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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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건, 혹은 그런 사람이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어제까지의 세상을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될 정도로 한순간에 뒤틀리는 경험을 한다는 건, 혹은 그런 경험이란 건 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때 잔잔한 내용의 영화만 골라 보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텅 빈 거실에 불을 끄고 앉아, 볼륨을 한껏 낮춰 들릴 듯 말 듯 틀어놓고. 아침에서 시작해 밤으로 끝나는, 대화보다 독백이 더 많은, 조용히 울고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는 이야기들.

한때는 그런 영화가 쏟아져나왔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관계,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 일상에서도, 세계에서도 어딘지 어긋나고 겉도는 사람들. 유리된 이들. 어째서인지 일본 영화에 그런 내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너무 빨리 식고 너무 빨리 미끄러지며 어느샌가 듣도보도 못한 것이 자라있다. 이런 세계에 살아가는 일이 공포가 아닐 수 없다.

p.15 TV 피플은 내 존재는 처음부터 무시했다. 그들은 셋 다, 그곳에 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텔레비전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둘이 텔레비전을 사이드보드에 올려놓고, 남은 한 명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다.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휴머니즘을, 따뜻한 응원을 읽는 독자도 있겠지. 부럽다. 나는 이 작가를 무서워하므로... 정확히는, 그의 시선으로 드러나는 세상이 너무도 무기질적이라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몸은 함께 있어도 마음은 닿지 않는다. 평온한 일상 아래에는 지울 수 없는 권태가 있다. 살갗을 맞대는 관계도 애정과 행복이 아닌 쾌락과 이질감으로 미끄러진다. 쉼없이 지껄이지 않는 혀는 굳어지고 말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이미 뒤틀려있다. 금가고 부서져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거대한 연극임을 알아채고 박수를 보내거나 뒤를 돌아보는 관객, 독자까지도 그 일부에 불과하다. 『1Q84』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보았던, 모종의 경멸과 불쾌감, 낯섦.

p.66 "사람 마음은 깊은 우물 같은 것 아닐까 싶어. 바닥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때로 거기서 떠오르는 것의 생김새를 보고 상상하는 수밖에."


지금 여기의 세계를 벗어나는 통로는 하늘도, 평야도 아닌 지하, 벽 틈, 아래와 사이로 빠져드는 곳에만 있다는 무력감. 그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의 창작론이랄지 인생관이랄지, 몇 번을 읽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깊이는 차라리 심연에 가깝다.

인상깊게 읽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찢어 비틀고, 현실-이면의 영역과 뒤섞어놓는 전개들에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위화감이 있다. 바깥 너머에도 눈 앞의 품을 파고들어 완전히 뒤집어놓은 '내면'에도 경계가 없다는 것. 끝없이 펼쳐진 막막함에 안팎을 구분할 방도가 없다는 것.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세계를 담은 상자를 마구 흔드는 존재, 의 세계를 담은 상자를 마구 흔드는 존재, 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이어지다 불현듯 뚝, 멈추고 차원 바깥의 독자를 응시하는 이야기, 그것은 이미 일종의 독자적 생명을 갖게 되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가 담긴 세계를 마구 흔드는 존재의 이야기.

p.160 어제와 그제가 뒤바뀌어도 신기할 게 없다. 때로 무슨 인생이 이럴까 싶다. 그래서 허무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저 놀랄 뿐이다. 어제도 그제도 구별되지 않는 사실에. 그런 인생 속에 내가 들어와 삼켜져버렸다는 사실에. 내가 낸 발자국이, 확인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바람에 쓸려 지워지고 말았다는 사실에.


일종의 악몽이다. 비명조차 회수할 수 없는 고독이다. 부딪혀 돌아올 길이 없으니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모두가 마구 흔들리는 상자 안의 세계는 또다시 마구 흔들리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셈이다. 끝나지 않는다. 시작이 없으므로.

안다. 이것은 무라카미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세계에서 내내 두려워하는 이방인이다. 그의 세계에 던져질 때마다 나는 적극적으로 낯설고 헤매는 이가 된다. 돌이 되고 안개가 된다. 침묵이 된다.

불평을 가장한 두려움의 고백은 이쯤 해두도록 하자. 작가는 말한다. 이 이야기들에는 "어딘가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는 온기의 예감이 담겨있"다고. 재차 믿어보기로 한다. 캄캄하게 무너져내리는 고독, 외롭고 차가운 세계에서도 여전히 어딘가로 향하는 길이 있음을. 그가 그려내는 세계에는 줄곧 출구 아닌 '뚫고 나가는' 길이 있음을.

p.204 만일 죽음이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음이란 것이 영원히 각성한 채 이렇게 꼼짝 않고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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