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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운전사 교단에 서다 - 고아원 신문배달 트럭운전으로 교사의 꿈을 이룬 인생역전 스토리
김창완 지음, 박흥서 그림 / 바른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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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트럭운전사를 하던 청년이 있다.


대학교를 졸업해 안산의 강서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제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또한 장학회를 설립해, 후배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


무료기숙사를 운영해, 지방에서 올라온 후배들이 편하게 머물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런 그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온 것일까? 


혼자 살기도 바쁜 이 세상.


어떤 마음으로 학생들과 제자들을 도운걸까?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한다.


세상에 대한 온기를 느끼고 싶다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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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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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쇼미더머니 6가 시작됐다엠넷에서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위해 여러 밑밥을 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작년에 방영했던 쇼미더머니 5의 여러 방송 클립들을 반복적으로 방영했다그 중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보이비의 '호랑나비'라는 노래의 공연 영상도 있었다공연에는 여성 댄서들이 출연했는데알고보니 '우주소녀'라는 걸그룹이었다. '우주소녀'는 나름대로 알려진 상태이지만그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만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약에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우주소녀'는 저 방송을 통해 불멸의 영역에 들어선게 아닐까. '우주소녀'라는 이름을 가진 걸그룹이 소멸되어도쇼미더머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종 영상을 찾아볼 것이고누군가의 기억에 남게 됨에 따라 '불멸의 영역'에 들어선게 아닐까.

 

 

 

