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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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인플루엔셜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은 연약하다. 아니, 나약하다는 쪽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짧게 살고, 쉽게 다치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죽어버린다. 고비는 지난할지언정 숨이 넘어가는 과정만큼은 순식간이다. 상실은 대개 거창하고 웅장하지도, 아름답고 비장하지도 않다.
그러나 모든 상실, 적어도 죽음으로 인한 것만큼은, 비극이다. 누구에게도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현상 너머의 의미를 부여하는 습성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사람을 잃는 것은 단순히 이름 하나를 지우는 일과 같지 않다. 한 명은 하나의 세계이고, 기억으로 이루어진 흔적은 다른 이의 일부가 된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세계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것과도 같아 남은 이는 폐허를 응시할 의무에 맞닥뜨린다. 부재는 역설적으로 존재의 무게와 크기를 증명한다. 그것은 대체로 특별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와 썩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하나의 상실은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같은 이를 같은 일로 잃었다 하더라도 남겨진 이들 각자에게 다가오는 충격, 그것에서 회복하는 일은 각자의 삶과 기억만큼의 다양성을 갖는다.


사람은 동물이고, 겁먹고 상처입은 것은 도망쳐 숨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프고 서러운 이는 저마다의 세계로 파고들어 숨을 몰아쉴 수밖에.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여기, 남겨진 두 사람이 있다. 평생의 사랑 혹은 영혼의 안식처를 잃은 애너벨, 든든한 이해자이자 울타리를 잃은 벤자민. 배우자이자 아버지인 켄지를 잃은 두 사람. 엄마와 아들이기 이전에 그들 또한 연약하고 불안정한 인간에 불과하다. 켄지의 죽음은 정말이지 “재수가 없었던” 일이었으며, 전혀 영웅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나름의 일상을 지켜나가고자 하나, 대체로 세상은 비틀거리고 위태로운 이들에게 친절한 곳이 아니다. 스스로의 상처를 부정하는 이들, 그들의 발버둥은 도리어 서로를 상처입히고 관계를 어그러뜨린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서로가 자신을 탓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확실한,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소용돌이.


직장 내 아날로그 업무를 담당하는 애너벨의 입지는 켄지의 죽음 이후 전자 뉴스 서비스의 확산과 함께 더욱 위태로워지고, 설상가상으로 사춘기 아들 벤자민(베니)은 온갖 사물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물건들은 요정 이야기처럼 상냥하고 환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일상을 혼란에 빠트린다. 사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자연히 망상과 환청으로 치부되고, 자기 몫을 삶을 살아내기도 버거운 모자가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외롭고 슬프고 두려운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사들이고 쌓는 것으로 채우는 애너벨, 도망쳐 숨 쉴 곳을 찾는 동안 점점 더 주류 사회와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베니.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미쳐’가고 소외되는 이들은 누구인가.대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길 잃은 이들은 어디로 돌아가고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p.154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것을 원하게 하는 걸까? 무엇이 물건들에게 인간을 매혹시키는 힘을 주는 것이며,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에 한계라는 게 있을까?

p.525 일단 어떤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때로 돌아갈 수 없어. 한번 깨진 신뢰는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쉬운 답은 없어.


소외되고 밀려난 ‘규격 외’의 존재들이, 부적절한, ’도움이 필요한‘, 슬퍼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이들이, 심지어는 물건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짜‘일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발화자에 자격이 존재하는가? 나는, 너는, 우리는 무엇이며 사회에서 예술과 개념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 자신도 가족을 잃은 후 환청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등장인물과 사물을 오가며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진짜라고, 그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지금, 여기 존재하는 느낌을 잊지 말라고, 그러나 흘려보내라고.

p.280 그건 한 젊은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소리야. 그리고 책의 세계에서 이건 기적과 다름없지.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찾거나 소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말하는 순간.


이 책은 기본적으로 상실과 회복에 관한 성장소설이다. 그러나 고민거리를 던져줄지언정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책 안의 책, 텍스트의 형태로 전해지는 텍스트는 결국 읽는 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힘도 갖지 못한다.

주변의 것,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은 비단 사물 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사랑도, 자기 자신조차도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놓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잃어버릴지언정, 잊힐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존재는 힘이 세다. 이 세상에 머물렀던 이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p.578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 휩쓸려 가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해일은 우리에게 무상함이 진짜임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하고 있다.


말과, 의의와, 사랑과, 기억과... 무형의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흩어질지언정,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상실은 비극이나 영원하고 완전한 비극이 아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서로와 스스로에게 가시를 세우는 주인공들에게, 이 책을 읽을 독자 자신에게 같은 말을 전해주자.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동시에 어떤 것은 의미를 가짐으로서 영원하다고. 지극한, 어떤, 마음을 담아. 너를, 나를 보라고.

p.582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특별한 망상의 풍선 속에 갇혀 있고, 거기서 탈출하는 게 모든 사람의 인생 과제야.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우린 과거를 현재로 만들 수 있고, 너를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네가 기억하도록 도울 수 있어. 그리고 우린 너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고 시간을 경험하는 순서를 바꾸고 너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지. 하지만 깨어나는 건 오롯이 너에게 달려 있어. 준비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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