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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띠지에 쓰인 “시대의 비극”이라는 말을 읽고 생각한다. 대체 얼마나 큰 슬픔이어야, 얼마나 깊은 원한과 증오여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숨죽여 엎드리기를 강요받아야 그들의 비극은 개인을 넘어 시대의 것으로 불릴 자격을 얻는가.
또다시 생각한다. 어떤 비극은 그 일이, 그 때 그 사람들이 그곳에 존재했음을 인정받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히지 않는가. 어떤 일은 비극으로 불릴 자격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틀렸다. 맞는 부분이 없냐고 하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역시 틀렸다. 다른가? 아니. 사실과 다른 것을 우리는 ’틀렸다‘고 한다. 진실을 다른 말로 교묘히 왜곡하는 것을 우리는 ’틀렸다‘고 한다. 사실과 다른 줄을, 진실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틀린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p.41 대감댁 노비. 우리가 자조하듯 던지던 그 말. 하지만 주안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하지만 선배, 우리는 노비가 아니잖아요. (…) 노비도 아니고, 회사 소유물도 아니고, 일 시킬 때만 전원 넣고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기계도 아니잖아요. (…) 그런데 회사는 자꾸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다시 생각해보자.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한다. 예전을 지나 지금으로 온 이들이 말한다.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나는 지금에 와서 과거를 반복하려 한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예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면서도 누군가는 잔뜩 미화된 ‘예전’을 현재에 덮어씌우려 한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반복되는 폭력 앞에서 ‘이만하면 좋아진’을 말한다. 좋아졌다는데, 여전하다. 달라지지 않았는데, 변했단다. 대체 무엇이.
p.17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인식이 넓어지고 기술이 발달해도 바뀌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제 손으로 땀 흘리고 일 하는 사람을 한낱 공장의 부품인 양 취급하는 것.
p.291 현실은 조선 시대 이야기만도 못했다. 사람이 괴로워하다 마침내 죽음으로 가해자들을 고발해도 군대는, 법관들은, 나라는, 그저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고 흐지부지 넘어가기 바빴다. 그렇게 원통하고 원통해서 유진의 앞에 돌아가신 분이 자꾸만 나타나도록.
사람을 해치는 것은 사람이다. 하물며 사람이 모여 이룬 국가 권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덤빈다면 그 결과는 개인이 감당할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게 상처라지. 그러나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안팎으로 낫게 하는 힘이, 그럴 여력이 있어야만 상처는 비로소 아물고 치유될 수 있다. 하물며 끊임없이 더해지고 덧난다면 그 누가 배겨내겠는가.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p.303 사람의 마음은 이 겨울 날씨보다도 더 차갑고 강퍅한 것일까. 조카가 젊은 나이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거기에 대고 그만 좀 하라고 너 하나만 참으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 때문에 누님과의 인연조차 끊어졌다고 울부짖는 것은 대체 얼마나 이악한 마음일까.
인간은 연약하다. 무르고 나약하다. 쉽게 다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버린다. 다시 한번, 사람을 해치는 것은 사람이다. 나약하고 무르고 연약한 인간에게 강인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마음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부러진 자가 너만은 꺾이지 않게 하겠다고 버텨내기를 각오하는 마음이 강하다. 폭력의 위계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마음이다. 홀로 싸우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며 저 먼 우주에 작고 샛노란 것을 띄워내는 마음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다.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에 사무쳐 주저앉은 이를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다.
오직 그것만이 강하다.
p.52 [무척 작아요. 하지만 우주에서도 위원님 눈에 띄었으면 좋겠어서 개나리처럼 샛노란 색으로 칠했어요.]
p.92 "난 솔직히 가끔은, 아, 저 새끼 저거 싹수가 노랗다. 그러고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나도 알지. 처음부터 싹수 노란 애가 어디 있어."
폭력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정의와 본질을 논해왔으나, 기실 이것에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를 다치게 하는 것이 폭력이다. 다른 이를 위협하고 억누르는 것이 폭력이다. 비단 몸으로, 도구로 가해져야만 폭력이 아니다. 말로, 법으로, 시선으로, 삶과 사회의 경계로 밀어내고 짓누르는 것 또한 폭력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지금 이 나라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 그러니까 당연하게 한국인 부모의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아온 젊은이들 중 전쟁을 목도한 이가 몇이나 될까. 세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 뿌리채 뽑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맞닥뜨려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p.210 "어느새 우리는 그저 이 모든 일에 덤덤해졌어." "전쟁에 말이죠." "아니, 전쟁을 빙자하여 도덕이 무너지는 세상에 말이야, 사람을 죽이지 마라, 남의 것을 빼앗지 마라, 그런 건 인간의 기본 도덕이지 않아. 그런 게 없어지는 거야, 전쟁이라는 건."
역사의 가해자들을 천하의 멍청이 취급하는 것은 유의미한 전략인가? 이미 숱하게 지적되었다. 혐오를 발산하고 증오를 흩뿌리는 이들은 멍청하지 않다. 지독하게 치밀하고 집요한 폭력을 고작 ‘멍청하다’는 광범위한 말로 퉁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 말은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른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쉽사리 붙여진다. 이상한 일이다. 혐오를 위해서는 약자를 향하나, 책임회피를 위해서는 강자의 것이 된다. 그러니 모든 일에 멍청해서, 몰라서 그래, 라는 손쉬운 면죄부를 줄 수 없다.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아는 것이 전부라는 아집과는 다르다.
p.326 "…모르는 건 모를 수 있어. 그런데 잘못 아는 건 안 된다는 거야."
천지가 뒤집히고 어제까지의 세계가, 모든 상식이 무의미해지는 것. 그것이 전쟁이고, 국가의 이름을 빌어 자행되는 폭력이다. 우리의 짧디 짧은 역사는 망각을 강요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산 ’자‘를 죽은 ’것‘으로, 죽은 이를 차마 죽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다시 돌아가보자. 상처는 저절로 낫지 않는다.
작중 주제가 되는 사건들의 가해자 다수는 이미 세상을 떴다. 피해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 그 상처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시금 국가의 사죄이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기회는 이미 몇번이고 유실되고 방치된 순간들에 있었다. 누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독자에게는 작중 신의 경고를 통해 전달된다. 여전히 “시대의 비극”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말한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언제까지고 영원하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산 것과 죽은 자가 뒤섞인 시간을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당신은 어디를, 무엇을, 언제를 향하고 있느냐고. 잊지 말라. 망각은 책임을 넘어설 수 없으니.
p.234 "약속을 어기면 안 돼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