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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예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전에, 이렇게 묻기로 하자. 캔버스에 붙박인 작품은 어떻게 시공을 넘어 감각되는가? 여기, 지금의 서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의 경성과 서울을 거닐던 이가 있었다. 그림 앞의 그는 묻는다. 당신은 내게 무어라 말하고 있느냐고. 독자는 마주한다. 그와 자신의 세계가 중첩되고 엇갈리는 풍경을.
저자 우진영은 현대미술관에 몸담고 있다 한다. 현실의 폐부 깊숙한 곳, 그러니 이 한 권의 책은 쏟아지는 선과 면 사이에서 의미를 길어내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이가 묻고 답한 기록일 것이다.
p.36 죄책감의 무게와 함께. 붓 끝까지 전해지던 야망을 애써 식혀냈다. 우리의 근대는 자주 또 때로 비정했다. 귀국 후 대구에 정착하며 그는 미술 교육에 힘썼고 행정가로 오래도록 활동했다. 기량이 절정을 향하던 때였다. 그 시간이 그에게 조금 더 허락되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은 누구의 몫일까.
p.88 두 화가가 그려낸 낯선 공간을 향한 애정에는 거짓이 없다. 감추어진 이야기의 공간과 넓은 여백에 나를 데려다놓으니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것도 없으니 나라는 존재가 더욱 선명해진다. 망설였던 어떤 선택에도 자신이 생긴다. 스스로를 믿고 싶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타자화된 두 화가의 그림 속 시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찬사임을, 여름이다.
아, 서울. 이 징글맞게 번화하고 쓸쓸한 도시는 언젠가 망국의 모던이었고,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이 영영 그리운 기억인 동시에 누군가에겐 차가운 잿빛 거리일 뿐이다. 근현대의 질곡 속, 그 풍경을 거니는 이들은 얼마나 다채로웠던가. 그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눈물겹고, 찬란했으며, 아프고, 당당했던가.
저자가 마주한 한 점 평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밤과 낮, 기억과 환상이 있다. 그림 너머의 그들은 외로웠고, 그리워했으며, 이따금 발랄하고, 사랑했다. 그를 알고 읽는다면 독자가 마주한 그림은 더이상 한 조각 창이 아닌 삶의 발자취이자 번뜩이는 이상일 것이다.
p.111 나혜석의 〈자화상〉이 당혹스러웠던 건 솔직함 때문이었다. 같은 근대 시기 남자 작가들이 그려낸 '신여성'의 모습은 이와는 다르다. 단정하고 곱다. 정태적 시각이다. 오직 만들어진 여성스러움이다. 〈자화상〉 속 굳게 다문 입이 움직인다. "세상과 맞서는 진짜 신여성이 여기 있다."
p.154 이혁이 그려낸 켜켜이 뜯겨지고 무참히 헐벗은 공간이 다르게 보인다. 더 이상 초현실적인 이세계가 아니다. (...) 다만 간절한 마음으로 행려하리라. 바라마지 않는 어떤 초현실의 먼 곳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곳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행려도〉 속 개가 움직인다. 어둠을 뚫고. 살아가리라.
언젠가, 꿈이 두렵고, 불면의 시간이 두려워 뜬 눈으로 떨며 지샌 밤이 있었다. 감은 눈에 비치는 어둠이 두려워 내도록 이를 악문 채 버텨내던 시간이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밤을 지나온 날 어떤 그림을 보았다면, 돌아올 밤이 버거워 숨을 몰아쉬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어떤 말은 천국이 아니기에 위로가 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방긋, 웃어버리면 그만이다. 본디 깜찍과 끔찍은 한끗차이 아닌가. 까마득한 심연 앞에 도도히 치켜드는 얼굴을 믿는다. 괴이와 악몽, 그보다 더한 현실에 맞서는 눈을 믿는다. 마침내 이어진 시와 공의 접점에서, 저자가 마주한 그림은 말한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해보라, 고.
p.283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 형상들의 신체는 다부지다. 심히 구부러지고 기이하게 들어져 있을지언정 단단한 몸이다. '상상과 허구일 뿐'이라고 되뇌어본다. 캔버스 속 모티프들을 읽어내기가 두려워서였다. 중앙에 우뚝 솟은 막대는 짐승의 머리에 꽂혔다. 누구의 공격일까. 알 수 없다. 사방으로 삐죽한 뿔을 가진 이 생명체는 과연 죽음을 맞이했을까.
p.339 악마들과 고야의 그림 속 고약한 신, 잠들지 못하는 화가와 곰돌이 인형들이 있는 이 장면에 함께하고 싶다. (...) 주제는 무거워도 그의 회화가 즐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에게 다정해지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에게 '악의'를 행했던 많은 순간들에게. 악마들과 함께 잠드는 우정수 회화의 주인공들처럼 오늘은 잘 자고 싶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