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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수록된 단편은, <나는 여기가 좋다>, <밤눈>, <올 라인 네코>, <바람이 전하는 말>, <가장 가벼운 생>, <섬에서 자전거 타기>,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수년 전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것을 읽어본 적이 있고, 그 까닭으로 이 작품집을 집어 들게 됐다. '바다의 작가'라고 익히 알고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찰진 이야기꾼인가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별 주저 없이, (왜 진작 안 읽었을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집어 들었다.
<나는 여기가 좋다>는 바다에 머물고 싶은 남편과 뭍에 뿌리내리고 싶은 아내의 사연을 들려준다. 어린 선장으로부터 해서 늙도록이나 선장으로 살아온 남편이 배를 팔게 되면서, 바다 사내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고통스러운 삶이 자꾸만 쉬어져 나오는 한숨처럼 불거진다. <밤눈>에서는 끝은 났지만 성공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술집 여인의, 밤눈에도 얽히고 사랑에도 얽힌 사연이, 밤눈 내리는 소리처럼 조용하게 들려온다. 간간이 화자가 마시는 술잔에, 독자가 취하는 기분이 든다. <올 라인 네코>는 퍽 귀여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썩 구미에 당기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쩝쩝. (쓴 입맛 다시는 소리) <바람이 전하는 말>로부터는 이 작품집에 빨려 들기 시작했는데, 죄책감과 서운함이 만수산 드렁칡 같은 두 노인네가 앉아, 눈물 쏟아질 법한 얘기들을, 세월에 풍화된 탓에, 너무도 담담하게 나누는 풍경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다와 육지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간극을 흐르고 있는 진한 세월. 짧은 작품인데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늙은네들의 한 평생이, 짧지 않게 읽혔다. <가장 가벼운 생>은 그 탄력으로 인해 퍽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화자에게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아버지들 혹은 아들들에 관한 것이었다. 잠깐 만나 지냈던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기에 땅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부터 돈 들어오는 대로 부쳐주었더니 장성한 아들이 그를 찾아와 어색하게 '고마웠다, 그렇지만 이제 돈은 그만 보내라, 그 말 하려고 왔다'고 전하고 간다. 그가 가고 나서부터 노인은 병 아닌 병이 났는데, 그 병 끝에 들려준 이야기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죽음이었고, 아마 자기도 무언가 -딱 한 번 만났을 때의 그 모습으로- 아들에게 유산을 남겼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섬에서 자전거 타기>는 아내도 떠나고 배도 잃은 노인네가 섬에 죽으러 온 여인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노인네의 설정은, <나는 여기가 좋다>의, 그 노인네와 퍽 흡사해, 한 노인네라고 생각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고도 이 노인네는, 이 작품집 속에서 한 번 더, 얼굴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1- 노인네는 반갑고 여인네는 좀 거석거석거렸는데, 마무리도 역시 그러했다.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는 패스.
이 작품집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에 실려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 소설 때문에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됐고, 이미 전에도 여러 번 읽었더랬는데, 이번에도 역시, 여러 번이나, 배꼽을 잡고 읽었다. 찰지기가 이렇게 찰질 수가 없고 귀엽기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어디 가서 어른 대접 받는 아들과 처음부터 늙은 것은 아니었던 아비 사이에 벌어지는 기싸움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흐르는 짜안한 애정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무척 재밌게 읽었으면서도 무언가 좀 아쉬운데, 뭐가 아쉬운지 잘 모르겠다.
후첨된 평론가의 글을 읽어보니, 그 역시도 어떤 종류의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기는 한 모양인데, 그가 제시하는 방향에는 별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내게 이 작가의 이 소설집은, 무언가 아쉬운데, 뭐가 아쉬운지 아직 모르겠는, 그렇지만 재밌기는 오지게도 찰지게 재밌는, 그런 이상스러운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소설집 전에 나왔거나 나중에 나왔던 다른 작품을 읽어볼 때까지는.
1 소심하게 이렇게 말해두었지만, 뒤에 첨부된 평론가의 글을 읽어보니, 평론가는 아예 이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발자크를 떠올리게 되기는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