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소설 / 작가정신 소설, 향 시리즈 세 번째 경장편 소설

                       

                         

 

 

 

                           

 

                    

 

시.

그 순간,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그 창백한

연두색 싹이 불쑥 커 올라 이파리를

뻗치는 기분이 들었다.

64.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걸...

티끌보다 더 작은 것이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으로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

나의 희망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매일밤 필사를 하는 중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래되고 낡아빠진 목련빌라를 견디는 길이었을테고,

그 앞 정류장에서 집안까지 길고양이를 들이고 그것에게 정을 주는 어머니의 결핍을 견디는 힘이었을 테고,

집안의 자랑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목련빌라로 되돌아온 가정폭력 피해자 여동생의 비련한 삶에 대한 부채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

필사의 밤들은 그녀를 시적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그녀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과 연결된 가족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해석해 주석을 달게 만든다. 자의반 타의반 어떤 것들은 합당한 이유로 납득이 가고, 어떤 것들은 또 그녀의 지극히 감정적인 생각일뿐이므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동생의 두 아이 육아를 홀로 도맡아 3년을 내리 똑같은 일상에 치여 살면서 필사의 밤도 손 놓은지 오래다.

 

시를 쓰지도 못하면서

시 쓰기를 꿈꿨다는 건

시의 그림자에 숨어

내 언어가 사라지는 줄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166.

살아야 하는데, 살고자 하는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당연한 듯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타인보다 더한 고통을 서로에게 덧씌운다.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긴 시간들. 오래된 익숙한 습관들은 그녀가 집안 일과 조카 돌봄 육아를 책임지고 있음에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 가사 노동의 가치는 인정되지 않았고, 집안일의 주도권은 여전히 엄마이며, 의미없는 무보수 근로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그녀. 사랑하는 연인을 억지로 등떠밀어 떠나보내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를 겪었으나 그녀가 다시 맞는 필사의 밤들은 언제고 현실이고 되돌아온 일상이었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쓸 것들은 오히려 많아졌다.

그러나 쓸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정리할 공간이 없었고,

나에게 집중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조용히, 고즈넉하게, 쓸쓸히, 오롯이, 동덜어져서,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누릴 수 없었다.

56.

 

 

하지만, 그녀가 중력을 거슬러 틔운 싹, 희망은 가만히 혼자 자란게 아니었나보다.

목련빌라가 낡아지는 시간만큼이나 더디게 보통의 삶을 우회하며 자랐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많고, 세상은 무섭고, 누군가 아픈지 응급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밤들이며, 더이상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 자연마저 황폐해지고 마는 날들과 순간들을 아둔하게 견디며, 묵묵히 활력 잃은 단어들을 필사하는 긴긴 밤의 시간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집을 나서 내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170.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만의 시를 과연 쓸 수나 있을지에 더딘 시간들을 보내며 망설였다면, 지금은 최선을 다해 몰입하며 자신만의 필사노트를 다시 꾸린다. 그녀는 이제 쓰고 싶은 시들도 생겼다.

정류장에서 내리기 전 벨을 누른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생의 일부분을 따라가며 마지막을 읽어내자 흐릿한 기억의 실루엣이 들춰진다. 나는 왜 책을 읽고,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나를 옭아매는 것인지.

1등만 기억한다던 이 *** 세상에서 나도 보통의 삶을 우회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있던 것인지.

언젠가 내 의식들을, 내 단어들을 필사에서 벗어나 쓰고 싶은 때가 오기는 할런지.

쌀쌀한 바람이 목련나무 가지들을 마구마구 흔드는 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기록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