불멸이라는 단어는 2가지 의미를 가진다첫 번재는 '생물학적'불멸이다말 그대로 오래사는 것정확히는 멸하지 않는 것죽지 않는 것이다중국의 진시황제는 생물학적 불멸을 꿈꾼 대표적인 인물이다요즘 시대가 되서는 오래 건강하게 사는 걸 목표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만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어린아이가 자신의 조부모에게 '오래 살고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하면그 말에도 인간은 '필히 멸한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인간은 필히 멸할 운명이기에그 운명을 연장하는 것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소망인 것이다이 처럼 인간이 무조건 죽는다는 사실은 외면할 순 있어도피할 순 없다그래서 인간은 생물학적 '불멸'보다는 두 번째 의미의 '불멸'에 집착한다좁게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넓게는 역사에 나믄 것을 '불멸'이라고 칭한다진시황은 생물학적 '불멸'을 이루진 못했지만불멸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이 진정한 '불멸'에 이러서게 되었다물론 그는 생물학적 불멸을 더 원했을지 모르겠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불멸'의 영엑 드러서기 위한 몸짓을 표출하는 존재를 다룬 소설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등의 고전을 남긴 독일 작가, '쾨테'라는 남자가 존재한다이미 62살이 된 그는 불멸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그의 명성은 전세계에 퍼져있다이제 그에게 불멸에 들어서기 위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그것은 그의 '죽음'이다불멸의 조건은 모순적으로 죽음이다우리가 천재라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천재이기에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인지젊은 나이에 죽었기에 천재라고 불리는 것인지살아 있는 사람에겐 쉽사리 '천재'라는 칭호를 부르기엔 망설여진다불멸의 문 앞에 드러선 괴테 앞에 26살의 아름다운 여성베티나가 나타난다베티나는 끊임없이 괴테에게 사랑을 속삭인다괴테에겐 이미 세월을 함께한 아내 크리스테나가 있었지만베티나는 누가나 반할만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하지만 '괴테'는 곧 불멸의 존재가 될 운명이었고괴테는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불멸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이미지는 고착화된다역사 속의 인물을 생각해본다. '이순신, '히틀러이런 류의 인둘은 불멸이 되는 순간개성은 사라지고역사 속의 단편적 모습만 우리의 머리 속에 남는다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에 의해 이미지를 선택받는다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면모와 다른 부분이 존재하지만어떤 모습의 극히 '일부분'만이 불멸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다괴테는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쉽사리 행동할 수 없었다어떤 모습이 불멸의 영역에 남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게다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젊은 여자와의 치정혹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불멸로 남기에 유리한 이야기이다그러한 이유로 괴테는 스스로를 절제했다불멸에 남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베티나는 육체적인 몸짓으로말로서편지로서끊임없이 사랑을 말한다하지만 베티나의 몸짓은 괴테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니다베티나는 영특한 여자였다그녀 또한 불멸의 영역에 관심이 있었다괴테가 '불멸'의 영역 가까운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괴테를 사랑한 것이다괴테의 죽음이 멀었거나그가 유명하지 않았다면그가 불멸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없었다면괴테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괴테는 결국 나이가 들어 죽었다괴테는 살아생전에는 베티나로부터 벗어났다하지만 죽음 이후엔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베티나는 괴테가 죽은 후에괴테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책으로 출판했다그 편지들에는 괴테를 향한 베티나의 사랑이 담겨있다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베티나는 말을 했다게다가 편지들의 내용을 조금 씩 바꿨다괴테와 함께베티나도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괴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베티나는 괴테의 영원한 연인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불멸을 향한 몸짓은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게 계승된다베티나 이후수 백년이 흐른 현대에 와서는 '로라'라는 여자가 존재한다로라는 스스로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슬픈 일이 있으면 일부러 눈에 띄는 거대한 까만 선글라스를 낀다그녀의 말행동은 실질적인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지 않는다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고 싶은 그녀의 모습을 말한다그런 맥락에서 '베티나'와 '로라'는 비슷하다. '로라'는 남자 친구 베르메르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로라에게 중요한 것은 이별이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특히 형부 ''에게 이별당한 자신의 모습을 비참하게 보이는 것이었다눈 앞에 권총이 보인다느니이별을 견디지 못하고차라리 죽겠다니와 같은 말로 ''을 흔든다끝내 폴은 아내인 아녜스와 헤어지고, '로라'와 사귀게 된다이를 이룬건 로라의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는 욕구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에 담으려는 모습은 그런 모습인 것 같다한 소설가한 작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여러 저작을 읽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법이다글은 사유의 표상이다그리고 글의 사유는 반복된다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와 노년기에 드러선 마르크스의 글의 사상은 분명 차이가 있다하지만 이는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역사적 흐름에 따른 변화이다마르크스라는 인물을 연구하는 과정그의 사유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으로 보자면마르크스의 그들의 사유공산당 선언자본론경제학 논고독일 이데올로기등의 저작들의 사유는 동일하다한 인간의 사유는 깊고 얕음이 있을 뿐이지기본적으로 하나의 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밀란쿤데라도 마찬가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마찬가지로 '불멸'에서도 하나의 강력한 기준이 소설에서는 '불멸'이 되겠다에 대해 말한다하나의 강력한 기준 앞에서 인간의 다양한 군상이 의미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불멸에 도달하면그 존재는 행복의 불멸에 도달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쿤데라는 저승에서 괴테와 헤밍웨이가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답을 한다불멸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괴테는 불멸을 신경쓴 탓에 마음대로 살지 못한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불멸을 향한 무의식적 움직임일지 모른다돈을 많이 벌기 위한 모습유명세를 얻어 행복하려는 모습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모습이런 모습의 근원은 불멸인 듯 보인다하지만 불멸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우리가 불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글머 우리는 무엇을 근원으로 살아가며무엇을 향해 나아가야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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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위대한 생각 시리즈 2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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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라는 제목의 기사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에밀 졸라'라는 이름은 불멸의 영역에 드러선다.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기 전 까진 에밀 졸라는 유명한 소설가였다면,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에밀 졸라는 진실을 향해 투쟁하는 지식인의 영역에 발을 딛게 된다.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군의 대위 드레퓌스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을 비롯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군인들, 지식인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것과 알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프랑스 정부는 군의 문제를 덮어 버린다. 당시 언론의 기능을 하던 신문들 사이에서도 '드레퓌스 사건'은 논쟁거리였다. 드레퓌스를 옹호하거나,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거나. 논쟁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였던 에밀 졸라는 그런 과정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접한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로부터 진실을 듣게된다. 에밀 졸라는 진실을 밝히기도 결심한다. 하지만 정부의 억압 아래에 사건은 마무리 되기 시작한다. 드레퓌스의 유죄가 인정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해 에밀 졸라는 당시에 근무하고 있던 신문사에 글을 기고한다. 우리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알고 있는 짤막한 글이다. 이 글을 쓴 목적은 2가지였다. 첫 번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두 번째는 이 글을 통해 정부로부터 소송을 유발해 화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건을 다시 이슈화시키려는 정치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나는 고발한다'는 하루 아침에 프랑스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기사를 기재한 신문은 매진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다시 화제가 되었다. 끝내 드레퓌스는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되었다. 이 사건이 그저 한 군인이 복직되는 내용이라면, 불멸의 영역에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을 밝이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과정덕에 불멸의 영역에 드러설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내가 가진 착각이 있다. 완벽한 진실을 드러내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마찬가지로 사회적 문제도 완벽한 제도를 제시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거라는 그런 착각. 그래서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문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완벽한 해결법, 제도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중들은 그저 받아들일 준비만 하면 됐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완벽한 진실을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진실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즉 선전 방식이다. 에밀 졸라의 글이 완벽한 진실을 담고 있어서 불멸의 영역에 도달했는가? 아니다. 글의 내용에 온전히 진실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밀 졸라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기에 글의 내용에 사실 관계에서 어긋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또한 에밀 졸라 이전에 신문에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기고한 인물은 없는가? 아니다. 에밀 졸라의 글은 그 전에 발표되었던 기사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어째서 에밀 졸라의 글만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에밀졸라'라는 이름이 불멸의 존재로 남았는가? 여러 요인이 잇겠지만 글의 형식, 선전 방식 덕분이라고 본다. 대중들은 수준 높고 논리적인 글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움직인다. 길고 논리적인 논문보단 짧은 광고가 효과적이다. 선전방식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진실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보다 진실을 어떻게 전달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최근 예능, 시사, 다방면의 분야에서 출연이 잦은 유시민 작가, 그의 사유는 과거나 현재나 변한게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의 유시민은 주로 실패자였다. 언론, 대중들에게도비난 받기 일 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거의 신격 존재로 추앙받기 시작한다. 방송에서는 그를 포장해 그를 신적 존재로 올리는데 성공했다. 마치 진리를 획득한 자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시민은 변한게 없다. 변한 것은 그를 어떻게 포장하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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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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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무지한가? 아니면 시대를 바꿀 힘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때론 군중의 놀라운 힘을 보기도 하고, 때론 아둔함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군중들은 놀라운 결집력을 보여 상황을 변혁하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행동을 선보이기도 한다.


