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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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속칭 ”3D“로 불리는 업종이 있다. Difficult, Dirty, Dangerous.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들을 그렇게 부른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 내용이 까다롭거나 위험한 일이 있다. 유달리 고되고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상황에 놓이는 직업군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연계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어렵고 위험한 것이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까다롭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업무 내용과 사람이 별개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Dirty, 더러운 일은 어떤가? 그것은 단순한 생리적 불쾌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 또한 오염되었다는 생각, 사회적 시선을 떨치기 어렵다. 그들은 쉽게 ”더러운 사람”으로 묶이기 마련이다. Dirty Work가 Dirty Worker로 이어지는 셈이다.

‘더러움’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생리적 혐오가 아닌, 도덕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을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대하기 꺼리는 대상과 접촉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교도관을, 표적살상이 일상인 드론 조종 군인을. 환경 담론이 부상하며 동물권 운동과 정면으로 대치해야 하는 도축 및 가공업자, 석유 시추선 승선원은 어떤가?


위험하고 고된 데다 사회적 멸시까지 겹치는 일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편과 불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터를 일상적인 행동 반경 내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들이 여전히 사회에 필수적이라면?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멀리,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면 된다. ‘그들’이 ‘우리’와 구분되고 격리된 존재가 될수록 ‘우리’의 불편함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일들은 누가 맡게 되는가? 누가 ‘낮은 곳에 임하‘시게 되는가? 어떤 이가 ‘배운 것 없고 가난하니 자기 발로 알아서’ 더럽고 위험한 일을 맡는 와중에 돈까지 받으니 감사해야 하는, 희한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가?

p.27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은 동시에 도덕적 불평등을 반영하고 강화한다. (…) 더티 워크가 이루어지는 고립된 장소를 피할 수 있는 능력, 그 누추한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티 워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더티 워크‘를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p.22)“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이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이면서 종사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 찍혔다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p.29)“는 특성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더티 워크‘의 위임이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필수성을 알면서도 책임을 넘기고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두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우리‘는 아니라는 모순적이고 차별적인 구분선에 의해 가능해진다.

p.20 문제의 핵심은 어떤 일이 행해지고, 그 일을 누가 하며, 그 밖의 우리 모두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게 그 일을 위임하는가다. 우리는 스스로 전혀 하고 싶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일을 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위임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의 관리나 경영을 맡는 고위직이 아닌 현장직, 생산직 노동자들 대부분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심신의 외상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그만두거나 “용기있는 반항“을 택하지 못하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것, 생계가 달려있었다. 그 일이 아니면 당장 이만한 일을 찾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해악과 폭력성을 알면서도 집단에 순응한다는 죄책감은 결국 당사자에게 심각한 도덕적 외상의 형태로 귀결된다. 이것을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p.195 도덕적 외상은 "근본까지 닿아 있는 도덕적 신념을 위배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거나 막지 못하거나 목격하는 일"과 관계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산업재해다. 더티 워크를 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산업재해를 당한다.

p.249 역설적이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더티 워커가 느끼는 공모 의식과 죄의식을 강화할 수 있다.


이렇듯 ‘점잖은 시민들’과 자본이 공모한, 기만적인 위장은 마치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사회가 떠맡긴 것이 아닌 그들의 자발적 이윤추구에 의한 것처럼, 행위의 폭력성은 노동자 개인의 성품 탓으로, 잦은 부상과 질병은 그들 자신의 불결한 생활 탓이며, 산업재해는 개인의 나약함이나 부주의에 원인이 있는 양 위장한다.

p.284 고분고분한 외국인에게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본토박이 저숙련 노동자들의 계급 불안과 인종차별이 뒤섞여, 이주민들은 사회적 더러움을 획득한다.

p.438 성공한 화이트칼라 전문직이 권력이 있다고 해서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한 이 비난은 훨씬 덜 뼈아프고 훨씬 덜 파괴적이어서 그들의 소득에, 위상에, 존엄성과 자존감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저자가 개인의 악행과 폭력, 산업의 비윤리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행동은, 그런 방식의 파괴행위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타자의 삶을, 폭력을 목도하는 이들이 그에 적응하기 까지의 시간을,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미래를, 불안을, 적어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 누가, 무엇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더티 워크’를 내맡기고 사회의 전선으로, 가장자리로 내모는지. 손쉬운 책임회피는 ‘더티 워크’의 윤리적 전환 방향을 모색하고 현장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마주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치워버림으로써 영영 알 수 없게 만든다.

p.358 윤리적 소비는 정치의 문제를 개인의 자기만족감을 최우선시하는 시장 거래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 '좋은 먹거리' 운동이 시장에서 상품을 선택하는 행위로 축소되면 식품업의 생산 환경 같은 구조적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날 수 있다.

p.411 더티 워크는 그 일을 하는 개인만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 사람이 속한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를 더럽히고, 그가 만나고 교류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기억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정신질환이 있는 수감자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교도관은 그들이 특별히 잔인하거나 혹은 수감자들에게는 인권이 없기 때문인가? 그런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사회의 구석으로 격리되어 마땅한가? 도축과 석유산업 노동자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에 ‘부역하는 자’인가? 노동현장의 그들은 환경파괴와 동물 살해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표적 살상을 주업무로 하는 드론 조종 전투원들은 화면 뒤 안전한 곳에 있으니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일종의 나약함이나 살인자가 겪어야 할 응보 정도로 취급되어 마땅한가?

개인을 집단의 이름으로 호명할 수도, 집단이 그 안의 개인이 갖는 속성과 삶을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그 둘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Dirty work가 Dirty worker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p.140 처벌의 현대화를 추동한 욕망은 처벌이라는 누추한 사업을 더는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은 점잖은 시민들의 시야에서 범죄자의 신체를 숨기려는 욕망이었다. (…) ‘문명화 과정’은 잔인한 폭력이 실제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더 은밀한 장소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문명화된 감수성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폭력을 세탁하는 것도 가능하다.

p.322 더티 워커는 “우리 모두의 대리인”으로서 사회의 다수 시민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불미스러운 일을 수행하는데도 위임자인 우리는 더티 워커에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멸시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넓다. 모든 과정과 사연을 알기에는 산업구조가 너무도 거대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뻔히 존재하는 이들을 너무 당연하게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앞서 말한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호명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는지,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모여들게 하는지, 왜 덜 ‘우리’같은 이들로 구성되는지 이제는 그 원인을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늦었으니 그만큼 더 절박해야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부제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냐고, 왜 우리는, 누구에게 ’더러운 일’을, 어떻게 떠맡기고 있느냐고. 우리는 그들이 아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기에.

p.452 채찍을 휘두르는 군인과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는 공무원은 식민지 시대의 밀사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대리인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 더티 워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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