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비들
데니스 루헤인 지음, 서효령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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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보스턴, 공공주택 마을 '사우디'. 마피아가 점령한 동네, 가난한 아이들이 자라 마약과 총, 줄줄이 딸린 가족으로 이어지는 예정된 곳에 메리 패트가 있다. 하나뿐인 딸 줄스와 함께 사는, 거칠고 불같기로는 소문이 난, 어지간한 동네 깡패는 쪽도 못 쓰고 당하는, 강인하고 사나운 여자.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보통의 여자.

주로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사우디 주민들은 인종차별의 열기에 휩싸여있다. 우리 아이들을 "흑인 동네"의 학생들과 교환등교(버싱)시킨다니. 우리 아이가 "흑인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감히 흑인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시위를 벌이자. 항의하자. 너희들 자식이나 "깜둥이 동네"로 보내라고.

p.90 메리 패트는 나름대로 똑똑해 보이게 잘 갖추어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버드 교정에 있는 거만한 녀석들과 히피들이 곁눈질하는 모양새로 판단하건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어쭙잖은 시어스로벅 통신 판매 카탈로그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서 입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온, 강 건너 노동자 계층의 아줌마.

p.277 럼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우디에서 어제와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게 될 나머지 삶이었다. (...) 하지만 빼앗길 수도 있다. 빼앗길 것이다. 빼앗겼다. 저들은 그들의 생각과 방식, 그들의 거짓말을 강요해 오고 있다. 변화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더 부유하게 해 줄 거라고, 우리 세계를 밝혀 줄 거라고. 거짓말이다.


이 문제에는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이 얽혀 있다. 인종차별 폐지정책을 명령한 판사와 그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고급 거주지는 버싱 정책에 해당되지 않는다. '사우디'는 인종분리를 주장하는 폭력 조직 세력권이다. 그들은 화합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화합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결정"은 인종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인 이들의 삶과는 동떨어져있다.

유럽의 흑인, 하얀 흑인. 가난하고, 폭력적인 자들. 흑인에게는 백인, 백인에게는 "유색인종" 취급 받는 이방인. 이 모두가 미국의 아일랜드계 시민을 향한 말이다. 자유와 평화, 평등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문명사회'에서 그들이 거칠고, 배타적이며, 인종주의의 대표격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사우디'의 "평범한 사람들"마저도.

p.120 "베트남에 아이를 많이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 살까요? (...) 의사들도 그 애들을 위해서 이명이나 평발, 골극 같은 온갖 개소리를 생각해 내더군요. 내 아이는 록스버리행 버스에 태우고 싶어 하면서, 잔디가 다 깎이고 해가 지면 자기들 동네에는 흑인들이 얼씬거리지 않기를 바라는 작자들이죠."

p.176 떠올릴 때 인간의 존엄성을 한 꺼풀 벗겨 내는 명칭이라면 뭐든 상관없다. 그게 목표다. 그런 일을 시킬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아이들더러 바다를 건너가 다른 아이들을 죽이라고 시킬 수도 있다. 아니면 바로 여기, 집에서 머무르면서도 같은 일을 하게 시킬 수도 있다.


노예제를 필두로 법률상의 인종차별이 사라진 때까지도 여전히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린치로까지 이어지는 혐오 범죄, 열악한 수준의 공공복지, 빈민촌의 마약 문제, 전쟁으로 불거진 미국사회 내의 계급 등, 차별에 차별이 가세되어 더욱 크게 번지는 혐오는 다시 '사우디'의 혐오와, 실종, 살인으로 돌아온다.

이야기로 돌아가, 메리 패트는 안다. 침묵하라는 '그들'의 말에서, 약에 취한 웃음에서. 그들이 그를 빼앗았다는 것을, 그들이 자라온 세계가 끝끝내 '쓰레기 같은 내일'의 가능성마저 부숴버렸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는 돌려주고자 한다. 그들이 부순 심장을, 피흘리는 고통을, 그들이 그의 심장의 미래를 빼앗았으므로, 그들의 내일을 지옥에 처박아버리기로.

후련한 복수라는 게 있기는 할까. 지옥에서 올라온 복수극은 또다른 지옥을 만들어놓고서야 막을 내린다. 고통을 고통으로 갚고서야, 그렇게 당해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의 탓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야 드러난다. 복수에는 행복이 없다. 그저 처참과 참담 사이 어딘가의 지옥일 뿐. 그러므로 다시금, 지옥에서 올라온 복수는 스스로마저 지옥에 거꾸러박고서야 끝나는 것이다.

p.314 그들이 자기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이 모든 세대의 아이들을 알약의 노예, 거울과 돌돌 말린 지폐의 노예, 바늘과 숟가락의 노예로 만들어 왔다. 노엘을 죽인 건 마약이 아니었다. 노엘을 죽인 건 버틀러 패거리였다. 노엘의 아버지를 죽였던 꼭 그대로. 노엘의 여동생을 죽였던 꼭 그대로.


'흑인을 죽이고 달아난 백인 소녀와 딸을 잃은 어머니' 라는 소개에 갇혀 중요한 것을 모두 놓치고 있었음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다. 믿음은, 이전에 알았던 세계는 전부 부정당하고 망가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는 복수극이다. 복수의 끝은 어떤 의미로든 파멸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복수의 여정에서 메리는 자신을, 딸을, 그가 속한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피비린내나는 복수에 독자가 휘말려들기를 바란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이 빠져들기를, 마침내 그 끝에서 그가 마주한 것과 같은 것을 보기를, 증오와 혐오의 시대에서 간절히 바란다.

p.378 "당신은 아이를 신이 만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도록 키웠어요. 당신이 그 증오를 허락한 거라고요. 어쩌면 당신이 가르친 걸 수도 있죠. 당신 자식과 꼭 당신 같은 인종 차별주의자 부모에게서 자란 그 인종 차별주의자 친구들은 자기들이 가진 증오와 어리석음을 이 세계에 수류탄처럼 내던졌던 거예요."

p.400 "괜찮지 않아요. 내 딸은 죽었고 어기 윌리엄슨도 죽었어요. 내가 딸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죠. 그 애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결국 받아들였어요. 애들은 늘 알죠. 다섯 살 꼬맹이도 알아요. 하지만 우린 거짓말을 계속 되풀이해서 애들을 꺾어요. 그게 최악이죠. 애들의 마음에서 좋은 것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자리에 독이 채워질 때까지 꺾는 거죠."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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