르봉은 프랑스 혁명에서 군중들이 보여준 모습을 주목하여, 군중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훌륭한 사회학자이면서도, 한편으론 훌륭한 과학자였다. 과학의 방법론을 사회에 적용시킨다. 사회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귀납적 관찰을 통해, 연역적 원리를 추론하고, 추론한 원리르 바탕으로 결과를 예상한다. 르봉은 군중들을 고나찰대상으로 삼고, 분석했다. 그리고 군중에 대한 일반적 원리를 도출했다. 군중의 원리에 대해 다룬 책이 '군중심리'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과학의 아버지로, '실증주의'를 제안한 '콩트'를 꼽는다. 하지만 르봉 역시 콩트와 비슷한 학자의 학자이며, 콩트와 교류한 적이 있다. '군중심리'또한 사회과학의 시초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군중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무리인가? 같은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의미하는가? 모두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군중은 '무의식'을 기반으로 일시적으로 형되는 익명의 집단을 의미한다. 군중의 형성 조건에는 공간의 공유, 유사한 신분은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 노동자 구별할 것 없이 누구나 군중이 된다. 군중이 형성되면, 군중들의 이성은 약화되며, 비합리적 요소가 강화된다. 쉽게 말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비합리적인 판단은 지식의 부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지식인이 군중이 될 경우에도 비합리적인 판단은 지식의 부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지식인이 군중이 될 경우에도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군중이 되는 사건이 지식인들의 전문 분야가 아닌, 비전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비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지식인들과 군중의 구별은 사라진다.


군중은 급진적인 행동을 한다. 그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는 군중은 다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수이기에 옳다는 믿음은 강해진다. 두 번째는 책임전가이다. 본인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에, 행복에 있어 가감없다. 군중의 행동은 급진적 현명이다. 큰 변화를 유발한다. 반면에 군중의 행동을 유발하는 사상은 오랜 세월이 걸려 형성된다. 군중에게 아무리 논리적인 철학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군중에게 퍼뜨리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상을, 간단하고,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가급적이며 이미지로 전파해야 한다. 루소의 사상이 소백년 지나 프랑스 혁명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이 수 백년 흘러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군중은 비합리적이지만, 시대를 바꾸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난 시대의 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잘 이해한 시림학자이다. 군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 확언, 반복, 위엄이다. 확언은 단순하지만 강한 어조의 문장을 의미한다.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군중들은 검토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반복은 끊임없이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을 의미한다.히틀러의 충실한 선동가, 괴벨스가 선전, 연설을 통해 독일 굼민들에게 민족주의를 심어준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엄이다. 군중들에게 지도자에게 초월적 능력이 있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 군중은 지도자에게 경외심을 느껴야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막스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책들에서 이미 지도자의 '위엄'에 대해 다룬 바가 있다. 실제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군중들에게 지도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이 3가지 요소를 통해 군중들이 움직인다.


