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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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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글자 풍경』

인문학-교양 인문학/ 300쪽/ 150*210mm/ 15,000원/ 을유문화사/ 2019-01-30

2017년 한창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됐을 때 우연한 기회에 타이포그래피야학이라는 기관의 유지원 씨 강연을 듣게 됐다. 당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공공서류 양식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한국의 서류 양식이 얼마나 조악한지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그의 인문학적 마음씀씀이가 느껴졌고 실용적인 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타이포그래피도 생소했지만, 공공서류의 존재 가치를 타이포그래퍼의 관점으로 재정의해 허와 실을 가려내는 것이 전문적이고 새로운 정보를 전달받는다는 점에서 참신했다. 공공서류 양식의 디자인적인 요소와 그에 호응하는 효용을 생각할 때 그 씀씀이란, 마음을 데워주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글자 풍경』에는 글자의 둥글고 밝은 모양이 있고, 다양한 필적의 질감이 있고, 『훈민정음』「정인지 서문」에서 언어학자 정인지가 말하듯 “천지 자연의 만물에는 두루 기운(氣)이 흐른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흘러 들어 다시 소리로” 나오는 소리가 있다. 책이라는 물성에 내용의 공예적인 요소와 조형미가 더해진다.

저자는 말한다. “디자인은 디자이너만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의 영역은 뭘까. 나는 편집을 점점 협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독자와 연결되는 부분은 공예품처럼 직조된 문장들로서 책은 하나의 공예품이다. 직조된 문장들이 읽는 사람에게 경험과 감정, 특정 심상을 살려준다. 그게 독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런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이포그래퍼 관점의 새로운 정보가 주는 실용의 아름다움.

요즘 공예의 특성은 상품가치로 또는 수제, 핸드메이드라는 이름으로 그 가치가 비용으로 환산되고 판매되지만 그 안에 “장인의 밀도 높은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기에 그 가치를 갖는다. 책은 가격 책정을 통해 상품가치를 갖게 된다. 문장을 빚고 세우고 직조한 작가의 시간 밀도와 삶의 에너지는 ‘변이는 있지만 대개 표준화되어 있는’ 책이라는 물성에 담긴다.

저자는 미술공예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모리스가 제작에 관여한 책의 판본을 보면서 말한다. “그윽한 자연의 빛을 머금은 종이는 마치 결이 살아있는 피부 같았다. 그 아래에서 맥이 고동하고 따뜻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책의 힘은 작가가 들인 시간의 밀도, 삶의 에너지 그리고 그 힘을 담은, 따뜻한 피가 흐를 것 같은 피부이자 매체인 종이를 통해 느껴진다. 책은 실용적인 물건은 아니지만 실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인류의 기록 체계 속 대부분의 글자들은 (-) 소통하고, 연결되고, 관계 맺고 싶은 마음에서 온 것이다.” 글자는 실용적인 것이다. 글자는 소통과 관계 맺음이라는 실용에 의해 파생됐다. 그렇기에 책은 앞으로 조금 더 실용적으로 소비될 것이다. 한 사람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의 실용을 어떻게 물성화해서 책에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을 통해 글자와 책, 허준이 저술한 의학서를 “바짝 긴장해서 꼼꼼하게 교정을 본” 조선 내의원들의 마음, 한 사람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판결문이 무효가 되지 않도록 판결서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를 일일이 검수한 법 관계자들의 마음,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타이포그래퍼이자 저자의 마음을 통해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대문자를 빨리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난 소문자처럼 작고 묵묵하고 ‘아무 일 없는 듯’ 보이고 자연스럽게, “청년과 같은 젊음과 대담함으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예술사조인 청년양식(유겐트슈틸)처럼 삶의 기쁨을 찾는 방식으로 일하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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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 르네상스를 만든 상인들
성제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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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라, 한 권의 스캔들을

성제환,『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맥락의 질문에 ‘사랑과 굶주림’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렇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을 점하던 그들(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를 후원하던 대상인들)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굶주렸던가.

 

“르네상스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토대가 된 것이 이 상인들의 욕망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욕망의 주체로 저자는 상인들을 지목한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보통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산드로 보티첼리와 같은 예술가들과 그 작품을 머릿속에 시각화하기 쉬운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의식 역시 그러한 불만(족)스러움과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왜 르네상스 시대의 주연을 상인들에게 맡겼을까.

사랑과 굶주림은 그 자체로 욕망의 주도적인 경향성이다. 스트로치 가문, 브란카치 가문 그리고 메디치 가문 등 현세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던 대상인들은 사후세계를 향해 두려움과 관심을 쏟는다. 그렇게 쏟아진 그들의 관심과 두려움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일종의 굶주림의 현상을 낳는다. 예술작품을 후원하던 그들은 물론 ‘특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예술작품을 이용했다. 그러한 이용에 의해 예술가들이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팔린다는 말은 세속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문명이란 전달”(『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문학사상, 2004)이라고 했듯 그것은 일종의 문명의 전달이었다.

