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여성의 배꼽은 가슴, 엉덩이와 다르다. 가슴과 엉덩이는 그 여성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배꼽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대해 말한다. 그건 태아이다. 배꼽은 태아가 태어나길 원했든, 태아가 태어나길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삶의 의지를 나타낸다.




스탈린은 소련의 간부들에게 농담을 했다. 그들은 스탈린의 말을 믿는 것처럼 반응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면 스탈린이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을 했다. 그 시대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만드는데 스탈린이 일조를 한건 사실이다.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에서 한 개인의 농담은 의미를 상실한다.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진실과 거짓뿐이다. 그리고 이제 농담이 없는 시대는 사라졌다.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무의미해진 개인의 존재를 다뤘다. 이때 '무의미'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의미없다'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일상에서 '의미없다'는 쓸모없다, 필요 없다로 사용된다. 하지만 쿤데라는 '무의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 기준은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의 농담이, '거짓말'로 치부되는 것처럼, 그 경계는 모호하다. 우리는 의미 없는 걸 견디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라며 어떤 행동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고, 의미를 찾지 못할 때는 이미 행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의 존재를 부정하려 든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 행동은 분명히 이미 일어난 일아리는 점이다. 의미와 유무와 별개로.




쿤데라의 첫 작품 '농담'이 쓰인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무의미의 축제'는 2014년에 쓰였다. 시대는 많이 변했다. 시대를 주도하던 이데올로기는 소멸했고, 이데올로기의 소멸 아래에 인간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의 소멸은 개인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개인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이데올로기라는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갈길을 잃어버렸다. 이 선택이 옳은지에 대해 판단기준조차 모소하다. 쿤데라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 예상해본다. '선택에 대한 의미와 무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이미 그걸 선택했고,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라고.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는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선한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개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무의미의 축제'인 듯 하다. 개인의 삶은 의미있다, 없다를 판별 할 수도 없으며, 그 평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살아간다.




태아의 흔적이 남아있는 배꼽처럼 우리는 의지로 살아간다.생존의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한번 뿐인 인생, 열심히 살자'라는 식상한 말이 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건가? 아니다. 열심히 살자는 건 어쩌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잣대일 수 있다. 최소한의 시간을 통해 최대의 결과치를 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목소리'.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열심히 사는게 꼭 행복을 보장하고, 의미를 창출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의마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낟. 한때, 무거운 사명감 아래에서 살아 숨쉰적이 있었다. '마땅히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무거운 사명감은 행복을 느낄 여유를 강탈해갔으며,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명감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삶은 의미가 있으며, 행복할 자격을 박탈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사명감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