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세자의 남은 삶


폐출된 양녕대군은 즉시 강화江華로 거처를 옮겼다(6월 22일). 51세로 아직 노쇠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태종은 새로 임명된 세자에게 곧바로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8월 8일). 그때부터 붕어할 때까지 4년 동안 태종은 국무의 핵심인 인사와 군정軍政을 관장하면서 갑작스레 즉위한 21세의 젊은 새 국왕이 안정적으로 왕권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살았다. 세자에 서 폐출된 그는 그 자체로 큰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그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실제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세종 6년(1424) 3월 청주 호장戶長 박광朴光과 같은 해 10월 갑사 지영우池英 雨는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덕을 받게 될 것” 이라거나 “그가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등의 난언을 퍼트려 처벌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탄핵이나 난언에 휘둘리지 않았고, 1년에 한 번 정도 그를 불러 우애를 나눴다(이를테면 세종 14년 〔1432〕 4월, 세종 15년 12월, 세종 16년 1월, 세종 17년 9월 등). 재위 20년(1438)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됐다). 이런 사실들은 세종의 우애와 인격의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라고 여겨진다.


자신의 과오로 권력에서 배제됐지만, 양녕대군은 정치적 관심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세조
의 집권 과정에서 그가 보인 행동이다. 그는 그 과정의 중요한 지 점에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단종端宗 1년(1453)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 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安 平大君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다(10월 17일). 

6개월 뒤 양녕대군은 단종의 사사라는 좀 더 중요한 문제에 개 입했다. 그는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錦城 大君·송현수宋玄壽 등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고, 역시 윤허를 얻어냈다. 물론 이런 사안은 그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끝내 관철됐을 것이다. 그러나 종친을 대표한 양녕대군의 적극적인 발언이 그것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 뒤 등극한 세조가 양녕대군을 후대한 것은 당연했다. 만년에 양녕대군은 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관찰사와 환관 등을 보내 극진히 수행케 했다. 또한 양녕대군이 죽음을 앞두고 병고에 시달리자 세조는 그의 서자인 이순李諄과 이심李諶 을 승진시켜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세조 8년 〔1462〕 6월 24일).

양녕대군은 세조 8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 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 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그날 그의 졸기에 기록된 사평史評 의 한 부분은 음미할 만하다.

그는 성품이 어리석고 곧았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겼다. 세종의 우애가 지극했고, 그 또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 시종 始終을 보전할 수 있었다.

끝으로 그의 독특한 삶은 현대에 여러 문학작품으로 재구성됐 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대표적으로 김동인(『광공자狂公子』), 조흔파(『양녕대군』), 박종화(『양녕대군』) 등이 그를 다룬 소설을 남겼다.

반성문과 항의서



앞서 말한 대로 양녕대군은 어리와 관련된 실행 때문에 두 편의 글을 부왕 태종에게 올렸다.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첫 번째 글은 반성문이고 두 번째 글은 항의서에 가깝다. 태종 18년 5월 30일 변계량이 써준 첫 번째 글에는 깊은 반성의 마음이 유려한 문장에 담겨있다. 당대를 대표한 문장가인 변계량이 대신 썼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전혀 다르다. 직설적이고 급박하다. 그런 직설과 급박함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그대로 표현돼 있다. 앞의 반성문은 “왕세자 신 이제는 말씀드립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로 시작했지만 이 글에는 그런 도입 자체가 없다. “전하의 시녀는 모두 궁 안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모두 깊이 생각해 받아들이는 것이겠습니까?” ‘전하’와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화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말이다. 

중간 부분도 방탕했지만 성공했거나 절제했지만 실패한 역사적 선례를 들면서 자신의 실행을 강변하고, 신효창을 용서한 사례를 들며 태종을 비난했으며, 세손을 임신한 숙빈이 곡기를 끊었으니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위협에 가까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짧은 항의서에서 도드라지게 새된 목소리는 맨 마지막 문장인 것 같다. “지금부터 새사람이 돼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앞의 맥락과 너무 달라 다소 엉뚱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나도 그래봤고 내 아이도 그런 적이 있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오히려 부모님께 대들다가 “앞으로는 그러지 않고 잘할게요!”라고 일방적으로 말한 뒤 제 방으로 훌쩍 들어가는 것.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전과 함께 읽을 사료 부분에 대한 해설을 포함한 3회 연재였습니다. 월요일에 마지막 4회로 찾아뵙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