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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 우리를 무대로 이끄는 물음들
성수연 지음, 김신중 사진 / 북트리거 / 2025년 12월
평점 :
이것은 무대 안팎의 이야기, 라고 쓰려다 지웠다. 어쩌면, 아니, 사실, 무대는 입체이지 않은가. 대개 관객은 조명과 소품이 있고 배우가 행위하는 공간으로서의 '좁은 무대'를 경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대사 한 마디가 극장에 울려퍼지기까지의 모든 과정, 그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에 이어진 모든 곳이 무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대에 이어진, 무대 곳곳에서 지켜보고, 만들고, 듣고 쓰고 말하며 시공간으로서의 무대 곳곳을 가로지르는 이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미증유에 버금가는 코로나 팬데과 정치사회적 충격을 겪어낸 이들의 증언이다. 제목의 세 물음으로 이어지는.
p.125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작업에는 무거운 고민이 따르고, 그 과정에서 '기대' 나 '설렘' 같은 감정과 점점 멀어지기도 하지요. 그럴수록 고민을 나눌 동료가 필요합니다. (...) 저는 문득 그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돌려준 질문은, 싸워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설레는 미래를 그려 보게 했어요. 한윤미는 여전히 그런 동료였습니다.
p.352 (직업 관객 배서현) 보는 것이 저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공연을 선택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저를 보여 주는 것도 맞아요. 그래서 저는 취향과 정체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공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와 '이 공연은 내 취향이 아니야'는 분명 다르거든요.
저자는 네 장에 걸쳐 곳곳의 이름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그들은 답하고,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는, 이것을, 어떻게, 왜. 그 안에 교차하고 미끄러지는 세계가 언뜻 스쳐보인다. 찰나에 드러났다 이내 흩어지는 말들을 지면에 고정하려는 시도는 막 내린 극을 회상하는 일과 닮지 않았나.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들,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과도.
그것은 책이기 전에 기록이고, 그에 앞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이고, 그 안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의 삶이 담겨있었다.
p.175 (수어통역사 김홍남) 우리는 수어가 제스처나 마임이 아닌 언어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통역사가 춤을 추거나 배우의 움직임을 동일하 게 해야 할 때는 농인 관객에게 그것이 극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돕거나 관객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p.423 다른 사람의 안전을 챙기는 일은 결국 내 안전을 챙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의 안전을 일상적으로 살피는 문화는,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박진아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 덕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여 주는 태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 감각을 배우고, 다시 박진아 역시 그 덕분에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오롯이 환상과 기쁨만이 담기지는 않았다. 혹자는 고통을, 누군가는 고발과 증언을, 또다른 이는 전복과 비정형을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현실과 유리된 것은 없었다. 결국 연극도, 무대도, 이야기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것까지도 이것을, 어떻게든, 이유를 묻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다고, 여기에, 그곳에 사람이 있다, 고 말하는 일이 아닐까. 빈 자리를,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을 지켜내는 일처럼.
p,222 그때 느낀 슬픔을 완전하게 표현할 말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슬픔, 책을 덮을 수 없는 슬픔, 문을 닫을 수 없는 슬픔'이라고 이름 붙여 보고 싶어요. 저는 이제 이 불완전한 세계에 슬픈 일이 얼나 흔하게, 그러나 매번 고통스럽게 일어나곤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펼쳐 둔 제 오래된 슬픔을 가끔 들여다보며, 문을 닫지 못한 누군가의 슬픔에 머무르는 일을 연습합니다.
p.467 주체를 옮긴다는 건 '내가 없다'라기보다는 '나는 최대한 저 존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에 가까울 수도 있겠어요. 그런 노력 속에서 그 존재가 만나는 세계를 배열해 보고, 마치 내가 그 존재를 다 안다는 듯이 연기하지 않는 것이요. 그래서 단위와 단위 사이를 의지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일지도요.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눈을 깊이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노상 말로는 세상에 같은 사람 하나 없고, 머리수만큼 다양한 세계가 있다고 그래왔으면서도. 사람이 싫어 발버둥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건 상상만 해도 기가 쭉 빨리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의 말에 경청하고, 삶을 녹여낸 진한 이야기를, 그가 사랑하는 세계에 얼마간 초대받는 일은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참 귀하다. 마지막 대화가 끝난 자리, 침묵으로 책을 덮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만에.
p.64 여러 생각과 함께 걸어갈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을까? 너의 걸음 주변에 어떤 발자국들이 남아 있어? 너는 바다에서 혼자 있을 때가 좋아,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가 좋아?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혼자로도 만들어 주는데. 같이 갈래? (응응.)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내가 보는 것을 너도 보고, 그럴 수 있을까? (아싸.) 너와 나는 무엇을 같이 보고 싶은 걸까.
p.569 (강수연) 아까부터 저는 비틀즈의 〈Something〉 이 자꾸 떠올라요. "너에게는 뭔가가 있어. 내가 사랑하는 그것에는 뭔가가 있어." 뭔가, 뭔가가 있다고 계속 말하잖아요. 구체적인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말로 표현하면 오히려 사라져버릴 것도 같은 무엇. (...) 나한테 작동하고, 나한테 와 닿는 것. 그건 예술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도서제공: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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