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몰이꾼 이기 1 - 테의 섬을 탈출하라 펑 1
허진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비 바이러스가 휩쓸고 지나간 세상, 어딘가의 외딴 섬, 보드를 타고 바다를 따라 달리며 좀비와 함께 살아가는 이가 있다. 이름은 '이기'. 손에 들린 게 채찍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게 웃는, 신참내기이자 단짝인 '도나'와 이기는 늘 함께다. 작고 가난한 섬, 섬 안의 좀비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몰아 관리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좀비몰이꾼들.

섬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권력자, '테'와 그의 일족들이다. 섬 전체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의 존재가 법이자 그들이 있는 곳이 곧 무법지대이다. 이 세계의 좀비는 "대체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어떠한 욕구만이 남은 채 멍하니 비틀거리며 썩어갈 뿐.

p.54(1권) 사람들을 죽인 건 좀비만이 아니었어. 이 세계를 진짜 박살낸 존재는 바로 우리, 붉게 요동치는 혈맥을 감출 수 없는 적맥인들이지. 언젠가 저 멀리 시뻘건 노을을 뒤집어쓴 테의 요새를 바라보며 우 씨 아저씨는 그렇게 말했다.

p.157(2권) 겁 많은 천성을 타인을 배척하는 행위로만 달랠 수 있는 비루하고 졸렬한 존재.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공부에는 한없이 게으른 헛똑똑이. 이런 자들은 자신의 악취나는 감정을 기회만 생기면 언제고 드러내기 마련이다.


테의 섬은 꽉 닫혀있다. 누구의 침입도, 탈주도 용납하지 않는 세계이다. 절대적인 권력 아래 누구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다름을 꿈꾸지 못한다. 권태로운 일상, 언제까지나 한결같을 것만 같았던 그 세계는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 '눈'과, 돌변하기 시작한 좀비들의 폭주로 무너져내린다. 권력의 아귀다툼과 자멸은 약자들의 삶마저 뿌리채 뒤흔들기 마련. 이기와 도나, 눈은 섬을 떠나야만 한다.

이별은 죽음만큼 고통스럽다. 평생을 살아온 자리를 떠나야만 하기에. 온통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기에.. 새로운 삶을 찾아나선 그들이 당도한 오아나의 해변. 낙원처럼 보이지만 또다른 절망이었다. 권태와 공포를 벗어난 곳에 무욕과 몰개성으로 통제된, 미래도 현재도 스스로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거니는 이들.

p.208(1권) "우정은 끊임없이 너를 시험에 들게 할 거다. 네가 그 얄팍한 우정을 지키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저들은 끝까지 널 몰아붙이겠지. 하지만 이기 넌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모두를 실망시킨 채 괴로워하게 될 거야. 내 눈엔 네 미래가 빤히 보이는구나."

p.44(2권) "아나수는... 그런 쓸데없는 욕망을 모두 잠재워 줘. (...) 욕망이 없는 존재가 얼마나 멋진 줄 아니? 아나인들을 봐. 얼마나 평온한지. 아나인들은 근심, 걱정, 두려움,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아. 자기 욕구를 채우려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없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니 아무 것에도 실망하지 않고."


평화 이면의 실상은 또다른 통제였다. 모든 자아를 거세당한 채 행복도 갈망도 사랑도 미움도 알지 못하는 마취상태. 이곳은 낙원일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므로 원할 것이 없다. 불만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이기와 도나, 눈이 다시금 안주하지 않기로 결정한 때, 눈을 아는 자를 만나 하계의 땅으로 향한다.

과연 그곳은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한순간에 어린 시절을 떠나온 이기 일행은 또다시 '말 잘 듣는 아이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그들을 온통 뒤흔들고 끝없는 삶의 길로 떠밀게 될까.

p.44(2권) 그래. 그거였구나. 내가 아나인들을 어색해한 이유. 그 안온한 미소에 거리감을 느낀 이유. 이기는 자기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욕망마저 제거된 아나인들을 복잡한 심정으로 휘둘러보았다. 보기 좋게 그을린 살갗과 고요한 표정만이 다를 뿐, 이기의 눈에 아나인들은 각성 전의 좀비들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p.64(2권) "그 열매를 처음 먹은 날 밤, 우린 모든 악몽에서 벗어나 깊이 잠들었어. 악몽 없이도 잠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이렇게 편히 잠잘 수 있다고?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은 무엇이었나 싶어서 좀 허탈할 정도였지." (...) 그럼 그렇지. 하늘의 뜻이라는 게 그리 시시할 리가 없다. 하늘의 뜻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뿐.


작중 주인공인 이기와 도나는 퍽 다른 성격의 캐릭터들이다. 내가 어떤 쪽이냐, 하면, 낯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점에서는 이기와 같다고 하겠다. 섣부른 신뢰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탕발림이라고 믿는 사람이기에. 모험은 두렵고 타인은 의심스럽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도나와 같이, 종내에는 이기가 그러하듯이, 기꺼이 끌어안고, 환대하고, 차마 떨쳐내지 못하는 시선에 또다른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닫힌 세계를 부수고 '나'에게로 뛰어드는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을 방법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니 기꺼이 끌어안을 수밖에. 이 모험에 함께하는 독자가 너를 구하는 일이 나를 구하는 일임을, 세계와 세계가 맞닿는 일이 모험이자 또다른 세계의 시작임을 깨닫기를. 부디, 마음껏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두렵고 위태로운 청춘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있는 힘껏 누리기를.

p.225 (1권) 이기는 자신에게 매달린, 이 작은 존재의 떨림을 느끼며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너를 구한 날, 나는 내가 너의 운명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젠 알아. 네가 내 운명을 바꿨다는 것을.

p.199(2권) 이기. 이기. 이기. 눈의 목소리가 뜨겁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직 자기 이름만 소리 내어 말하던 아이가 난생처음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기는 이제 그 아이를 향해 질주한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있는 힘껏. 눈을 향해 보드가 날아오른다.


*도서제공: 북트리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