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수의 시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평점 :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처가 엘런의 심장부까지 걸어 들어가 끝내는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빈 벤치에
앉아서 차양이 드리워진 발코니로 오층까지 시선으로 오르며 댈러스가 한걸음, 한동작 엘런을 향해 다가가는 시간을 그려본다.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 이 비극 속에 들어 온 엘런과 아처의 그림자로 맞닿은 비현실적 재회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아처가 홀로 되돌아가는 굽은 등을 한참 동안이나 상상해 보았다.
여성 최초 퓰리처상 수상을 거머쥔 작가 이디스 워튼의 3부작 중 이선 프롬을 봤고 순수의 시대를 봤다.
이디스 역시 실제로 상류층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겪고 보았던 옛 뉴욕 상류층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며 숨 막히는 그 시대의 영리한 허세와 허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엘런과 아처의 위험스러운 대화가 몇번 오고가는 동안 숨이 멎는줄 알았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그 둘이 만나는 횟수나 번듯한 말애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 애틋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 내면의 중심을 꿰뚫어보려고 했다.
순수의 시대라...... 기막힌 아이러니의 덫이 아니던가.
나도 이미 거기에 걸려버려 시작한 첫 페이지인데 누가 순수를 만날 때 안대를 벗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작가의 시대에 대해 냉정하면서도 결코 중립적인 함의를 잃지 않는 문장 하나하나가 비극을 예고하고 돌아보니 회한이라는 비통함을 새기게 한다. 단순한 연정과 결혼, 불륜이 얽힌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뉴런드 아처는 변호사로 외국 문물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열린 마음의 새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번듯한 가문에서 부유하게 살아왔고, 순조롭게 남들 다하는 연애 끝에 뉴욕 사교계의 오랜 전통과 질서를 중시하는 바른 몸가짐과 예법이 몸에 밴 아름다운 여인 메이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엘런이 이혼을 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돌아왔다. 자유롭고 이국적인 예술과 문학의 아방가르드 기품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유럽인으로 말이다.
1870년대의 사치와 격식에 갇힌 시대를 묘사하고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지금도 이름만 바뀐 자본과 자유 이념과 민주 사상에 갇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첫 번째다. 그 사실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당대의 작가가 지금의 독자인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기록하는 일은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다.
다시 작품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아처의 아들이 엘런을 만난다.
여자들도 우리처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요……
-95쪽.
초반 그의 젊은 패기로 새 시대의 변화와 개방을 매력적으로 끌어내던 아처는 끝내 자신의 시대엔 순수의 장벽에 부딪혀 포부를 열지 못했고, 아들 댈러스가 찬란한 오후의 빛을 받으며 엘런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처가 메이에게 은방울 꽃다발을 하루도 빠짐없이 보내며 결혼을 구애하는 모습에 둘의 로맨스가 아기자기했다. 하지만, 이 인생의 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꽃다발 뭉치에 불과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순간 순수하지 않은 순수함이 깃든 메이의 엘런에 대한 질투와 불안의 서를 알아채게 되었다.
엘런은 불행했던 자신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하고 싶어했지만 뉴욕에서는 이혼이 금기시 되었기에 가문에서 이를 막고자 그녀를 설득하려 한다. 이를 돕게 되는 게 아처였다. 하지만 아처는 오히려 엘런의 전후 사정을 알고 그녀를 돕고자 애쓰고,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과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선을 넘게 된다. 둘이 함께.
처음엔 아처와 메이를 응원하면서 엘런의 톡톡 튀는 도발에 흔들리는 남자들이 좋아보이지 않더니만 엘런의 내면을 알면 알수록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운명적인 듯 싶었다. 밍곳 가문에선 어떻게 해서든 엘런을 남편에게 돌려보내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엔 메이가 있었다. 메이는 이미 이 둘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위해 엘런에게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아처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고백하려 메이와 대화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면서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만다.
아처의 엘런에 대한 사랑은 딱 거기까지만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그 이상을 포용하며 그를 사랑했으므로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아처를 원망하지도 메이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랜 시간이 순수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를 또 다른 이름의 순수함으로 뒤덮었다.
로맨스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뉴욕과 유럽의 사교계와 부유층의 사고방식, 도금시대 부의 창출과 법도, 관례와 허례허식, 개혁 개방 운동 등이 함께 보인다.
지금도 가슴 뛰게 만드는 아처의 뒷모습이 시대를 넘지 못하는 순수의 상징으로 남아버려 더 안타깝다는...<순수의 시대>였다.

#순수의시대 #이디스워턴 #문학동네 #리딩투데이 #리투서평단 #독서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