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해서 작가의 시선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그녀의 시선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프로토페미니즘'이라는 말로 분류되는 소설이다. 요샌 상황이 그렇다보니 집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한가지 습관이 생겼다. 옛 명작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는 것. 그러다보니 <먹을수 있는 여자>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시청률의 정점을 찍었던 띵작들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새삼 놀랐다.
그 시절엔 그런 역할들과 대우와 환경과 제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모르고 지나왔다. 무엇이라 개념하고 불러야 하는지도 모른채 막연한 생각줄기들만 모아서 나만 이런가....를 숱하게 스스로 물었던 것 같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소그룹 모임에서, 이웃에서, 직장에서, 연애에서, 결혼에서, 낯선 새 가족의 가풍에서... 그리고 남녀 관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던 갈등들을 가만히 돌아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나를 규정하고, 그 안에서 나도 나를 부당하게 규정하고 살아왔던 게 아니었나 싶다.
소설 속에서도 똑같다.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할지 몰라 병들어가는 여성들의 자각이 깨어나던 때에 원초적이기만했지 그 의미를 명명할 수 없었던 목소리에 프로토페미니즘이라는 걸맞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렇게 깨이고 알아가다 보니 이 사회가, 또한 제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불평등적인 것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자각이 음식에서 부터 시작하는 소설 전개의 소재가 어쩜 이렇게 절절할까. 음식과 여자를 떼어놓을 수 없듯이 음식에 깃든 깊은 전통과 순종, 격식, 오랜 차별의 역사를 여자의 손길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증폭된 거식증의 결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나의 현재를 깨닫게 해 준다.
메리언이 약혼자 피터를 위해 '먹을 수 있는 여자' 케이크를 만들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직접 그 여자를 먹어치우며
우리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으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보여주었다.
<먹을 수 있는 여자>의 메리언은 지금도 진행중인 수많은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며 프로토페미니즘에서 페미니즘으로 들어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나한테 묻지 말아요.
그건 당신이 만든 당신만의 막다른 골목이니까
나갈 방법도 당신이 생갹해야 할 거예요."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 프로토에서 페미니즘으로 건너는 경계를 지났으니 계속 생각하고 먹고 먹히는 일을 반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협화음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 갈 것이며, 그 소리들을 소음으로 여길지, 화음으로 여길지 분류해가며 시스템의 균형을 맞춰나갈 것이다.
먹고 먹히는 일이 매일 매일 일어나듯이 말이다. 해야할 일이 매일매일 생긴다는 뜻일 것이다.
메리언같은 우리 여자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