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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사랑해서 유행하게 되는 노래, 유행가!

그래서 한 시절을 그대로 대변하는 노래, 유행가!

여기 옛 유행가와 함께 질곡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던 우리네 그 시절을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스타디움의 저주받은 자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종목 챔피언, 그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뿐만 아니라 5천 미터, 1만 미터까지 무려 세 개의 장거리 종목 금메달을 모두 거머쥔 인간계를 뛰어넘은 철인, 그래서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에밀 자토펙. 그가 남긴 멋진 말이다.

러너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달려야 한다. 호주머니 가득 돈을 채운 자는 진정한 러너가 아니다.”

자토펙의 명언 시리즈는 사람들을 한껏 매료시킨다. 실제로 그는 진정한 러너가 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심폐기능을 높이기 위해 숨을 멈추고 뛰다 기절한 적도 있고, 탈장수술을 받은 뒤 2주 후에 개최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정상의 몸이 아닌 채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자신이 인간계를 뛰어넘은 러너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그런데 그가 달리는 모습은 정작 처연하다. 머리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질주하는 러너들의 당당함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머리와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으며, 연상 씩씩대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당당하기보다는 초라하고 가엽다. 곧 포기할 것 같다. 곧 쓰러질 것 같다. 심지어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 끝내.

사람들은 이러한 자토펙에 미친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기에 더 환호하며, 몸이 잔뜩 기울어져 있기에 더 열광한다. 그 고통을 엿보며 즐긴다. 겉으로는 인간 승리에 감동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인간 학대에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신적 한계는 알겠고, 생물학적 한계는 어디까지지? 어쩌면 그 한계를 보고 싶어 환호하고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스포츠 세계는 일면 가학적이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하여 월계관을 쓴 건 자토펙보다 16년 앞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무려 1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어느 누가 먼저 들어올 것인가, 어느 누가 얼굴을 잔뜩 찡그릴 것인가, 어느 누가 골인점을 지나 토사물을 쏟아내며 그라운드를 나뒹굴 것인가. 12만 명 관중들의 관음.

이 스타디움은 유독 더 불온했다. 광적인 나치즘이 바랐던 건 아리아 인종이 다른 인종을 뿌리치고 스타디움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장면. 그래서 아리아인은 우수하다는 자신들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타디움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일장기를 큼직하게 가슴에 단 아시아 동맹국의 깡마른 청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대관계에 있던 유럽의 다른 인종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동맹국이라 하지만 아시아의 맹주라고 자처하며 슬슬 기어오르려고 하는 일본인종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동맹국 일본에게 침략당해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 조선, 그 조선의 깡마른 마라토너 손기정이어서 다행이었다. 12만 명 아리아인들은 손기정, 너라서 고마워라며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처연했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남의 나라 이해관계로 환호 받고 열광받는 그 스타디움의 불온함과 가학성 때문에 처연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나는 사람이라 달렸다. 달리는 게 좋아서 그저 달렸다. 뛰어난 인종이어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고통을 가장 잘 이겨내며 달릴 수 있는 나였기에 월계관을 머리에 올릴 수 있었다.

 

반도가 낳은

마라손의 두 용사 우승 빛나는

즐거웁다 이 날이여

기쁨으로 맞이하자 그 공적 크도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찬양의 높은 소리

온 세상을 떨치누나

 

스포츠는 대리의 영역이다. 드라마도 대리의 영역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인위적이라는 면에서 스포츠와 다르다. 스포츠는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이 대리의 영역에서 관중들은 가혹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을 내면 한없는 찬사를 보내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한없는 저주를 퍼붓는다.

