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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한가? 역사는 승자의 말로 쓰여진다. 역시 그러한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록되는 역사, 역사로 기록된 내용은 공평하지 않다. 보이고 싶은 것과 사소한 것을 결정짓는 자는 힘 있는 자다. 목소리를 가지는 자다. 말의 지위를 부여받은 자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설명과 교양있는 말투로 전해지는 거장과 대작을 둘러싼 휘광과 명성은 모범과 체면, 흥미로운 소문과 뒤엉켜 그 뿌리를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들은 작품의 명성만큼이나 위대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다. 만일 그들에게 지금의 '정설'을 묻는다면 십중팔구 "내가 언제...?"가 돌아오고도 남을걸.
p.40 '타히티의 고갱'은 결국 고된 현실과 이상화된 환상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신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가 남긴 찬란한 색채와 풍경 뒤에는 병든 몸과 외로운 정신, 그리고 식민적 시선으로 형성된 왜곡된 '낙원'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갱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 작품 속 타히티는 예술적 열매이자 식민적 욕망이며, 예술가를 이해하는 그간의 방식이 남긴 문제적 유산이다.
p.77 20세기 초 프랑스 제3공화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존중하는 공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 〈만종〉은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 민중에게는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전통적 삶의 표상으로, 종교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이미지로, 애국자들에게는 '잃어버렸다 되찾은 국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하면 우아한 교양의 세계, 매끄러운 담론에 감춰진 세계 또한 엄연히 캔버스 너머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예술가는 그저 보기 좋은 것을 그리고 만들어내지 않았다. 예술품에는 단순히 의뢰받은 목적이나 겉보기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자의식, 상처와 분노 뿐만 아니라 시대와 도전이 담겨있다.
그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이 그림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그 이름은 그렇게 불리는 게 옳을까. 그림과 조각은 '그곳'에 멈춰있다. 그러나 그것을 창조한 이는 한때 살아있었으며, 그의 사유는 후대에 의해 재해석되고, 발굴된다. 예술가의 시간은 죽음과 함께 정지했지만 작품의 의미와 의의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셈이다.
p.136 그의 그림은 일상의 단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구성된 시각적 조작이다. 〈폴리 베르제르 바〉는 이 전환의 결정체다. 마네는 기억과 관찰을 바탕으로 화실에서 장면을 '재조립'함으로써 단순한 현실 묘사를 넘어 근대성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번역해낸다.
p.154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원한의 투사로만 보지 않는다. (...) 이 작품은 카라바조로 대표되는 강렬한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의 전통 안에서 여성이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보기 드문 바로크 회화다. 단호한 표정의 유디트, 협업하는 하녀, 제압당한 남성이라는 구성은 단순한 복수의 장면이 아니라 권력의 전복과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목의 '두번째 미술사'는 기존의 상식과 '정답'을 뒤집어 '정답 아닌 것'을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즉, "예술사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누구의 존재가 지워졌는가'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94)". 이는 비단 작품의 역사를 '발굴'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이 놓인 공간, 즉 전시관의 권력에 대한 재해석에까지 나아간다.
흰 벽은 정말 모든 맥락에서 벗어난 순수한 공간일까? 그렇게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은 누구의 이름으로 그려지는가? 미술관은 어떤 시선으로 구성되는가? 시공은 넘는 작품으로 말미암아 예술가는 감상하는 이와 소통한다. 예술은 결코 닫힌 벽과 박제된 순간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을 만날 독자가 여전히, 처음처럼 살아 숨쉬는 예술의 두 번쨰 막을 걷어젖힐 준비가 되어 있을지.
p.220 오늘날의 미술사는 인종적 맥락뿐 아니라 성별, 사회적 지위, 화가와 모델의 관계 등 다각도로 해석을 확장한다. (...)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이 초상화를 감상할 때 모델의 피부색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 그리고 예술가의 시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첫걸음이 바로 작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다.
p.255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