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기억책 - 자연의 다정한 목격자 최원형의 사라지는 사계에 대한 기록
최원형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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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블랙피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이맘때면 으레 덧붙이곤 하는 인사가 있다. 올해는 여름이 이르네요. 요사이 이른 더위가 한창입니다. 안녕하신지요. 무탈하시길 빕니다. 큰 생각 없이 쓰고나면 이내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아름다운 사계절이니 뚜렷한 기후변화니 마르고 닳도록 배우며 자라기는 했는데, 당최 이걸 사계절이라고 해도 될만한 일인지, 싶어지는 것이다. 우기와 한기, 그리고 약간의 그라데이션 정도가 아닌가.

나 어릴 적엔, 그러니까 나 때는 말이야. 방학, 그것도 여름방학이 주제일 땐 노상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가 농사를 도와요!”가 있었다. 이쯤 해서 고백하자면, 조부모 대부터 일가친척 중에 시골에 사셨던 분이 없다. 다들 시멘트 쫙쫙 깔린 대도시에서 곱게 자라 흙이라고는 어디 화단 텃밭이면 모를까, 만질 일도 없었기에 나 또한 시골? 자연? 다 휴가지나 가야 있는 대상이었단 말입니다. 예? 많은 도시인들에게 당신이 마주한 오늘의 자연을 말해보라 하여도 어... 비둘기요? 정도라구요.



그러니 인간이 근현대 도시문명을 이루며 자연에서 너무 멀어졌다고, 더는 흙을 밟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려하는 이가 많은 줄도 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이가 일선의 투사가 될 수는 없다. 이또한 안다. 당장 나만 해도 한여름 에어컨을, 풀이며 나무를 밀어내고 들어선 아스팔트 길을, 꼼짝없이 재활용 불가로 분류될 온갖 물건들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매일 쓰는 물건 중 대를 이어 쓸 수 있는 것은 손에 꼽지만, 어쩌면 인간이 사라진 지구에도 남을 쓰레기는 차고 넘친다. 손바닥만한 공터를 갈아엎어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고, 해마다 삭발이라도 하듯 기둥만 남기고 잘려나가는 나무를 보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다.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해마다 어디의 얼음이 녹는다더라, 사막이 넓어진다더라, 밀림이 사라지고 그림책에서나 보던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더라...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위기어린 소식들을 체감하지 못해 크게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영영 남의 일로만 여겨지는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걸까.



얼마전 동물원을 탈출해 도시를 배회한 얼룩말이 화제가 되었다. 그 전에는 역시 동물원을 탈출해 헤매다 겁에 질린 채 사살된 퓨마가 있었다. 그 사이를 심심찮게 채우는 건 산을 내려온 멧돼지며 곰이며 고라니며... 그들의 죽음과 공포는 처음에는 웃음을, 나중에는 씁쓸한 연민과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는 물음을 이끌어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우리 인간이 그들의 터전을 빼앗은 게 아니냐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느냐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문명을 이룬 인간이 당장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연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작가 최원형은 한 가지 해법을 찾았노라 말한다. 우리는 자연과 너무 멀어졌다고, 다시금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눈과 귀를 여는 것이라고. 계절이 흘러가는 자리마다 숨쉬고 머무는 이들을 살피는 것이라고.



태어난 순간부터 살 권리를 박탈당해도 될 존재는 없다. 이 희한한 별에 살아가는 것들 중 삶의 터전을 빼앗겨 마땅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좀 작으면 어떤가, 조금 시끄럽고 번거로우면 어떤가.

인간은 바이오동력 음식물쓰레기통과 다를 바가 없다고 누누히 말해왔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보도블럭 사이를 비집고 자란 꽃, 물풀에 엉긴 정체모를 알 무더기, 기둥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새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처마며 땅을 내어주고 이소를 돕고... 일상의 한켠을 나누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이제 갓 솜털뭉치를 벗어난 작은 새를 보라고, 그들이 날아갈 때까지 기다려주자고. 더위에 지친 벌에게 물 한 모금 내어주고 그들에게 감사하자고. 발치에 찰싹 붙어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들풀을 눈여겨보고 같은 것 하나 없음을, 느리고 바쁘게 살아내는 그들을 응원해보자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자고. 환대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멈칫하는 순간, 아-하고 경탄하는 순간, 쌓인 눈 아래 숨죽이다 움트는 생명을 떠올리는 순간. 그 순간들의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고, 찰나를 공유하는 삶에 머물 수 있다고,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 책은 기후위기의 희망이 될 생명 연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개문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생명을 가진 존재와 함께할 수 있는, 바로 그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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