또한 스포츠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경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합법적인 룰 안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을 처참하게 짓누를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약소국이 강대국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짓누르지 못하고 짓밟혔을 때, 선수들은 그 대리의 경쟁을 함께 치른 관중들로부터도 짓밟힐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 못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렇게 고개 숙인다. 스타디움의 저주받은 자들. 국가주의, 인종주의 스포츠로부터 저주받은 자들. 남의 나라 국기를 가슴에 달고 달린 처연한 손기정이었지만, 다행히 이 땅의 사람들은 그를 기쁨으로 맞이했다. 그의 공적을 크게 외쳤고, 높은 소리로 찬양했다. 시상대에서 환하게 웃지 못한 그였으나, 이러한 조선 민중의 환대에 비로소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순수한 스포츠 영역에서의 일인자의 환희를 마음껏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 스포츠 영역에서도 여전히 처연한 한 사람이 있다. 손기정과 함께 끝까지 완주하며 3위를 기록한 남승룡.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보다. 그의 땀, 그의 투혼, 그의 결기가 남긴 기록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가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스타디움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가학적인 관음 속에 수많은 스포츠가 불꽃 튀기고 있다. 짓누르지 못하면 짓밟히고 마는, 인생과 참 많이 닮은 저 스포츠가.

<<한 줄도 좋다, 옛 유행가-이 아픈 사랑의 클리셰>>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4권입니다.


('한줄도좋다' 시리즈 출간 전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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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재영이 장르적 상상력으로 곰곰 생각한 서른 편의 SF 영화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객석이라는 한 줄 공간에서 만났던 세계를 작가가 선택한 한 줄 대사에서도 만나보세요.




우리는 체념하는 종족이니까요


체념에는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다는 뜻도 있지만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후자에 가까운 할 수 없지. 하는 데까진 해보고식의 체념이라면 잘 단련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후회를 끔찍이 싫어합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단단한 벽에 막혔던 경험이 그런 상황을 아예 만들지 말자는 다짐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회와 후폭풍, 그러니까 무력감과 수치심 사이 어디쯤에 놓인 그 느낌에 취약한 이들이 답을 찾는 법은 조금 독특합니다. 가령 시험을 치를 때 헷갈리거나 모르는 문제를 맞닥뜨리면 언제나 후회가 남지 않는 번호를 택하죠. 객관식일 때만 가능한 방법은 아닙니다. 수업이나 교과서에서 듣고 읽은 답에 가깝다고 유추되는 쪽을 고르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끌리는 답, 맘을 강렬하게 움켜쥔 쪽을 취한다는 것이죠. 맞으면 맞은 대로, 틀리면 틀린 대로 결과에 만족합니다. 만족한다기보단 결과를 뛰어넘는다고 해야 할까요. 그 대신 진짜 문제를 복기하고 개선하는 데 에너지를 쏟죠.



인터스텔라에는 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행성은 틀렸으니 다음 행성에 기대를 거는 이들에게는 체념이야말로 귀한 자산이 되는 셈이죠. 하지만 안 되면 말고의 자세에도 마지노선은 있습니다. 플랜 B, C, D를 상상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기댈 곳이 없을 때는 곤란해집니다. 터전, 그러니까 비빌 언덕 없이는 체념도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터전을 마련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많은 시간을 씁니다. 빼앗긴 터전을 되찾아오려고 일평생 투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때 터전은 생활의 근거지이자 국가, 세계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다만 지구 단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지요. 이웃한 도시에 싱크홀이 생겨나고, 엄청난 규모의 산불이 발생해도 지구가 어떻게 될 거라는 상상은 도통 생겨나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인류에게 지구는 생활의 근거지, 비빌 언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구가 오염되어 수십 년 안에 끝장날 위기라면 어떨까요. 이 행성에는 더는 돌아갈 곳이 없으니 무조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면 말이죠. 저도 한때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꾼 적은 있으나 지구가 아닌 곳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달이나 화성에 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까요. 그곳은 인간이 살 만한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주선 조종사이자 엔지니어이자 옥수수 농장주 조셉 쿠퍼의 말에 귀 기울일만합니다. 그는 체념하는 인간입니다. 체념하는 인간은 솔직하고, 언제나 플랜 이후를 떠올릴 줄 압니다. ‘할 수 없지. 하는 데까지 해보고의 심정으로 말이지요. 쿠퍼는 체념한 채 답을 찾을 것이고, 우리는 우주로 나갈 겁니다. 쿠퍼의 말대로 이 세상은 보물이지만 우리에게 잠시 나가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이렇게 도리를 깨닫기로 합니다.


