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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구닥다리 같은 질문을 해보도록 하자. 당신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인생은 무엇으로 말해질 수 있는가?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어딘가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 평생을 바다 위에 산 사람. 천재 피아니스트. 그 자신 또한 음악의 일부였던 남자. 노베첸토.
독백과 이야기, 극과 선율을 오가는 이야기는 짧고 단순하다. 어느날 '나타난' 아기, 노베첸토라 이름 붙여졌고 피아노와 함께 자랐다. 평생을 배에서,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았고,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마지막까지 바다 위, 그 배에 머물렀다, 고 한다. 그가 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p.23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폭탄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진짜로. 어마어마한 다이너마이트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말하자면 긴데... 그는 말했다. "당신에게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당신에겐 아직 희망이 있는 거예요." 그에게는 그런 좋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 자신이 바로 좋은 이야기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p.40 샹들리에와 소파에 닿을락 말락 하며 테이블 사이를 빙빙 돌던 그 순간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하는 게 진정 뭔지 깨달았다. 피아노와 우리, 정신 나간 발레리노들이 찰싹 달라붙어 밤의 황금빛 마루 위에서 음울한 왈츠에 맞춰 바다와 춤추고 있던 것이다. 오, 예스.
그는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동시에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지독한 유한, 혹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마디에서 뻗어나가는 거대한 세계. 그는 갇혀있었는가? 그의 생은 자발적으로 묶인, 88개짜리 유한이었는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잠시 울리다 사라지는 멜로디처럼 흘러가는 이야기에 언뜻 엿보일 뿐이다. 그 배에는 가히 천재라 불리는 남자, 그 자신이 곧 음악과도 같다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사실 간간이 치고 들어오는 농담에 차라리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이런 순간에 웃기지 좀 말라고. 그러나 삶이 음악이라면, 예측할 수 없는 걸림과 엇박을 자연스레 타고 넘는 유머야말로 재즈의 정수 아닌가? 헤이 피아노! 조명, 큐.
p.67 그는 그렇게 멈춰 서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는 정면을 응시했고 뭔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모자를 벗어서 사다리 계단의 난간 밖으로 손을 뻗고는 그대로 떨어뜨렸다. 지친 새 같기도 하고 날개 달린 푸른색 오믈렛 같기도 했다. 공중에서 빙그르르 몇 번을 회전하다가 바다에 떨어졌다. 둥둥 떠 있었다. 오믈렛이 아닌 새가 분명했다.
p.68 봤는가? 피아니스트가 새로 왔어. 닐 오코너가 말했다. 듣자 하니 최고라던데. 내가 말했다. 내가 슬픈 건지 미칠 듯이 행복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이 될 뒷모습에서 그를 부르고 싶었다. 헤이, 피아니스트. 돌아서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어쩐지 흐릿하기만 한 상상엔 우는 듯 희미하게 끌어올려진 입매만이 있을 뿐이지만. 어느 영화의 대사를 빌어, 아무도 듣지 못한 마지막 마디를 상상한다. 울었냐고? 웃었지. 그 날의 기억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지금, 이 이야기를 '읽었다'고 하는 게 맞나, 여전히 의문이다. 희미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음정처럼,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무언가를 문장으로 붙박는 게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이렇게 적을 수밖에. 물 흐르듯 오가는 박자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발끝을 까닥이며 가만히 따라 부르게 하는, 그래, 올 댓 재즈.
p.69 그날 노베첸토는 인생의 흑백 건반 앞에 앉아서 터무니 없지만 천재적인,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지상 최대의 위대한 음악을 연주하리라 결심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 음악에 맞춰서 그에게 남은 세월이 춤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p.81 북극해의 거대한 빙산이 더위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난 그 경이로움에 작별을 고했어. 전쟁이 다 박살 냈다며 웃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난 기적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이 배를 보았을 때 분노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 한 순간에 한 음으로 모든 음악을 연주할 수 있던 그날, 음악과, 나의 음악에게 작별을 고했고, 자네가 이곳으로 들어 오는 것을 봤을 때 기쁨과 작별했어. 마법을 걸면서 말이야.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