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가 저물도록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한 적이 있나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추방된 악몽을 그리워한 적이 있나요. 낯선 태양, 영원처럼 늘어지는 순간들. 착란과 공허, 문과 벽을 반복하는 미로는 마치 자가포식의 광경처럼 느껴진다. 주저없이 도래하는 물음들.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몹시도 적대적이고 혼란스럽다. 불안과 침해의 공포가 도처에 널려있으며 인물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헤매고 부딪히다 모든 것을,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초월-무아에 갇혀 박제된다. 충격과 비명, 전율, 환희의 비약.

p.58 남자는 이제 머리를, 진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아름다웠다. 여자는 공포로 얼어붙은 채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인, 자신이 연인이라고 믿었던 그가, 바로 그 연인이 다른 이들의 세계, 적대적이고 기묘하며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일부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어두운 절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눈물을 삼키며 여자는 비틀비틀 헛간 밖으로 나왔다.

p.81 남자는 작은 열쇠를 막 꺼낸 참이다. 여자에게 밝게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남자는 돌아서서 여자가 앉아 있는 바로 앞 인도 가장자리에 세워진 커다란 자동차 문에 열쇠를 꽂았다. 남자는 차에 올라타 시가에 불을 붙이고 시동을 걸더니 그곳을 떠난다. 여자는 차를 몰고 도망치는 남자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이야기가 그려내는, 아니, 그 자체인 실존적 공포는 거울상이 되어 독자를 덮쳐온다. 곳곳에 도사린 어떤 근원, 아니, 차라리 시원에 가까운 두려움이 끊임없이 일렁인다.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올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헤매고 헤매도 절대 도착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는 독자를, 나는 너를 질서에 편입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없애려 했을까. 이 이 풍요로운 절망에서 내쳐지는 순간, 그래, 마지막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바로 그 순간. 비명을 지르세요. 아, 안돼! 여기서 끝이랍니다. 문이 닫힌다. 안돼, 안돼!

p.204 놀라운 것은 모두 내게 아무 말도 아무 설명도 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여기에 있나요? 얼마나 오래 있었을까요? 영원히 여기 머물러야 하나요? 여기 오기 전에는 살아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런 질문을 해도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p.210 "우리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걸 준비해드렸습니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제 가도 됩니다. 일어나세요. 출구까지 동행하겠습니다." (...) 주인이 침착하지만 단호하게 나를 밖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 이후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환상과 현실을 과감하고 천연덕스럽게 뒤섞는 서술은 일면 열기에 들뜬 광인 내지는 트랜스 상태와 비슷한 환희와 장광설을 닮았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광기의 표출로만 읽을 수는 없다. 뒤라스의 말처럼 그의 글은 상상도, 꿈도 아니다. 모든 악몽과 불안은 무엇보다도 첨예한 살아냄, 그 기록 자체다.

이 잔인하고 신경질적인 세계는 어째서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속절없이 벌거벗겨지고 나동그라지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소외, 충동, 파괴, 불가해의 무아지경. 처음 읽은 날 밤, 의식의 문턱에서 떠올린 말을 다시 적는다. 나쁜 꿈을 꿀 것 같아.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지.

p.12 인류는 결함투성이다. 도시도 결함투성이다. 교통수단은 형편없다. 우리가 그것을 놓치거나 그것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몇 순진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계를 떠돈다. 사랑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불치병에 걸린 채.

p.64 드디어 오늘, 내게 벌어질 일들을 일기에 적어두겠다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하면 훗날 그 일들을 정확하게 되짚어볼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러한 시도는 내 생각을 약간이나마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 이 될 것이다.
오늘은 8월 15일이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가본 적은 없지만 직감이 맞다면 아주 아름다울 것이 분명한 어느 나라로 데려가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