로가 낡았다는 사실을 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그대처럼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것을 제안해 주기를 기다려 온 것이다. 사슬에 묶인 이들도 자기들끼리 모론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들도 그대처럼 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은다. 그들을 지원하라. 창안과 발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남은 체제는 스스로의 특권을 자꾸자꾸 포기하게 될 것이다.
p.126 돌고래들이 그대에게 장난을 치면서 함께 놀자고 한다. 그대는 그토록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어냐고 묻는다. 그들은 항상 꿈을 꾸며 사는 것이 그 비결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의 설명이 이어진다. 돌고래 뇌의 반쪽이 활동하는 동안 나머지 반쪽은 잠을 잔다. 그러니까 그대와 놀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책에는 지면을 넘어서는 세계가 담겨있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다. 이 책은 작가가 책과 에세이라는 형식을 걸고 독자에게 내건 도박이다. 단지 한 권의 얇은 책, 짧은 문장의 나열에 불과한 동시에 읽는 내내 물음표의 호선을 긋게 한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사유와 그 접근 방식이 몹시 도전적이라는 평은 구태연한 사실기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도 아닌, 책이라는 물성-장벽을 뛰어넘어 독자에게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책이 인식적 한계를 돌파하고 읽는 이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 부딪히고 들이받으며 재차 묻고 있다고.
당신은 읽는다. 빠져든다. 지금 이 순간,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안녕? 안녕. 당신은 이 솟아나는 물음에 무엇으로 응답하겠습니까?
p.163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그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한 권의 책인 내가 그대로 하여금 경이로운 일을 하게 했다고. 그러나 진정 경이로운 것은 그것을 수행한 그대, 오직 그대뿐이다. 안녕.
*도서제공: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