<<한 줄도 좋다, SF 영화-이 우주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3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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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김상혁 시인이, 어린 날 마음껏 읽고 마음껏 웃었으며 그러다가 마음껏 잠들며 함께한 만화책으로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초여름을 추억하지 말라'


도련님의 시대2권의 소제목은 무희. 이 책은 모리 오가이의 소설 무희(1890)의 탄생 배경을 다룬다. 오가이는 메이지시대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 머물며 엘리스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귀국과 체류의 갈림길에서 사랑을 버리고 국가를 선택한다. 나중에 엘리스는 그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도착하였으나 그녀를 기다리는 건 오가이의 냉정한 태도뿐이다. 만화는 일본을 찾은 엘리스에게 마음을 빼앗긴 또 다른 소설가 후타바테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오가이는 친구 후타바테이의 묘비 앞에서 한때 엘리스를 사랑했던 젊은 자신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가 알겠는가. 그 사람에게도 가슴이 뛰던 초여름이 있었음을.” 그럼에도 오가이가 예전의 선택 자체를 후회하는 건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대도 그는 그녀가 아닌 국가를 택했을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무희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만화가 그리는 모리 오가이의 캐릭터는 자기 선택을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애도하는 사람이다. 맞다. 애도라고 말해야 옳다. 열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집안과 국가마저 버리려 했던 젊은 오가이는 오래전에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다시 들여다보아도 나는 모리 오가이가 싫다. 도련님의 시대도 굳이 그를 미화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만화의 애정 어린 시선이 머무는 곳도 노인이 된 오가이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엘리스를 떠올리며 숨을 거둔 후타바테이와 어리석어 보일 만큼 사랑의 약속을 믿는 엘리스라는 인물이다. 일본을 찾은 엘리스와 겨우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오가이가 당신의 사랑은 고집일 뿐이라며 그녀를 내치는 장면에서, 그의 머리에 번개라도 떨어지길 바란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화를 식히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나라면 가족도, 나라도 버리고 엘리스와 함께 독일에 남았을까? 일본까지 찾아온 엘리스를 따라 나라면 독일로 떠날 수 있었을까? 대답은, 당연히.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사랑의 감정이 영원하지도 않고, 심지어 조변석개한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니까 엘리스를 따라 독일로 건너갔으나, 몇 년이 채 되지 않아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건 그나마 나은 상황이고. 나는 엘리스가 지겨워졌는데, 그녀 말고는 나 같은 동양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여성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모든 걸 버린 사랑의 도피에 대체 무슨 의미가 남나.




모리 오가이의 유학 생활 동안 그와 엘리스는 동거하였다. 좀 나쁜 생각도 든다. 오가이는 그 기간 동안 정열을 다 소진한 게 아니었나 하는. 나는 사랑이든 마음이든 그걸 계절에 비유하는 작자는 믿지 않는다. 물론 계절도 사람의 마음도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두면 겨울로 변하기는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계절이 겨울로 향하는 건 막을 수 없어도 마음의 여름은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결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관하여 그것을 지킨다고 말한다. 이때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 한때의 감정을 그래도 유지하겠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자기감정에 관하여 인간은 전혀 전능하지 않다. 가령, 독일과 엘리스를 향한 가슴 뛰는 초여름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오가이의 사랑은 끝없이 발명되어야 했다. 진정한 사랑은 인생의 다른 길을 열어준다느니, 사랑이란 서로의 가능성을 죽이지 않는 법이라느니 하는 관념은 어쩌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엘리스라는 존재는 오가이가 일본에서 펼치려는 꿈과 그가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려는 소망을 무너뜨리려고 다가온 천재지변이었다. 그리고 그녀라는 재앙이 바다를 건너 모리 오가이의 눈앞에 거듭 닥쳐온 것이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천재지변이고 재앙이고 그게 다 뭐란 말이냐. 사랑의 결심이란 이렇게 고백하며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시끄러운 눈 안에 자기를 스스로 가두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초여름을 붙잡아두기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해보겠다는 고백과 함께.


