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읽기 혁명 - 왜 지금 언론개혁인가?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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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수천년이 지난후 우리 후손들이 현재 우리의 생활모습을 추리하기 위해 유물발굴과 유적답사를 하기로했다. 그들의 발굴 및 답사 목적은 우리사회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유추하는 것이었다. 발굴을 하던중 우연찮게 잘 썩지 않는 라면봉지가 하나 나왔고, 후손들은 우리의 주식이 라면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가?

사건의 상황은 분명히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사건 역시 시간과 공간의 다름으로 규정지어지는, 확실히 이 세상에 유일한 것이다. 사건의 기술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관점’이다. 다분히 철학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성격의 문제이긴 하지만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론형성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언론이 과연 어떤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 노출 시켜줄 것이다.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이제 진부한 주장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거대언론-비판단체가 그저 그런 구도로 아무런 발전도 없이 고착화 되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판단체나 목소리가 없다면 조신일보의 횡포가 더 악랄해질 것인지, 과연 그들의 호소가 얼마나 조선일보의 정체성 약 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일보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독자가 분별력이 있어서 기사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조선일보’의 편집방향에 대해 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신문도 나름대로의 편집권을 가지고 있고 기사의 방향성, 신문사의 ‘색깔’ 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성향이 나와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약하기 때문이다. ‘한겨레 신문’도 일괄적 사실을 전달 하지 않을 수 있고, ‘경향신문’도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어디에서나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사실과 그 전달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신문이 그렇다면 여론형성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주체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독자 스스로가 이슈화할 문제가 아니라면, 철저히 외면하고 그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사안이라면, 이슈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현명한가?

플라톤이 대중정치를 혐오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여론에 혹해 주체적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평범했던(대중적) 배심원 때문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독자도 대중이며 그들이 모두 비판 의식을 갖기는 어렵다. 그럼 전달자와 수용자 모두가 한쪽은 ‘자신의 관점’으로만, 다른 한 쪽은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대하는 양자오류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내가 좀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쪽은 언론이다. 조선일보가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데, 그런 언론이 아무리 기본적 원칙을 어기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영향력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향력을 줄이려면 어떡해야 할까? 언론시장에서 만큼은 시장요소를 제거 했으면 한다. 양질의 보도가 편집의 비뚤어진 방향성을 상쇄시키지는 못한다. 조선일보가 영향력을 가질수 있었던 데에는 거대자본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는데, 사실상 그것이 신문의 질을 결정할 수는 없었고, 이러한 잘못된 배경 속에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조선일보는 큰 영향력이 곧 높은 질을 의미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독자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자신의 성향에 맞게끔 신문을 선택하려면, 철저히 성격을 바탕으로한 구독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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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ld Best Columns
양형철.정득권 지음 / 넥서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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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논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신문의 칼럼을 참고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신문 칼럼이 띄고 있는 논리적 구조와 소재로 사용된 시사적 화제 거리가 신문 칼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소스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를 완전히 포섭하고 있는 학습교재는 시중에 나와 있는 논술대비용 참고도서 중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신문 칼럼이 이렇게 논술 대비를 위한 강력한 소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유효 적절하게 이용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신문 칼럼을 어떤 방식으로 분석해서 어떤 형태로 체득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학습법 자체가 개인마다 달랐고, 다분히 개인의 능력에 따라 습득 정도도 큰 편차가 생겼기에 신문 칼럼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소스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어’를 영어로 바꾸어 영자지의 신문 칼럼을 분석한 책이 나왔다고 해서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선 고급 독해를 위한 소스로 영자 신문 칼럼을 이용한다는 발상자체가 매우 적절한 선택이라 생각 했으며, 소스분석과 더불어(어휘, 문장 구조)글 자체의 논리적 전개구조도 함께 분석해 놓아 독자로 하여금 고급 영어의 Idea를 함께 포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영자지 칼럼 분석이라고 하는 영어 고급 독해 교재로서는 드문 소스를 선택한 이 책의 특징이 신선한 시도로서 , 이 하나의 사실로 큰 장점으로 여겨질 만했으나, 아무래도 희귀한 소스를 이용한 교재인지라, 개선점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일단 주 독자층을 고급영어 독해를 준비하는 층이라고 설정했다면 큰 무리가 없었을 듯하다. 그러한 독자층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논리구조의 비중을 높게 다루어서 자칫 영어식 사고구조를 ‘작가의 방식’ 으로 체화 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닌지 의심케 만들었다. 즉, 칼럼의 논리구조에 대한 개인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분석 기회를 희미하게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학습법에 따라 이점은 충분히 이용 가능한 항으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 가지 사소한 부분을 지적한다면, 어휘학습에 있어서 사전을 찾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꽤 상세하게 어휘에 대한 설명이 돼있는데, 발음기호를 넣지 않아 그 어휘의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었다는 아쉬움을 지적대상으로 삼고 싶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더라면 더욱 완성도 높은 책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또 한가지 특별히 놀라운 부분은 CD를 통해 청해 실력을 동시에 향상시키려는 시도를 꾀했다는 데 있다. 사실 CD는 거의 무용지물이라 생각했던 학습도구인데, 독자의 학습방법에 따라 유용한 교재로 이용 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체적으로 신선한 발상을 바탕으로 잘 구성된 책 한권을 접하게 되서 고급 영어 독해 실력을 향상 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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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OEFL Writing
이유진 지음 / 넥서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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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The World Best Columns>라는 책을 읽었다. 앞의 책은 어떻게 글을 이해하느냐를 분석해 놓은 책이었고, 위의 책은 어떻게 글을 쓰느냐를 분석해 놓은 책이었다. 두 책이 중심생각을 축으로 대척점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책은 ‘어떻게’ 글을 쓸 것이냐에 대해 퍽 깊은 통찰력을 토대로 토플에세이-특히 ETS사사 원하는 형태의-를 써내려가는 방법에 대해 기술해 놓았다. 영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대부분 청해나 독해위주의 학습에서 머무르곤 한다.

