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민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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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간은 동물이다.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것도 제법 많이,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동물이다. 인간 심리의 많은 문제는 그것에서 출발한다. 본질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으나 고도로 발달한 사고능력은 진화적으로 내재된 생존시스템의 경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니냐’며 수시로 두들기고 들여다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그런 말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

p.53 오늘날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면 구체적이고 반사적인 행동 반응을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을 분석, 설명, 날조, 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억할 뿐만 아니라 공상도 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굴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갖 공포증에 시달리는 이유다.


정확한 진단 기준을 말하자면 제법 거쳐야 할 관문이 많으나, 짧게 이야기하자면 공포증은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지나친 두려움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며, 이를 회피하느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상태일 때 진단된다.

공포증은 성인보다는 아동에게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유병률이 높다. 사회적 상황에 극도의 두려움을 보이는 사회적 공포증은 미국인의 7%, 영국인의 12%에게서 나타난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로 공포증을 경험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진단기준을 충족하지 않거나 내원을 꺼리는 이들을 합하면 더더욱.

특정 대상을 강박적으로 피하려는 것이 공포증이라면, 광기는 어떤 대상이나 행동에 대한 강박적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자면, 공포와 광기는 인간 충동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불안과 집착 충동, 이 두 가지를 개인 내면의 황폐화, 붕괴, 일시적인 충동이나 성격 정도로 일축할 수 있을까. 공포와 광기는 쉽게 전염되는 감정이다. 개인은 각자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정동적 압력에 쉽게 동조된다.

“너는 이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는 은밀하게 충동을 부채질하는 사회적 스트레스에 촉발된 사고와 행동이 비일상의 수준으로 발전하고 또 차별적인 시선이 특정 집단의 행동이나 사고를 비이성의 그것으로 낙인찍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치 않다.

혹은 특정 집단의 공포나 적극성에 공포와 광기의 이름을 붙여 대수롭지 않은,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것 또한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일이다. 이것은 적절한 사회적 지원을 저해하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데에 꾸준히 이용되어 왔다.

누군가를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은, 어느 때고 혐오와 비난을 부채질하는 데 제법 효과적인 절차였으니,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데는 가히 고금을 막론하는 특효약이라 할 수 있겠다.


p.127 로빈 리처드슨은 (…) 이 용어를 쓰지 말라고 경고했다. 2012년 그는 인종차별주의와 국수주의를 혐오증으로 묘사할 경우 사람들 간의 분열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효과를 낳고 토론의 장을 차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를 미쳤거나 비정상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고, 모욕을 받은 쪽은 당연히 방어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 성찰적 대화를 나누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p.248 여자색정증은 모호한 개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욕망을 정상이 아니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됐다. 1970년대에 미국의 성관계 치료사 루스 웨스데이머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보다 섹스를 훨씬 더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녀를 색정증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수두룩하다."


우리는 점점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와 물건과 상황으로 둘러싸여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회피는 불안을 차단하는 편리하고 단기적인 방법인 만큼 확장되기 쉽다. 더불어 앞서 말했듯, 공포와 광기는 전염되기 쉬운 감정이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자극적이고, 화려하고, 다채롭고, 공격적일 만큼 현란해져가는 세계의 개인이 어떤 형태로든 불안과 집착에 시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p.204 저장의 현장은 물건들과 우리 사이의 고장난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갈망하는 무의미한 모든 물건과 그 물건들이 채워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갈망, 이 둘의 관계는 말가졌다. 만약 강박적 쇼핑이 소비문화의 과도한 수용을 의미한다면, 강박적인 물건 저장은 소비문화의 오작동 혹은 풍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 안에서 소비자는 소비에 실패한다. 소유물이 전리품보다는 마치 포획자나 짐처럼 억압적인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

p.215 습관적으로 반신반의하는 상태를 강박충동으로 분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망설임을 갈망해서라기보다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해먼드가 결정장애를 강박증으로 분류한 이유는 (…) 병적인 의심 상태 안에서는 몇 가지 미래가 서로 밀치면서 자리다툼을 벌이고, 그 어떤 것도 차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실제로 현재 진단되는 불안 및 강박장애 뿐만 아니라 조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 지금의 시선으로는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사례들과 유명인들의 비화까지 각 장의 주제에 따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혹시 아는가. 호기심으로 첫 장을 시작해 마지막 장을 넘길 쯤에는 당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과 두려움에 온몸을 떨고 있을지. 하나쯤 어! 이거 내 얘기 아니야! 를 외치게 될지.

이쯤해서 미래의 독자에게 한 마디. 만일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면, 음, 병원을 가세요. 꼭. 알겠지. 미룬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고 단단히 문제 있는 치료자가 아니고서야 치료를 핑계로 고문 감금에 가까운 짓을 하진 않을테니까요. 어린 알버트 같은 건 다 옛날 일입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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