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한 장례와 애도 - 왜 어떤 죽음은 애도가 불가능한가
김순남 외 지음 / 산지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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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위로 혹은 체념, 어쩌면 책무에 가까운 그 말을 다시금 불러오고자 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시간 뿐이다. 죽음 바깥에, 다른 말로는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 여전히 살아 남겨진 사람의 시간은 여전히 흘러간다.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하나의 세계가 영영 멈춰버린 이후에도.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도 경사보다 애사가, 돌잔치나 결혼식보다 장례와 추도가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미래에의 막연한 기대를 품은 축사보다 '죽음 이후'에 남겨졌다는 이유만으로 쏟아부어지는 위로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마저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슬퍼할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실과 앞에서도 침묵하기를 요구받는 이들이 있다.

p.9 퀴어한 장례와 애도의 정치의 장을 통해서 우리는 '왜 어떤 죽음은 애도조차 불가능한가'라는 사회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삶과 죽음에 걸쳐서 배제된 자리에서 생성되는 관계성, 돌봄, 상호의존의 장에 주목하면서, 혈연/가족주의 중심으로 관계를 상상하는 사회에 개입하고자 한다.

p.77 다시 말해, 무명의 죽음에 관한 고민은 곧 그이가 살아 있을 때 왜 무명으로 남겨져야 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며, 그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자와 죽은 이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하게 해준다.


여전히 살아 남겨진 사람이 있으므로 죽은 사람은 여전히 부재로서 존재한다. 부재조차 부재하기 전까지는 부재하는 존재로서, '빈 자리'의 부피와 무게로 현존하는 것이다. 완전한 망각, 마침내 수긍되고 안착한 존재로서의 망자로 이행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애도'이다.

달리 말하면 불가피한 죽음의 앞에서 잘 떠나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이후에서 잘 떠나보내는 것, 이 모두가 애도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과연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한가? 모두가 원가족과 정상가족의 대를 이어가며 사는가? 어째서 어떤 죽음은 추모되고 애도할 권리를 박탈당하는가?

p.99 "사별에 있어서 가까운 친구, 지인, 직장 동료 관계 등 법적 가족이 아니더라도 심리적 충격을 받고 충분히 애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관계들을 사회가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슬픔을 느끼는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애도 과정을 생략하거나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박탈된 애도이다."

p.191 고인의 삶의 서사와 생전의 돌봄과 유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법적으로 선순위라는 이유로 혈연가족에 의해 치러지는 장례는 실제로 상실에 대한 애도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애도의 자리로부터 추방한다.


'잘 죽을' 수 없는 사회는 '잘 살아갈' 수 없는 사회다. 죽음 앞에 존엄을 박탈당하고 애도받지 못하는 몸은 살아서도 그 성원됨을 인정받지 못한다. 퀴어, 감염인, 빈곤과 장애 커뮤니티에서 이것은 낯설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누군가에겐 그저 요원한 일이다.

장례와 애도의 의의는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일,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세계에 새로이 자리하게 사는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러니 진정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에도 '가족'에서 벗어날 자유를 박탈당해 내가 나인 채로, 그가 그인 채로 기억될 권리를 부정당하는 것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p.7 혈연가족을 넘어서 내가 의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시민, 동반자, 단체에게 삶의 마지막을 동행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가족의 의미가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외로움과 배제의 문제가 구조적인 차별과 연결되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적 유대를 생성하고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p.124 결국, 퀴어로서의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립되지 않은 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인 낙인과 편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는 게 아니라, 존엄한 죽음의 의미를 사유하는 사회의 장을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이라는 신화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모두가 잘 죽고 잘 떠나보내게 하는, 마땅한 애도를 숨기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도래한 현실에 적응하는 일이다. 인간이 평등히 존엄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제자리를 돌려주는 일이다. 존엄에 차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존엄하지 않으므로.

애도의 장에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고립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일,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우리 안에 새로이 자리하게 하는 일. 과정이자 상징인 장례와 애도가 이 잔인한 사회에 놓인 모두의 것이기를, 삶과 죽음이 그 자신의 것이기를, 이 익숙한 좌절에 마침표를 찍기를 간절히 바란다.

p.219 법제도는 아직 어쩔 수 없는데 자본은 협상할 수 있는 영역이 될 때, 장례와 애도의 과정에서 다채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어내기 쉽다. (...) 삶과 죽음에 걸쳐 성소수자의 존재와 관계를 가시화한다는 목적 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식은 대안이 아니라 법적 가족 바깥에서의 차별을 상품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p.224 애도의 정치는 파트너 관계, 생활공동체 관계 외연에 돌봄의 조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더 다양한 유대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이, 질병, 장애, 지역, 빈곤 등 각자가 가진 조건이 상호의존의 생태계가 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인 배제와 차별로 이어지지 않기를 요청한다. 애도는 감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도에는 정의가 필요하다.

*도서제공: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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