군중을 움직이는 '무의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르봉은 유전자에 내재된 '민족성'이라고 보았다. 무의식은 민족의 역사에 따라 형성된다. 따라서 민족마다 내재된 무의식이 다르다. 사회제도는 무의식의 발현에 불과하다. 르봉에 따르면 사회제도는 무의식을 반영해야한다. 따라서 급진적이며 인위적인 사회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역사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제도가 그 민족에 맞는 제도이다.


현대에 와서 르봉의 '군중심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민족성에 대한 부분이다. 이미 사회는 민족 기반에서 세계화 사회로 변화되었다. 또한 민족의 무의식에 대한 관점은 민족에 대한 차별을 유발하는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들은 ;군중심리'를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점이 존재한다고 해서, 책의 가치가 퇴색되는건 아니다. 나는 인간 또한 텍스트의 일부로 이해한다. 만나는 사람에게서 단점이 보인다고, 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사람을 만날 때 장점을 보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이다. '군중심리'는 군중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군중은 분명 '비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어떤 훌륭한 개인도 군중의 힘을 뛰어넘지 못한다.


현대에 와서 군중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다. 군중 전체를 계몽시켜, 모두가 참여하는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군중들은 비합리적이다 라는 전제를 인정하고, 군중들의 폭발적인 힘을 이끌 것인지.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회는 소수의 엘리트들을 양성하느 것에 초점이 가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의 잠재적인 힘을 이끄는 것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도, 실패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군중심리는 해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사회과학의 특성이다.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해답을 이야기하지 않고, 선택지를 제시할 뿐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앞으로의 군중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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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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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배꼽은 가슴, 엉덩이와 다르다. 가슴과 엉덩이는 그 여성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배꼽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대해 말한다. 그건 태아이다. 배꼽은 태아가 태어나길 원했든, 태아가 태어나길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삶의 의지를 나타낸다.




스탈린은 소련의 간부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들은 스탈린의 말을 믿는 것처럼 반응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면 스탈린이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을 했다. 그 시대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만드는데 스탈린이 일조를 한건 사실이다.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에서 한 개인의 농담은 의미를 상실한다.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진실과 거짓뿐이다. 그리고 이제 농담이 없는 시대는 사라졌다.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무의미해진 개인의 존재를 다뤘다. 이때 '무의미'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의미없다'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일상에서 '의미없다'는 쓸모없다, 필요 없다로 사용된다. 하지만 쿤데라는 '무의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 기준은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의 농담이, '거짓말'로 치부되는 것처럼, 그 경계는 모호하다. 우리는 의미 없는 걸 견디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라며 어떤 행동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고, 의미를 찾지 못할 때는 이미 행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의 존재를 부정하려 든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 행동은 분명히 이미 일어난 일아리는 점이다. 의미와 유무와 별개로.




쿤데라의 첫 작품 '농담'이 쓰인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무의미의 축제'는 2014년에 쓰였다. 시대는 많이 변했다. 시대를 주도하던 이데올로기는 소멸했고, 이데올로기의 소멸 아래에 인간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의 소멸은 개인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개인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이데올로기라는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갈길을 잃어버렸다. 이 선택이 옳은지에 대해 판단기준조차 모소하다. 쿤데라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 예상해본다. '선택에 대한 의미와 무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이미 그걸 선택했고,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라고.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는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선한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개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무의미의 축제'인 듯 하다. 개인의 삶은 의미있다, 없다를 판별 할 수도 없으며, 그 평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살아간다.




태아의 흔적이 남아있는 배꼽처럼 우리는 의지로 살아간다.생존의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한번 뿐인 인생, 열심히 살자'라는 식상한 말이 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건가? 아니다. 열심히 살자는 건 어쩌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잣대일 수 있다. 최소한의 시간을 통해 최대의 결과치를 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목소리'.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열심히 사는게 꼭 행복을 보장하고, 의미를 창출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의마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낟. 한때, 무거운 사명감 아래에서 살아 숨쉰적이 있었다. '마땅히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무거운 사명감은 행복을 느낄 여유를 강탈해갔으며,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명감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삶은 의미가 있으며, 행복할 자격을 박탈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사명감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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