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뻬빠는 여기 ==> blog.aladin.co.kr/jaju79/3851822
휘모리님이다.
휘모리님은 종종 영감을 준다.
영감이래서 거창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냥 잡생각을 하게 하는 빌미를 준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휘모리님이 잡생각이나 하게 하는 분이라 여기면 이 또한 곤란한 일이다.
그분의 미모로움에 대해선 이전 구한말체 관찰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blog.aladin.co.kr/718415105/3316306)

인용한다.

"이를테면 보통 1.5만원 하는 치킨을 마트에서 사서 내가! 하면 오천원이면 먹을 수 있는식의 절약,
나는 그런 상황에서 더 맛있는 닭을 먹을 수 있다면 2, 3만원 지를 인간이다. "

오천원짜리나 만오천짜리나 닭은 같은 닭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좀 곤란할 수가 있다.
이 주제는 생각보다 재미있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한번 따로 논해보자.

닭을 오천원 주고 먹었을때 남은 만원의 의미에 관한 것이 오늘의 주제다.

이걸 근검절약이라고 할 것인가?  효용성의 상대적 평가에 따른다고 해야 맞을 것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 보자.
그러면 근검절약은 유익한 행위인가? 말 알아 듣기 시작한 이래 지겹도록 들었을태니 이 역시 그렇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왜 훌륭한 행위인가?
이런 걸 묻는 걸 구타 유발 행동이라 한다.

절약한 걸 저축하여 아마 장래에 부자가 되거나 환란이 닥쳤을때 유용하게 쓰고자 하기 위함이라 할 것이다.
혹은 모모씨 선물 구매 자금으로 한다거나 등등 기특한 용도가 많을 것이다.
하여간 절대 불변의 사실은 미래에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미래,
현재의 고통은 다 미래를 위한 것이라 한다.
현재 5천원짜리 닭을 먹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사실은 실현될 지 전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 미래다.
지금 5천원짜리 닭을 먹는다고 해서 미래에는 만오천원짜리 닭을 먹을 수 있을는지는 전혀 확신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높다. 분명 닭 값은 오를것이니까.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라면 지금 먹을 수 있을때 빨리 만오천원짜리를 먹어 두는 것이 장땡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이나 모두 똑 같이 중요하다.
물론 인과론에서 보자면 현재의 시간은 과거에, 미래의 시간은 현재에 각기 그 가치의 의존성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미래의 행복만큼이나 현재의 즐거움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어느 시간이나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미래는 늙음이다. 그리고 현재는 젊음이다.
어느쪽이 더 중요한가? 당연히 현재.
선인들의 훌륭한 말씀도 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당연 젊은 노새가 힘도 좋겠지.
난 후회란게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요즘 일말의 후회 비스므리한것을 느끼는데 그건 젊은 노새가 되지 못하였음에 대한 탄식이랄까.

빠삐용에게 법정은 인생을 낭비한 이유로 유죄를 선고한다.
나 역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데에 보다 돈 버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쓴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을 것이다.

하여간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래가치를 더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내일 홀랑 다 태워 먹더라도 오늘 나무를 심겠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럼 미래가 왜 중요한가?
이쯤되면 하이데거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말하길 인간은 '미래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하자면 골아픈 일이지만 현재 하는 일은 거의 모두가 미래를 근거로 한다.

지금 닭을 주문하는 것은 가까운 미래에 닭을 먹기 위해서이고
지금 5천원짜리 닭을 먹으며 좀 더 먼 미래에 5천원짜리 두마리를 더 먹을 수 있기 때문이고
지금 1.5만원짜리를 먹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미래에 근검절약하는 훌륭한 애인이 될 수 있을것이란 절대 절대 오지 않을 미래를
공상하고 거기에다 현재 행동을 기초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결론으로 도달한다.

다 같은 시간인데 중요도가 달라지는 것은 그 순서에 있다.
즉 앞에 있는 시간, 뒤에 있는 시간.
순서가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가진 시간은 유한하다.
내가 불멸의 존재라고 해보자.
시간의 순서는, 아니 시간 자체가 내게는 전혀 무의미해질것이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은 가진 시간의 종말, 즉 죽음이 그 경계를 그어 놓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현재 시간에 충실하고자 함은 미래 즉 죽음에 기초하는 인간 행동을 초월하고자하는 행위이다.

고로 2, 3만원 짜리 닭을 먹고자 하는 행위는 인간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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