물론 독해와 청해가 영어공부의 주된 부분이기는 하나 영어로 표현하는 학습이 아직 많은 시험체제에서는 측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평가항목에서 배제되는 바람에,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를 하는 우리나라의 영어 학습 구조상 회화와 작문에 소흘히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시험을 위한 영어 학습 자체에 큰 문제가 있지만, 단기적으로 토플에서 작문을 영어실력의 측정영역에 포함 시킴으로써, 좀더 완전한 영어 학습법을 이끌어 냈던 것 같다.

작문하면 어려워 하는 이유가 내가 쓰는 구절이 문법에 맞는지, 내가 쓰는 표현이 영어식 표현에 적절한지, 하는 여러 의구심 때문에 쉬 생각을 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제에 대한 생각의 전개를 하기전에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에 대한 -일종의 방향 설정에 관한- 질문의 답이 명료하지 않기에 생각이 바탕이 되는 글을 써내려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는 작문에 대한 몇 가지 팁을 제시 해놓았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주제에 대한 예시문을 바탕으로 각 주제에 대한 사고전개방향에 대해 서술해 놓았다. 특히 두 번째 챕터가 주가 되었는데, 필자는 앞의 두 가지 사항을 모두 직시하고 대주제 세 개를 바탕으로 각 대주제에 대한 소주제 20여개를 어떤 방향설정을 토대로 글을 전개 할 것인가와, 영어식 표현, 그리고 문법을 곁들여 놓은 형식이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바로 전자에 대한 해답을 비중있게 다루었는데, 각 주제에 대한 필자 나름의 사고관을 토대로 ETS가 원하는 형태의 글을 쓰는 법을 심도 있게 다룬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필자의 사고관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사고관 자체가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접근법을 내포하고 있기에, 단순히 토플 작문 공부뿐만 아니라 작문실력 자체를 향상 시킬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또 한가지 장점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전문을 녹음 테잎으로 수록해 놓아 언제든지 학습했던 내용을 음성정보로 지각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청해 실력 향상도 도모 했다는 점이다. 자칫 작문에만 치중하면서 불균형적인 영어 학습을 주도 할 뻔 했던 과오를 이 책은 상당히 성실한 준비로 메꾸어 냈던 것이다. 또한 필자 스스로가 온라인 상으로 직접 토플 작문 관련 첨삭지도를 병행 함으로써 독자들에 대한 철저한 애프터 서비스를 제공 하면서 책 자체에 대한 질적 가치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을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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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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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세화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약칭) 선생님이 저술하신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잘 읽어보았어요. 선생님께 이런 편지를 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책을 읽고 느낀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께서 냉소적 고찰을 통해 바라본 한국 사회를 프랑스식 사고로 다져진 자유분방한(자기 의견의 절대화 오류를 극복한다는 의미)시각으로 날카롭게 분석해나갈 때, 우리 사회를 사는 사람으로서 철저하게 벗겨진 내모습에 대한 부끄러움과, 묘한 쾌감을 느꼈어요.

