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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품절
누군가를 죽을 만큼 미워해본 적이 있나요. 그 애가 내가 아닌 무언가라는 사실에, 나는 그들과 영영 같아질 수 없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적이 있나요. 덜떨어진 인간, 부적격, 넘을 수 없는 벽... 반쪽 조금 넘는 것. 얘보단 낫지만 영영 쟤만큼은 될 수 없는. 이 모든 말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아나요.
없는 것보다 모자란 것이 더 아프다. 남들 다 하는데 나는 못 하는 것, 쟤는 노력도 없이 쥐고 태어나는 걸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낼 수 없다는 것. 그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것. 내가 나를 너무 잘 알아 시도조차 해볼 수 없다는 것.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치욕이고 무력인지.
p.89 여자애 하나를 싫어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며 숭고한 대의명분까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모아를 죽여야만 생명윤리가 바로 서고 인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보전된다고 믿는 사람들. 그런 식의 증오를 받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해연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터였다. (...) 언제까지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 단 한 순간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인지.
p.207 나윤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소외되고 배신당하는 경험에 지쳤다. 누구 한 명쯤은 자신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는 존재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았다.
이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무해하고 올바른 눈으로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기는 커녕 진심으로 콱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할 인물들로 차고 넘친다. 어쩜 그렇게 순진해서...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지. 서투르고 미숙한, 그래서 잔인한 사람들. 그래놓고도 할퀴어지고 멍든 흔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 각기의 어설픔과 미숙함, 서투름은 결국 연약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는 숭고도 거룩도 없이 그저 서로를 상처입히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결도 완벽도 없이 한없이 엉성하고 능청스러운 세계. 차마 마음 깊이 미워할 수도 없는 건, 그래서일까.
p.168 하지만 은아는 성소수자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는 있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제도적으로 차별받고 사회적으로 혐오받는 계층의 일원이라고 인정할 마음의 준비까지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p.305 "달밤에 체조하는 게 취미야?" 조롱이라기도 뭣한, 구태여 놀릴 가치조차 없다는 듯 대수롭잖게 나를 툭 건드리고 넘어가는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아와의 비밀이 그만큼 대수롭잖은 문제가 된 것 같았어. (...) 내가 참 나쁘지. 변명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있잖아, 본래 아이들은 더없이 소중했던 누군가에게 잔인한 짓을 하고 나서야 어른이 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아밀의 세계와 그곳에 거하는 이들은 도처에 솟은 벽을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다. 눈 깜짝할 새에 선을 넘고 금을 밟으며 뛰쳐나간다. 환상과 절대의 경계를 뒤집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이 달콤하게 반짝이는 이야기는 기실 맹렬하고 사납다. 현실을 정확히 겨냥해 뻗는다. 거기 있지. 쭉, 알고 있었어.
이토록 꼼꼼하고 부지런하게 사랑을 찾아내는 재능을, 너무 당연해 뻔한 결말을 상큼하게 걷어차버리는 상상력을 반짝임, 재기... 그저 '아밀스러움' 외에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를 지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 말은 현실이 되리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야. 약속해."
p.148 "그러니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겠니?" 엄마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멜론은 고민하지 않았다.
p.315 가끔 우리는 그냥 문제를 제쳐놓고 눈과 귀를 막고 기다리고 있으면 그 문제가 그냥 지나 가거나 사라져버릴 거라고 믿어버린대. 끈덕지게 견디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해. (...) 하지만 있잖아, 이제 와서는 이런 의문이 드네. 과연 환상이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죽여지기는 하는 것일까?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