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임지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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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유행이 있는가. 언젠가는 사랑스럽게 굴라더니 또 언젠가는 또 사납게 쟁취하는 태도가 미덕이었다가 이제는 사랑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좋아할 것들을 엄격히 가려내세요.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하세요. 사랑해야만 합니다. 바야흐로 인류의 어느 시대보다 사랑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싫음'은 부끄럽다. 모났다. 감춰져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모두가 서로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을까? '좋아함'을 목놓아 외칠수록, '싫어하는 마음'을 싫어할 수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싫어하는 마음은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마침내 그에 비친 나를, 나의 내면까지도 들여다보고서야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닐까.

p.8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이면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체로 거기에 있는 건 내가 가진 진실이다. (...) 미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할수록 사람을 더 잘 견디게 된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다. 거기에는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p.26 사람들은 자주 오롯이 혼자서 삶을 해내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나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 한 사람의 자립성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로 망가지지 않는다. 때때로 그 영향은 한 사람을 지탱하거나 그의 내부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게 무엇인지 발견하게 도와주고, 그건 그 사람이 누군지와 무관하지 않다.


누구나 한번쯤, 괜히 싫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를, 무엇을 미워하는 마음이 툭, 굴러나올 때가 있다. 금세 사라지지도 않고 성가신 소리를 내며 마음을 굴러다닌다. 언젠가는 스스로가 가장 미워 결국 앙다문 입을 하고 뚝뚝 울게 만드는 것들. 가만히 집어들어 살펴본다면 제법 많은 이름이 붙어있을지 모른다. 외로움, 그리움, 민망함, 슬픔 같은 것들.

그런 이유로 골이 패인 자리에 담겨있는 것을 들여다보노라면 차마 그 마음마저 그저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많은 파편과 흠집을 보며 어디서 깨져왔는지, 어쩌다 멍이 들었는지. 그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므로.

p.69 마르셀 프루스트는 모든 사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문장은 꼭 그저 그럴 게 틀림없을 그 스탠드에 할머니가 있다는 것처럼 읽힌다. (...) 버려졌거나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가 있을 할머니의 스탠드를 상상한다. 우두커니 홀로 있을 스탠드를 상상하다 보면, 정말이지 나는 프루스트가 싫어진다. 망할 놈이 하필 그딴 문장을 남겨서 사람 마음을 따갑게 한다.

p.106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기실, 마음놓고 사랑하라거나 미워하라고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가라앉혀 들여다볼 시간을 주지 않는 탓이다. 눈 돌린 새에 엎어지고 쓸려가는 이가 수두룩한 탓이다. 이런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많은 경우에 부숴진 이들을 아파하고 그러모으다 사랑마저 손끝처럼 닳아버린 이다.

사랑과 행복이 간절한 세상에서 짧게 우는 사람들, 금세 일어서거나 소리마저 눌러 참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나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서, 어떤 마음은 영영 곁에 남아 꼭 떠나보낸 적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기에 다시 일어서거나 애써 웃어보일 수 있다. 한꺼풀 벗겨낸 '싫음' 아래에는 어쩌면, 이런 마음이 있다.

p.164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희생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나눠가진다고 했다. 그 죽음에 뭐라도 했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죽음에 정말로 책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고 했다. 그런 죄책감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에 심리적 유대감을 갖는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거였다.

p.246 누군가 나를 지켜볼지 모른다고 느낄 때 불쑥 터져 나오는 것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보이려 애쓰다 보면 압력이 생겨나고, 그 압력은 마중물처럼 깊은 감정을 길어 올리니까. 제 머리카락을 뽑아 신을 엮고 싶을 정도의 그리움 같은 것을. 그는 그 신을 신겨주고픈 사람에게 웃는 낯을 보이려다 그만 울어버리고 만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삶에서, 조금 알고 많이 모르는 타인들을, 말끔하게 차갑게 멸균된 사랑보다는 모나고 뜨끈뜨끈한 '싫은 마음'을 너무 싫어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임을, 거기에는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이 드는 날이면, 서툰 사랑이 꿈틀대는 내 마음을 가만히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 서툴게 사랑하고, 쉽게 다치고 흔들리는 마음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떨까. 이유 없이 싫어하는 마음을 그러모으면 나타나는, 희망의 형태를.

p.201 혼자 진지해온 이들은 점차 기대보다 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거듭 인생의 쓴 맛을 보다 보면 삶의 지지분함을 처리하는 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나는 나무를 보는 방식만으로도 지지분한 시간을 지나갈 수 있다. 그건 때로 살아간다는 것에 다름없다.

p.233 평범은 때로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한다. 누군가 서투르고 어색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설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평소와 다른 오늘을 허락해주는 것. 그 승인은 그 애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 애가 기존의 자신보다 조금 더 멀리 가보도록 격려해줄 것이다. 그 애가 다시 그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더라도, 평범을 견디며 서서히 나아갈 만큼의 힘을 만들어줄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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