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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그들이 알베르트에게 보여주고자 연인이 되는 순간… 그들은 진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들에게 색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이 죄악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죄악에 몸을 담그게 되면, 그 때는 기대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이 뒤섞이게 되리라고.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나는 이해했다. 또한 이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추악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의 젊음, 그 싱싱함은, 비록 죄의 빛깔을 띠게 될지라도, 우리의 시든 손에 이끌려 타락으로 인도될지라도, 그리하여 우리와 뒤섞여 혼탁해질지라도, 그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풍요하고 충만해지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나는 알고 있었다! 온순하게 말 잘 듣는, 그저 귀엽기만 한 젊음 따위가 무슨 재미가 있는가! 중요한 건 그런 젊음을 재료로 또 다른 젊음, 우리 어른들과 비극적으로 얽힌 젊음을 제조해 내는 일이었다." (187)
화자(비톨트)와 프레데릭은 16살의 소년과 소녀를 본 순간, 그들이 지닌 젊음의 자장에 이끌리게 됩니다. 하여, 상상력이 무지하게 풍부하면서도 잔혹한 데가 있는 이 '성숙함'들은, '젊음', 즉 '순진무구한 소년, 소녀'를 함께 엮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 음모를 꾸미기 위해 두 사람은 소년 소녀의 손짓과 눈짓 하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들을 관찰하고, 거기에 의미심장한-그러니까, 관능적이고 색정적이며 도발적인- 요소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요소를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돌려, 그들을 자극하고 조종하여, 인용한 문구 그대로 "어른들과 비극적으로 얽힌 젊음", 즉 매우 색정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젊음을 창조해냅니다.
이 소설의 묘미는 <은밀함>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화자인 비톨트와 그의 괴상한 친구 프레데릭이 주고받는 사악한 교감과 교묘한 음모도 역시 <은밀함>이라는 재미를 돋우는 데 한 몫 하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그러한 교감과 음모가 진행되기까지 화자가 취하는 <시선>의 방식이야말로, 이 <은밀함>이 주는 쾌감에 크게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관음>적이게 되는 시선을 따라 가다보면, 화자와 같이 숨죽여 그 풋풋하고 무심한 젊은이들이 풍겨대는 숨막힐 듯한 관능과 그 관능을 바라보는 중년의 사내들이 풍겨내는 짙은 '살' 내음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짜릿한 쾌감과 저열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인간이 지닌 어떤 어두운 면모를 즐겁게 폭로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이 소설은, 사드의 소설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긍정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성숙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지닌 허위를 비웃어주는 "키득거림"으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흐흐, 물론, 뒤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읽어보고 나면, 그 키득거림에 대하여 비톨트가, "자네는 너무 나갔어,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고!"라고 툴툴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같이 들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특히나 '성숙'에 반(反)하는 미성숙의 매혹 혹은 가치에 대한 곰브로비치의 관심은, <페르디두르케>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는데요, 페르디두르케에서도 아이 취급 당하는 성인 남자가 아이가 되어버려 학교로 돌아가 겪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성년'과 '미성년'의 조합, 어울림, 아니 더 나아가 일종의 교합이라고까지 해야 할 것들이, 페르디두르케와 포르노그라피아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듯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관능'도 있고, '반(反)도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성년과 미성년의 조합에서 나타나는 '인물과 인물의, 특징과 특징의 결합 방식'도, 이 작품에서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다음은 주요 인물 프레데릭의 생각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연극의 특성이란 '사람들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을 그들 각자가 가진 가능성들을 활용해서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또 연기자는 '가상의 인물이 되어볼',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인 척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품 속의 인물이 연기자에게 맞춰 구상되어, 마치 맞춤 양복처럼 연기자에게 '딱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 놀랐던 것은, '로베르 브레송'이 자신의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추구했던 '모델'에 대한 생각과, 프레데릭의 연극에 대한 생각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브레송은 배우를 '모델'이라고 칭하면서, 반(反)연기를 지향했는데요, 그 반연기라는 것은, 모델 자신이 갖고 있는 '꾸며지지 않은, 내부에 숨겨져 있는 그 자신의 본질'을 이끌어내는 데에 중점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캐릭터, 프레데릭이 소년과 소녀를 통해 이끌어내려고 하는 어떤 '젊음의 관능'과 비슷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물론, 이 작품에서 약간 의심스러운 것은, 젊은이들이 지니고 있는 관능이, 어디까지가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인지 또 어디까지가 성인 남자들에 의해 촉발되고 자극되어 부풀어 오른 것인지, 젊은이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촉발한 성년들도 조금은 헷갈려 한다는 점입니다. '조합'이, '교합'으로 느껴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