<<한 줄도 좋다, 만화책-만화는 사랑하고 만화는 정의롭고>>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2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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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음악 시간을 기억하시나요?

무대 공포증을 이기며 교탁 앞에 나가 가창 시험을 치르던 시절...


그 시절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되새기는 에세이가 나왔습니다.

<<한 줄도 좋다, 우리 가곡-내 쓸쓸한 마음의 울타리>>




장석주 시인이, 시인의 삶에 때로는 푯대가 때로는 위로가 때로는 기쁨이 되었던 서른네 곡의 우리 가곡을 추억합니다.


여기, 그 한 곡을 미리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연소의 사랑

 

그해 가을 마가목 열매가 유난히도 빨갛게 익어 아름다웠다. 동네 텃밭에는 까만 씨앗이 촘촘히 박힌 꽃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해바라기가 고개를 기우뚱한 채 서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마른 옥수수 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거렸다. 나는 반듯하고 하얀 이마 아래 검은 눈썹을 가진 애인과 헤어졌다. 애인은 딸기와 커피 우유를 좋아하고, 영작英作과 브론테 자매와 프랑소와즈 사강을 좋아했다. 흑단 같은 머리에서 미나리 향 같은 샴푸 향이 나던 애인이 나를 떠났다. 내가 삼나무 같은 신의를 저버리고 허튼 거짓말을 했던 게 들통이 났기 때문이다.


가을이 왔다. 은행나무들이 도립한 거리에 군밤 장수들이 나타났다. 하천에는 누가 내다 버렸는지 개의 사체가 방치되어 썩어가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은 고엽제 후유증을 앓았으며, 파고다공원 뒷담 아래에는 노인네들이 나와서 훈수 장기를 두었다. 상고를 나와 은행에서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다니던 친구의 형이 사법고시 1차 시험에 붙고, 동네에서 마트를 하던 여자는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서 곗돈을 들고 야반도주했다. 사람들이 풍문을 수군거리는 동안 겨울이 왔다. 나는 장롱에서 동내의를 꺼내 입고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니체와 바슐라르와 하이데거 책을 찾아 읽으며 파란 노트에 서정시를 써나갔다. 시립도서관 창문에 성에가 끼었다. 나는 시가 잘 되지 않는 날엔 공연히 시립도서관 창가를 서성거렸다.



사랑은 타오르는 것이고, 타오르다 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가곡을 처음 들었다. 사랑의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북녘 찬 하늘에는 서릿발 묻은 발을 날개 아래에 모으고 기러기 떼가 날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콸콸 나오는 수돗물에서는 쇳내가 났다. 내 오른쪽 중지 끝마디에는 만년필에서 흘러내린 파란 잉크가 묻어 있었다. 그해가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대학 영문과의 입학생도 되지 못했고, 동해안 포구의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밀항도 하지 못했다.


탈대로 다 타시오/타다 말진 부디 마소라는 구절은 사랑의 이상이 완전 연소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다 불사르며 사랑하는 것, 이것은 반이성적 미친 상태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고른 숨결의 사랑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반쯤은 얼이 빠졌거나 미친 상태에서 뻗치는 열광의 힘이다. 열광이 사랑의 한 성분인 것은 맞다. 내게는 그런 열광이 부족했던 것일까?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사랑은 더 이상 변치 않는다. 변심할 마음 한 줌조차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반만 타고 꺼지는 사랑일랑 아예 시작조차 말아야 옳다. 세상에 쓸모없는 게 다 태우지 못하고 중도에서 작파한 사랑이다. 그러니 반만 타고 꺼지는 사랑은 시작을 하지도 말자. 사랑을 하려거든 자기를 다 불살라야 할 일이다. 그 연소는 제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제 안의 근심과 불안과 욕망을 다 태우는 일이다. 가슴팍에 한 줌 재만 남을 때까지 다 태우고 꺼져야 하리.


