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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니오는 자신이 유능한 핵커이나 멍청한 상관에 의해 곧 해고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그는 기계가 만들어준 물통속에서 딩굴고 있는 존재이다.
니오가 SM을 주차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니오는 '기둥 뒤에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며 있다고 믿을 뿐이다.
니오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즉 확신할 수 있는 단하나의 존재는 니오 자신 뿐이다.


버클리
'기둥 뒤에 공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공간이라는 건 무엇인가.
SM운전자가 지나갈 수 있는 그 어떤 물리적 실체를 공간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운전자는 못 지나가지만 파리는 지나 갈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즉 공간이라는 건 운전자든 파리든 어떤 실체에 대한 상대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공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재하진 않는다.
즉 공간이라는 건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존재이다.


니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따르자면 SM운전자는 차를 우측 한귀퉁이로 모는 대신 가급적 좌측으로 집어 넣어 자신이 내리기 편하게 하여야 한다.
교회에서는 이런 욕망을 악이라 규정하고 적대시하나 이래서는 사람이 사는 재미가 없다.
여기가 교회주차장이라면 아무래도 타협이 필요한데 이런 욕망을 예술적 주차 솜씨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기둥 뒤에 공간'은 없는게 더 좋다. 덤으로 예술적 탈출 솜씨를 보여 줄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말이다.
이런 원초적 욕망을 럭셔리하게 승화시킬 수 있는 운전자를 '초인'이라 한다.
 

제러미 벤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주차장에서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기둥 뒤에 공간'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SM운전자는 경차 한대를 더 주차할 수 있도록 주차 공간 한계치내에서 최선을 다 하여야만 한다. 이는 SM운전자가 어떤 식으로 그의 차에서 탈출 할 것이냐는 별개로 한다.
공리주의에서는 최대행복이 목적이다.
이 행복이라는 것이 SM운전자의 행복인지 경차운전자의 행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까뮈
시지푸스의 형벌이 매우 중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시지푸스를 저 SM에다 앉혀 놓는다고 해보자.
바위덩어리를 산꼭대기에 굴려 올려 놓은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확실히 주차가 더 쉬워보인다.
그렇다고 신의 관대함을 칭송하여야 할 것인가.
'기둥 뒤에 공간'이 있는 장소에 주차를 성공적으로 하였다고 하자. 이 걸로 끝인가? 잠시후면 시지푸스는 차를 끌어내야 한다. 끌어내면 끝인가?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주차하여야 한다.
시지푸스가 당한 형벌의 공포는 그 자체가 철저히 무의미 하다는 데에 있다.
시지푸스의 삶은 끝없는 차대기-차빼기-차대기-차빼기-....로 이어진다.
공포는 실존에 대한 회의 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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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ei 2010-01-0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이 갓.
이런 걸 써도 방문자가 150이 넘다닛, 그것도 일요일에.