쾌감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태껏 닫힌 사고로 살고 있던 우리가 열려있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우리사회가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졌다는 인식은 하지만, 감정적으로 느끼고 있을뿐, 냉정하게 무엇이 어째서 잘못됬는지, 이성적 사고로 비판할 수 있는 논리의 부재가 이번 책을 읽음으로서 더 황홀한 느낌을 조성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계층 구조가 무너뜨릴수 없는 공고한 성벽이라면 적어도 동질된 계층내에서는 '연대'를 가져야하지 않겠냐는 선생님의 노동자에 대한 안타까운 호소가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 보게 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네 문화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비합리적 상호교환이라고 생각 했어요. 다시말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동질감(이른바 ‘정’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다분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항상 지향 해야할 가치로 판단되는-을 깨트림으로써, 서양식 사고구조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동양의 의식을(특히 한국)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은 연대는커녕 개인주의의 변형된 형태로 부작용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가 되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한국사회의 과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있지 않나 싶어요.

언론부분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는데, 이제는 식상함마저 풍기는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은 왜곡,편파,허위,수구,냉전 보도의 대명사 혹은 고유명사로서 ‘조선일보’의 위상을 더욱 고착화 시키신 것 같아요. 선생님도 지적하셨지만, 아직까지 시민계급으로 일컬어지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가 알게 모르게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좀더 정제해서 낼 수가 없어요. 그들은 지식이 부족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없거나, 아니면 그들의 의식이 이런 삶을 운명 혹은 팔자로 치부해버리는 체념적 인식이 되는 갖가지 이유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낼 수 있는 ‘계급의 연대성’을 자연스럽게 흩뜨려 놓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선생님이 역설하신 부분이 지식인의 역할인데 그들에게 아니, 이젠 우리에게 상당한 책임을 요구하다는 것이 제 어깨를 무겁게 했어요. 그나마 이런 책을 읽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는 나와 같은 소속의 사람들-흔히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대학생 계급-이 맡은 책무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거든요.

책 곳곳에 드러나있는 선생님 자신에 대한 성찰적 반성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넌지시 알려주신 것 같아요.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에 그런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그런 불완전성을 더욱 확고히하는 것이니 선행되어야 할 일은 비판의 수용 및 자기 성찰이 아닌가 싶어요. 비록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라서 그들의 시선과 사고로 보면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지만, 과거에 억눌려왔던 자유와 민주성이 조금씩 발현되고 그 힘을 키워나간다는 것, 그래도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은 옳다는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성장하는 지식인의 계몽적 행보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희망의 씨앗을 던져 주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들이 하나하나 이뤄질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면, 더 이상 악역을 맡아서 슬프신 일은 없을거라 확신합니다. 이제, 그 악역을 저와 함께 분담하는 건 어떠실런지요?

2003년 6월 어느 여름날, 악역의 슬픔을 분담하고자 하는 어린 대학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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