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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 그리고 퀘스트 - 하드SF 단편선
위래 외 지음 / 구픽 / 2024년 7월
평점 :
사랑과 사상은 한 끗 차이다. 아니다. 그 둘은 한 몸이다. 아니다. 그 둘은 뒤섞여 있다. 아니다. 평행선이다. 아니다. 감히 말해질 수 없는 것과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다. 전부 아니다. 세계를 부수고 뒤집어 엎어야만 간신히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아니다. 아니라고 말해진다.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해질 수 없는가? 모른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이른바 "하드 SF"와 "소프트 SF"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숱하게 이어져왔다. "SF 장르의 팬"을 자처하는 이로서 감히 확신하건대, 그것은 모조리 실패, 또다시 실패, 어김없는 실패였다. 그 누구도 차지한 적 없는 왕좌, 자리하기 무섭게 냅다 밀쳐지고 밀려나는, 영겁의 난장판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p.66 "감각수용체가 남아 있는 이상, 류진의 몸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따라서 키메라 당신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류진의 기억과 의식이 사라져도 혹여나 류진이 다른 무엇이라 하더라도 류진의 몸이 사랑하는 것이 나라는 건 바뀌지 않는 거야."
이 끝 모를 논쟁은 필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에 뿌리내리고 있다. "도대체 SF는 무엇이란 말이냐". 이 또한 말 꺼내기 무섭게 전자 못지않은 설전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답하기를 포기한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틀을 만들어내려는 우리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고,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따라가면 반드시 끝을 알 수 있다는 미로의 해법은 먹히지 않는다고.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는 출구와 입구가 정해진 미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p.243 그렇다면 이번은 과연 몇 번째일까. 역사는 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까지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까. 과연 더 나은 선택지가 존재할까.
p.306 네 말대로 시설에 들어갔다 치자. 그래서 시스템에 등록되면 이 아이도 너처럼 살 수 있나? (...) 하고 싶은 일하면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냐고. (...) 하지만 이 애는 시스템 바닥에서 겨우 목숨만 연명하며 살 거야. (...) 당장 죽지 않게 해 주는 거, 물론 고마운 일이지. 근데 그거면 되나? 사람이라는 게 정말 그거면 되는 거냐고. 먹고 싸고 자고…
작가가 그려내는, 그들과 독자가 살아가는 세계는 입구로 밀어넣어져 출구를 향하도록 생겨먹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모르는 채 덜렁 던져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넓은 우주에, 초라한 행성에. 인간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죽기 때문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한계에 직면한다. 절멸에, 인간성에, 굴종에, 우연한 호기심에, 밀려나고 좁아지는 세계에. 그것은 각기의 이유로 현재와 다르지 않다. 줄곧 말해왔듯, 상상은 현실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상상만큼 현실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p.154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앙은 영혼 없는 인형에 불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성을 모독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p.206 아니다. 과학은 신학이 결코 아니었고 그리 될 수도 없었으며 하물며 신이 되고자 하는 학문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과학을 이용해 신이 되고자 하고 있었다. 악을 규정하고, 처단하는 심판자가.
그들은 좌절한다. 고민하고 부서지고 파괴된다. 수없이, 몇번이고, 난관에 빠지며. 이것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필연히 실패한다. 깨진 것은 부서질 수 있는 것. 울부짖는 인간은 일어서는 인간이다. 의심하는 인간, 유한한 존재.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사랑은 혁명이 되고, 넘을 수 없는 벽에는 부서질 곳이 생긴다.
풀 수 없는 미로에도 필승의 해법이 있으니. 단 하나, 벽을 뚫고 나가는 것뿐이다. 탈출은 가둬진 자의 숙명이요, 길이니, 절망은 필연적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담지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가? 독자는 거대한 절망에 눈을 감는가? 주저하는 인간, 벽 너머를 가리키는 손. 이 책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폐허에서 도망치지 않는.
p.254 인간에게 역사는 바꿀 수 없이 반복된다고 체감되어 왔지만 그렇게 시나브로 변화해 왔던 것이었다. 매번 시간을 되돌리며 반복을 의심하고, 그에 쌓인 죄책감을 가늠하고,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결국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지라도 그 미세한 흐름이 모여 충분한 가치를 지닌 파랑이 되도록. 그날을 고대하며.
p.333 "자아, 얘기도 좋지만 우선 배부터 채울까요? 생물학적 원리든 뭐든, 밥을 안 먹으면 사람은 확실히 죽는다고요."
*도서 제공: 구픽(GUF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