<<한 줄도 좋다, 우리 가곡-내 쓸쓸한 마음의 울타리>>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1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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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건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데 이의는 없지만

또 어떤 일이건 더 중요한 과정이 있다는 데도 이의가 없다.

책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질문을 바꿔서 내가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바로 나오는데,

그건 바로

책 제목을 정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데 가장 어렵다.

                            

물론 국내 저자인 경우는 편하다. 제목 정하기의 99%는 저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물론 마케팅과 관련해서 1% 정도 출판사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번역서의 경우는 좀 다르다.

원서 제목의 직역이 바로 제목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경우도 많고, 저작권자 편에서도 용인된다.

아마도 이렇게 관례가 형성된 건 "현지화" 때문일 것이다.

신간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시인 장의사가 마주한 열두 가지 죽음과 삶>>의 원제는

The Undertaking: Life Studies from the Dismal Trade 이다.

직역하자면

장의:장의업에서 배운 인생

정도 되겠다.

기획하면서 책을 훑어본 상태에서 하마평에 올랐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

"세상과 헤어지는 일"

'장의'나 '죽음' 등등을 독자들이 꺼려 할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일단 만들어 본다.

착안점은

전자는 장의라는 게 망자를 보내는 일이라는 거고

후자는 망자는 세상과 헤어진다는 건데

부제로 보완한다고 해도 밋밋, 평범, 임팩트 없음이라는 자평이 금세 된다.

후자의 경우는 장의사가 주체가 아니라 망자가 주체가 된다는 점도 책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들자 딜리트하고

원제를 직역하면서 좀 푸는 방법을 고려한다.

저자가 장의사이면서 시인이라는 점이 키워드의 하나라

"장의사 시인이 깨달은 삶( 내지 인생)"

"장의사 시인의 인생 수업"

이런 걸 생각해본다.

웬 교과서 제목, 이것도 아니다.

번역 원고를 기다린다.

원고를 받고 교열을 보면서 책 속 문장 중 제목 삼을 것을 찾는다.

인상 깊은 책 속 한줄에

저자가 자신의 장례식을 예기하면서 쓴

"내가 있었다고 말해 줄"이라는 구절,

자신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죽었다고 말해줄 증인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감동받는다.

"내가 있었다 말해주렴"을 후보에 놓는다.

무슨 책인지를 알릴 정보가 너무나 부족한 제목이다.

독자들이 제목을 보고 이게 뭔 내용의 책일지 짐작이 요원하다.

탈락.

장의라는 영어 단어 undertaking이 뭔가를 '떠맡는다'라는 의미라는 점과

(저자가 이걸로 말장난pun도 좀 한다)

시인 장의사라는 점에 착안하여

"시인이 맡은 일, 장의"라 해보다가

영어 말장난이 한국어에 가당치도 않고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등 접는다.

교열을 보고 또 보면서 책을 외울 지경이 되는 어느 날

문득, 죽은 자를 "묻는" 장의 행위(이 책에서 다루는 장의는 거의 매장이다)와

질문한다는 "묻다"를 한국어에서 중의적으로 쓸 수 있다는 영감이 떠오른다.

(저자만 말장난하냐 나도 한다)

그저 떠오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감'이라 명명해본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죽음을 묻다, 삶을 묻다"이다가,

검색해 보니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는 류의 제목이 허다하고

역시 이 책은 저자가 장의사이면서 시인이라는 점이 중요하니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가 되고

아무튼 '작가'라는 걸 먼저 내세우는 게 중요하니까

부제는 '장의사 시인'이 아니라 '시인 장의사'가 된다.

결국, 죽음이니 장의니를 회피하려던 얄팍한 상술은 폐기되고

살펴보면 원제에 "묻다" 정도 추가된 제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영감의 소산, 이 중의적 "묻다" 한 단어가

원제를 능가할 어떤 울림을 "현지 독자"들에게 주어서

판매에 반영되기를 고대하고 기대하고 희망하고 소망하고 염원하고 등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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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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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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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1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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