만약 그들이 밋밋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저도 잠재적이어서 그것이 발휘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들, 황금을 쌓고 대토지와 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의 욕망은 당시 피렌체를 놀랍도록 화려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은 그들의 욕망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그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상인들에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문의 열쇠를 쥐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이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교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시대와 그 열쇠. 어쩌면 르네상스는 열쇠 구멍을 맞춰나가는 과정이자 그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스캔들’이다. 우리는 이 책을 넘겨 읽으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엮인 매혹적이고 위험하고 한편으로는 획기적인, 놀라운 스캔들을 한 장 한 장 뜯어보고 넘겨볼 수 있다. 책갈피를 꽂아놓을 수도 있다. 기체처럼 날아가버리거나 액체처럼 흘러버리지 않은 그들의 ‘창의력’ 또한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니 훔쳐보라, 한 권의 스캔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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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의 시대 - 길들여진 어른들의 나라, 대한민국의 자화상
이승욱.김은산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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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의 시대』에 우리들의 질문

이승욱 · 김은산,『애완의 시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이 우리들의 근본 기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불안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우리에게 불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있다. 처리될 수 있음과 처리될 수 없음. 그렇담 어느 것이 처리될 수 있는 불안이고 어느 것이 처리될 수 없는 불안이란 말인가.

저자 이승욱과 김은산이 말하는『애완의 시대』의 불안은 유전자다. 베이비부머 부모들은 에코 세대 자녀들에게 불안이라는 유전자를 물려줬다. 불안유전자는 애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체성이자 그 징표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하이데거 말대로 불안이 죽음에 대한 것이라면 애완의 시대에서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더 괜찮은 애완견’이 되고 싶은 그들에게 죽음은 “미래라는 시제의 실종”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애완의 시대에는 부모의 삶과 자녀의 삶도 없다. 근원적인 불안과 조바심, 열등감에 길들여진 삶만이 있을 뿐이다. 에코 세대는 메아리처럼, 성장과 자기 삶을 유예시킨다. ‘대리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진짜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대리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길을 잘 잃는다. ‘자신의 몸과 감각으로 세상을 뚫고 나가는 자신만의 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야생성과 자연성을 죽여 없애고 (-)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국민’이 되어 애완의 시대”로 들어선 우리들은 마음과 정서의 ‘공간지각력’을 상실했다.

 

“야생은 표백되어, 애완만 번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들이 우리의 심장 속에 재우고 있는 독재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줄 그 대상’ 즉, ‘내 존재가 살아있어도 됨을’ 증명해줄 그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소외된 존재로의 전락이라는 환상, ‘잉여’가 되는 환상적 불안”을 날마다 시뮬레이션한다. 그로인해 우리는 개인의 상처와 과거를 착취하고 독차지하는, 우리들의 심장 속에서 졸고 있는 독재자로부터 ‘과거의 반복재생’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다고 믿지만 사실은 스스로 길들여짊으로써 그를 자초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자에게 애걸하지 말자. ‘잉여’는 없다, 다만 그렇게 부르는 자들만 있을 뿐이다. 국민을 ‘잉여’라 부르던, 더 정확히 말해 국민 스스로를 ‘잉여’라고 무의식화 시킨 그들은 범죄자다.”

 

우리들은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앞에 어떤 삶을 놓을 수 있는가. 저자는 “우리에게는 자생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흐르게 하는’ 자생력이 필요하다. “흐르는 물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스스로를 정화한 정의이며, 이것이야말로 고여 썩는 악에 물들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나에 의해서만 길들여질 때,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한 자기 ‘삶의 속살’을 직접 경험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대리인, 애완견으로 남게 할 것인가.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나? 공동체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이것이 애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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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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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 권의 미술관이다

알랭 드 보통 ․ 존 암스트롱,『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예술은 우리 앞에 어떤 포즈로 놓여있는가. 이 질문을 뒤집으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술을 바라보고 대하는가 하는 질문이 된다.

알랭 드 보통의 예술론을 대변하는 이 책은 크게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미적 객관주의와 미적 주관주의라는 예술론에서의 두 가지 주류적 관점,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균형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단지 말한다. 자신이 감각하고 인식하고 의식하는 예술에 대해서. 이 책은 이야기가 있는 140여점의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그리고 방법론, 사랑, 자연, 돈, 정치라는 큰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입맛은 변론할 것이 못된다(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라틴어 속담이다. 예술을 맛보는 우리들의 입맛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을 통해 우리의 시간과 삶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들의 감정과 정서 그리고 입맛. 그는 예술이 잃어버린 질문을 나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나와 너와 우리는 예술이 잃어버린 세계를 복원하는 ‘영혼의 미술관’들이다.

 

예술은 목적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 않는다.

 

한 사람은 하나의 경로가 된다. 아프리카 격언 중 이런 문구가 있다. 한 노인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영혼의 미술관, 그리고 노인이라는 도서관. 우리는 어떤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노인의 도서관이 보편적으로 타당한 어떤 삶의 방식 그 경험적 지식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면. 영혼의 미술관은 개별적 고유성을 갖는 우리의 삶,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삶, 나의 감정, 나의 본질에 가닿는 어떤 경로이자 나라는 존재 그 단서들의 총체다.

예술은 우리 삶의 속사화다. 그러나 삶은 덜 시적이고 덜 예술적이다. 그는 말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의 미술관들이며 그 미술관을 운영하는 관장이다.『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그걸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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